산행자료/등산자료
지리산 종주 산행기(소월 이성영)
카프리2
2016. 10. 1. 18:47
백두대간의 웅장한 끝맺음 |
지리산 종주 산행기 |
(2001. 9. 3 - 5) |
沙月 李 盛 永 |
서 언 |
내가 집사람과 함께 지금까지 지리산을 오른 것은 여덟 번이라고 기억된다. 노고단에 세 번, 반야봉에 한 번, 뱀사골에 한 번, 세석평전에 한 번, 청학동 삼신봉에 한 번 그리고 천왕봉에 두 번을 올랐다. '지리산 종주쯤은 해야 지리산 등산했다'고 내 놓고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 나이 이순(耳順)에 든지 몇 해가 지나도록 지리산 종주는 엄두도 못 냈다. '직장에 매인 몸이라' 마음속으로 핑계는 대 보지만 어디 직장이 없는 백수만 지리산 종주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들 녀석이 대학 2학년 때이니까 '85년으로 생각된다. 신체도 건장하고, 뚝심도 있는 녀석인데 친구와 둘이서 3박4일 지리산을 종주했다면서 돌아 온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야영에 필요한 천막과 침낭, 총 12끼 분의 식량과 코펠 및 버너,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세면도구, 식수 이런 것들을 모두 챙기고, 화엄사계곡에서 그 긴 급경사 길을 오르면 종주코스 첫 봉우리 노고단에 도착할 때쯤은 젊은 사람들도 벌써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는데 등짐은 먹는 것이 조금씩 줄어질 뿐이고 대신 이슬 맞고, 비 맞고, 땀나서 가벼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무거워 지니 지겹게 계속되는 등산길이 즐겁기는커녕 말 그대로 '지옥훈련'이라는 것이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이야기라 그 이후 감히 지리산 종주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 종주의 기회는 집사람이 회갑을 지낸 지 얼마 안 되는 지금 우연히 왔다. 그것도 북-남, 서-동 두 번을 일주일 간격으로 연거푸 하게 됐으니 우연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
북남종주(北南縱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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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회 지리산특별산행 북-남 종주 (백무동-천왕봉-세석평전-삼신봉-청학동) |
2001. 8. 26-28일 간의 아산회 특별산행으로 백무동-천왕봉-세석산장(1박)-삼신봉-청학동 코스로 된 지리산 북남종주계획이 동기회 홈페이지에 떴을 때 집사람과 상의했더니 함께 가고싶은 눈치였지만 제한된 차편에 남자들만 가니 어쩔 수 없다면서 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 특별산행에는 회장 연종이를 비롯해서 열 사람이 참여했다. 백무동에서 하동바위를 지나 참샘 위 능선까지는 계속 오르기만 하는 급경사 돌길이라 힘들었지만 능선에 올라서고부터는 비교적 완만하고 산죽이 양 옆으로 도열하며 길을 안내하며, 간간히 반야봉이 보이는 등 전망대도 있어 지루하거나 힘든 줄 모르게 올랐다. 난 재작년에 이 길을 미영이 데리고 부부가 올랐기 때문에 대충은 어디쯤은 뭐가 있는지 기억한다. 장터목산장이 올려다 보이는 쉼터에 도달했을 때는 누구 할 것 없이 탄성을 올렸다. 그렇지만 여기서 산장까지도 족히 한시간은 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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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샘 위 능선 산죽길(왼쪽)과 장터목 산장이 보이는 망바위쉼터(오른쪽) |
장터목산장에서 점심을 해 먹은 후 배낭들은 모아두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에서 동서남북을 둘러보는 일망무제(一望無際) 전망에 감탄을 하고, 기념사진들을 찍은 다음 장터목산장으로 돌아 와서 배낭을 메고 예약된 세석산장을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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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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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산장 1박 |
저녁식사하고, 담배한대 피우고, 커피도 한잔 하고, 잠을 청해 보지만 글쎄! 교향곡 때문에. |
산장에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억세게 골아대는 코고는 소리를 교향곡 감상하면서 자는 듯 마는 듯 일박을 하고 자동차를 청학동으로 가져와야 할 익남이와 영배는 한신계곡으로 해서 백무동으로 내려가고, 나머지 여덟 명은 산장에서 약 200m 쯤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 거림마을로 가는 길과 갈라져 오른쪽 길로 십 여분 돌아 낙남정맥의 능선 위에 올라서니 가야 할 청학동 뒷산 삼신봉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삼신봉까지는 험한 봉을 우회하는 비탈길 네 곳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이라 여유 있게 걸었다. 낙남정맥을 따르는 길은 대부분 키를 넘는 산죽(山竹)이 우거진 길이라 웃 옷을 긴 팔 소매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일행이 청학동이 내려 다 보이는 삼신봉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십 여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리산을 남쪽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삼신봉'이라는 것을 어디 선가 읽고 삼신봉을 오르기로 결심하고, 그때만 해도 집사람은 산 타기에 아직 초보였는데 하기 휴가코스에 이곳도 넣어 지도만 보며 찾고 찾아 청학동(지도상에는 묵계리)에 도착해서 1박을 하고, 고전 끝에 삼신봉에 올랐는데 구름 때문에 지리산 볼 수가 없었다. 오락가락 하는 구름 사이로 노고단과 반야봉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고, 천왕봉은 아예 그 얼굴을 내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기다려 봐야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아서 올라 온 길 보다는 새로운 길, 외삼신봉을 거쳐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외삼신봉에는 환인, 환웅, 단군 삼신에 제사 지내는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고 읽었기 때문에 이를 구경도 할 겸 행여 구름이 걷혀서 지리산 남쪽 파노라마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 때문이었는데 결국 허사였다. 그 후로도 언젠가는 다시 삼신봉에 올라 지리산 남쪽 전경 파노라마사진을 찍으리라 마음먹어 왔던 터이니 이번 기회가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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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의 청학동 내삼신봉(1284m)(왼쪽)과 외삼신봉(1355m)(오른쪽) |
남들은 출출한 배를 좀 채우려고 아끼고 남겼던 C레이션과 간식들을 풀어놓고 먹기에 바빴지만 나는 카메라를 들고 서쪽 노고단에서부터 동쪽 천왕봉까지 연결된 사진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쾌청한 날씨에 시계가 좋아 사진은 잘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지리산 남쪽 전경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천왕봉과 촛대봉 정상을 가린 흰 구름이 좀처럼 비켜주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십 년을 생각했던 것인데 이 두 봉우리가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일단 구름 덮인 촛대봉과 천왕봉 부분도 찍었다. 동료들은 배를 좀 채웠는지 짐을 챙기고 신발 끈도 조여매는 품이 곧 출발 할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베낭을 둘러 메고 앞 사람을 따라 바위 벼랑을 내려서려다가 무심코 뒤 돌아 봤는데, 이 어인 일인가 촛대봉과 천왕봉을 꾹 눌러 덮고있던 그 무거워 보이던 구름덩이가 마치 가벼운 풍선처럼 산봉 위로 두둥실 떠오르며 두 봉우리의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벗겨주지 않는가! 나는 뒤 돌아 삼신봉 정상 바위위로 뛰어가 이 두 봉우리가 포함되는 세 컷트의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나의 행동을 희장 연종이가 지켜보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산행이 무사히 끝나고 귀경한 다음날 희장의 지리산등산결과라는 제목의 글이 동기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랐는데 그 글 가운데 '이성영의 지리산 남쪽 전경의 파노라마사진이 기대된다" 구절이 있어 그제서야 나만이 아니라 연종이도 그 장엄하게 펼쳐지는 지리산의 대 파노라마 전경에 매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홈페이지 게시를 통해 동기생들에게 공포했으니 사진이 잘 못나왔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생겼다. 사진을 현상해서 수작업으로 연결 해 보니 과연 백리의 지리산 주능선은 멋지게 생겼고, 사진도 잘 나왔다. 뒤늦게 바쁘게 찍은 동쪽 세 장의 중심이 약간 아래로 처져 사진이 조금 엇났지만 구불거리며 지나가는 지리산이 그리는 하늘금(空除線),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 깊이 패인 골짜기 어느 하나 또렷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다음 달 정기 산행 때는 가지고 가서 아산회 회원 여러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야겠다고 맘먹고 잘 간직해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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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서부(노고단-삼각봉), 중부(-영신봉), 동부(-천왕봉) |
서동종주(西東縱走) 1 : 노고단 - 화개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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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서 서로 바라 본 지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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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회 지리산 특별산행에서 돌아 온 다음 날 오후 늦게 우리 부부와 딸애 셋이 시골을 향했다. 딸애는 세 밤을 자고 토요일에 버스 편으로 상경하였고, 우리 부부는 배추, 무 등 가을 채소를 심고 집 정리 좀 하고 나니 별 할 일이 없었다. 산행 때 청학동 매표소에서 적어 온 산장과 콘도 예약 전화번호를 꺼냈다. 성수기가 지난 때인지라 두 가지 모두 쉽게 예약이 되었다. 그리고는 집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집사람은 우선 '지리산 종주'라는 말에 기가 질린 모양이다. 십오년 전에 지리산 종주를 하고 돌아온 아들의 몰골이 생각난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집사람도 더 늙고 힘없어지기 전에 한 번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동의하며 필요한 쌀과 밑반찬, 코펠과 버너 등 가벼운 차림으로 지리산 일성콘도로 떠났다. 시골에서 한시간 반쯤 걸렸다. 지리산 서-동 종주를 계획하면서도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제는 콘도에서 어떻게 성삼재까지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승용차로 성삼재를 올라 그곳에 차를 두게 되면 등산이 끝난 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성삼재를 올라 가야 한다. 궁리 끝에 카운터에 물어서 얻은 택시 헨드폰 전화를 눌렀다. 요금은 3만원이고 아침 7시까지 콘도에 대기로 약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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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화개재 지도 |
◆ 노고단(老姑壇, 1507m) |
우리 부부가 택시로 성삼재에 도착한 것은 9월 4일 아침 07: 40분 경이었다. 택시를 돌려보내고 더 머뭇거릴 것도 없이 노고단을 향해 올랐다. 수금원이 출근하지 않아서 유공자증을 꺼 낼 것도 없이 통과했다. 길 양쪽으로 이따금씩 나무에 붙이거나 표말을 세워 놓은 나무 이름이며, 지리산에 서식하는 새, 물고기들의 사진들은 보며 첫 번째 지름길을 오르니 어느새 코재 쉼터에 다다랐다. 초가을 이른 아침 날씨에 해발 1,300m가 넘는 높이 때문인지 땀도 안 났지만 쉬어가기로 했다. 길에서 조금 올라서면 전망바위가 있어 좋았는데 그 위에 돈 들여 아예 목재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안전에 관계되지 않은 한 자연 그대로가 제일 좋은데 괜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 등산 때는 여기가 필수 쉼터다. 노고단 쪽에서 내려오는 도랑에 콸콸 흐르는 물이 있고, 발아래 깊고 깊은 화엄사계곡, 눈을 좀 들어올리면 구례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서쪽에 종석대가 솟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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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재에서 올려다 본 종석대 |
코재의 이름이 왜 생겼는지는 모르는 사람도 이곳에 서서 화엄사계곡을 내려다보면 쉽게 알게 된다. 성삼재 찻길이 나기 전에 이 화엄사골짜기는 노고단과 반야봉을 오르거나 지리산종주를 시작하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화엄사에서 거리 9Km, 높이 1,200m를 오르는 길고도 가파른 오르막길에 처음 시작이라 무거운 등짐을 잔뜩 지고 지칠 데로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재로 오르는 구간이 그야말로 깔딱고개,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급경사' 때문에 얻게된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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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재에서 내려다 본 화엄사계곡 |
두 번째 지름길을 오르면 펀펀한 곳에 75평 콘크리트 건물의 산뜻한 노고단산장이 나타난다. 수용인원 220명이나 숙박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리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기는 하지만 등산객 차림보다는 일일 관광객차림의 사람들이 더 많고, 지리산 종주산행객도 산행의 시작이거나 끝이 되니 이 산장에서 묵어 갈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산장에서 돌을 박아 잘 정리한 길을 15분쯤 오르면 넓은 산등성이에 큼직한 돌탑 위에 '老姑壇'이라고 세로로 새긴 표석이 돌탑 위에 있고, 반야봉이 눈앞에 바싹 다가서며, 지리산 동쪽 끝 천왕봉을 보는 유료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는 노고단 고개 마루에 이른다. 보통 사람들은 여기를 노고단으로 생각한다. 우리 부부도 전에 세 번이나 노고단을 올랐지만 이 곳에 온 것이다. 시골집 현관문을 열면 바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걸려 있는 휘림이와 내가 다정하게 손잡은 등산복차림의 큼직한 16x20 확대사진도 199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국방과학연구소(ADD) 실원들과 함께 여기에 올라 찍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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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노고단에 오른 조손(祖孫) |
지리산 종주 길은 여기 노고단고개에서 돼지평전까지 진짜 노고단의 북사면을 가로질러 나 있다. 아침 여덟 시 반이다. 진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입구 문이 닫혀 있다. 그 앞에는 1일 4회 제한된 예약 인원에 한해서 개방한다는 안내문을 읽어보고 있는 동안에 어느 신문사인지 잡지사인지 기자 차림을 한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이 열 시까지 기다리자면 너무 늦어 안 된다면서 목책을 넘어 들어간다. 우리 부부도 뒤따라 들어갔다. 정상에는 꾀나 넓게 평탄하게 닦은 마당이 있고 한가운데 큼직한 돌탑(케룬)이 있는데 이것은 청학동 도인들이 총동원되어 3일간 쌓은 것이라 한다. 돌탑의 서남쪽에 큼직한 원석에 세로로 老姑壇(노고단)이라 쓴 큼직한 글씨와 돌탑이 잘 어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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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노고단(노고단 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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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 노고단(노고단고개) |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높인 말로 '노마님'이란 뜻이며, 제사를 지내는 단이 있었기 때문에 '노고단'이라 한다. 뒤에 '남악사(南嶽祀)'라 하였는데 이는 성모사상에 따른 민간신앙 차원의 행사에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중사(中祀:제사)를 이 곳에서 지내므로서 국가차원의 공식행사로 격상한 것이다. 아울러 이 곳은 화랑도들의 수련장이기도 하였다 한다. (신라 때 중사를 지낸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통일 전은 속리산, 북악 태백산, 남악 지리산, 중악 팔공산) 이러한 신라시대의 전통은 고려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산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냈는데 장소는 노고단이 아니라 천왕봉과 함양 휴천면 남호리(산청 임천강 임천교가 있는 곳)로 옮겨서 하였다. 조선조 때는 세조2년(1456)부터 노고단의 남악사를 구례 산동면 내산리(현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곳) 평지로 옮겨 제례를 행하였다. 일제 때에 이러한 관 주도의 남악사 제례를 일체 중지하였고, 1969년부터는 남악사를 화엄사 앞으로 옮겨 구례군 축제로 약수(고로쇠, 거제수나무 물)를 지리산산신에게 바치는 제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노고단은 이러한 역사적 민속적인 의미 때문에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세 주봉의 하나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노고단 또한 외세의 침략과 해방 후 이념갈등의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일제 때 노고단에는 미국, 호주 등 외국인 피서용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는데 호텔, 공회당, 교회당, 발전소, 영화관, 간이풀장까지 갖춘 그 당시로는 호화판 별장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는 대대로 숭고하게 여겨져 온 노고단 마저 홍콩식 외국조차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해방 후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진압 후 근 두 달간 김지회를 두목으로 하는 반란군 잔존세력이 노고단 외국인 별장촌을 점거하여 빨찌산거점화 하자 12월에 국방경비대가 투입되어 토벌작전을 벌리면서 다시 그들이 거점화 하지 못하도록 별장 건물을 모두 불태웠는데 이 때 노고단 일대의 수목들도 함께 타 버려서 지금까지 노고단에는 큰 나무가 없고, 새로 돋아난 싸리나무 등 관목과 초본식물만 자라고 있는 것이다. '노고단 운해(雲海)' 지리산 10경의 제3경이다. 가을 날씨가 너무도 쾌청해서 운해를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길 수는 있었다. 왜 하필이면 노고단 주변에 구름이 많을까 하는 생각과 구름 낀 노고단 주변의 경치를 상상해 보았다. 노고단은 해발 1,507m로 동서로 높고 길게 지리산 주능선의 맨 서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남해에서 일은 구름이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구례 땅에 이르러 지리산 만복대에서 서쪽으로 뻗어-다름재-밤재-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기맥에 막혀 몰려온 구름들이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만복대 서쪽 저지대와 천은사-화엄사계곡, 피아골까지 구름이 꽉 채워지면서 구름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 구름 위로 가까이는 서쪽으로 만복대, 고리봉, 종석대, 차일봉, 동쪽으로는 반야봉, 불무장등, 통곡봉, 황장산, 남쪽으로는 문바우등, 왕사리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마치 섬처럼 솟고, 멀리는 광양의 백운산, 승주의 조계산이 구름위로 가물가물 보이는 그야말로 구름바다(雲海) 위의 그 풍경은 속세를 떠나 천상에 온 듯한 느낌을 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이 일대 군락을 이룬 원추리 꽃, 진달래, 철쭉 그리고 지금까지 입산 통제 덕분에 무성해진 야생화가 만발하고 보면 구름과 꽃이 이루는 조화 또한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노고단은 또 하나의 지리산 10경의 제10경'섬진 청류(淸流)'를 바라보는 자리다. 평탄하게 닦은 노고단 봉우리 남쪽 가에 목재로 섬진청류전망대를 설치 해 놓았다. 가물가물하게 먼 남쪽이 하동과 섬진강하구이고, 좀더 가까이 시선을 옮겨오면 물가에 악양루와 고소성이 있는 악양이다. 이 곳 고소성이 어떻게 해서 중국 소주에 있는 고소성(古蘇는 蘇州의 옛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섬진강에 기인된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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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청류전망대 |
좀더 가까이 올라오면 조영남의 노래 때문에 유명해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닷 세 만에 한번 씩 한데 어우러지는 화개장터이고, 한 모퉁이 더 돌아오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현장 토지면이다. 강을 따라 더 상류로 올라가 구례읍을 지나면 조계산 자락의 주암호에 갇혔던 물이 흘러 내려오는 보성강이 합해지는 합수지점도 바라 볼 수 있다. 강 양쪽의 하얀 모래,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 사람의 시력 한계 때문에 여기서 보지는 못하지만 그 위로 날고 있을 물새,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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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평전에서 되돌아 본 진노고단(왼쪽)과 모조노고단(오른쪽 안부) |
◆ 반야봉(般若峰, 1733.5m) |
노고단 정상에서 동쪽으로 돼지평전까지는 그 동안 등산로를 폐쇄했기 때문에 나무 가지들이 길을 막기도 하지만 그런 데로 걸을 만 하다. 돼지평전은 세석평전이나 덕유평전처럼 넓게 펼쳐진 평전이 아니고 노고단에서 임걸령에 이르는 산등성이 위에 좁고 길게 벋어 있어 얼 핏 봐서는 평전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좀 뭣하다. 이 곳이 '돼지평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주변에 군락을 이루는 원추리 뿌리를 캐 먹으려고 멧돼지들이 땅을 들쑤셔 놓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간단한 내력을 적은 간판이 걸려 있다. 돼지평전은 일명'비목령(碑木嶺),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지리산종주길과 노고단 정상에서 우리 부부가 내려 온 길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돼지평전이 시작되는데 이 곳에 '70년대 초에 고교생 세 사람이 혹한(酷寒) 속에 세석에서 노고단까지 무리하게 눈 산행을 하다가 한 사람이 이 곳에서 동사하여 이를 추모하는 비목(碑木)을 세웠던 곳이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 비목에는 조난자 이름은 없어지고 '조난산악인'이란 다섯 글자만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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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목령에 남아있는 비목 |
지리산종주길이 시작되는 노고단고개에서 돼지평전 사이에 '장승터'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지금 우리 부부는 노고단 정상으로 올라서 돌아왔기 때문에 여기를 거치지 않았다. 이 곳은 '88년 11월 6일에 정체 모를 단체가 민족통일대장군(民族統一大將軍)과 민중해방여장군(民衆解放女將軍)이란 장승 2기를 세웠는데 이듬해 5월에 누군가 전기톱으로 잘라 없애 버린 곳이라 한다. 아마 이념갈등의 소산인 것 같다. 돼지평전이 끝나고 좀 경사가 있는 비탈길로 10여분 가면 반야봉을 오르는 급경사길을 '쉬어서 단단히 준비하라'는 듯 안부(鞍部)진 고개가 있고 PVC관에서 물줄기를 시원스레 내 쏟는 샘이 있다. 이 곳을 '임걸령(林傑嶺)'이라 한다. 북쪽 심원골에서 남쪽 피아골로 넘나드는 고개인데 조선 명종 때 관군도 토벌하지 못한 유명한 도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이 이곳에 근거지를 차리고 활동했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산 깊고 물 좋고 동서남북으로 길이 통하니 도적 소굴로는 십상인 것 같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 '황호랑이막터'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바로는 약초 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 곳에서 잠자다가 호랑이를 만나 기발한 지용(智勇)으로 화를 입지 않고 도리어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임걸령에서 목도 추기고 식수도 채운 다음 길을 나서면 금새 급경사 길을 만난다. 종주코스 치고는 꽤 급한 길이다. 지금은 종주길 중 가장 힘든 구간이다. 약 30-40분을 헉헉대며 오르다 보면 '노루목'이라는 이정표가 있고 반야봉 길과 종주길이 갈라진다. 원래 노루목은 이정표가 서 있는 이 곳이 아니라 반야봉 쪽으로 좀 더 올라가서 삼도봉 쪽에서 반야봉으로 올라오는 길과도 만나는 삼거리가 진짜 노루목이다. 산 봉이라고 할 수는 없고 경사면이라 할 수도 없는 조금 튀어나온 부분인데 종주 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이정표를 아랫쪽에 세운 것이다. '50-'60년대에 사냥을 업으로 하는 프로급의 사냥꾼은 멧돼지, 곰, 호랑이가 사냥의 대상이었지만 돈많은 졸부(猝富)의 서툰 사냥꾼 들은 물오리 같은 철새나, 노루와 고라니 사냥이 제격이었다. 위험하지도 않으면서 짜릿한 쾌감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루사냥 때 포수는 노루가 도망갈 만한 능선상의 목이 되는 부분에서 사격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고, 일당을 받고 동원된 몰이꾼이 워이-! 워이-! 하며 골짜기에 숨어있는 노루를 쫓으면 그 놈이 곧 포수가 기다리는 쪽으로 도망을 치다가 비명횡사하게 된다. 포수가 숨어서 노루가 도망 오기를 기다릴 만한 곳을 노루목이라 한다. 이 목을 잘 못 잡으면 그날 사냥은 허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곳 노루목은 사냥꾼이 노루를 잡을 만한 목이 아니다. 능선을 넘는 고개도 아니고, 누가 보아도 피아골, 심원골, 뱀사골에 숨었던 노루가 이 곳으로 도망 올 것 같지는 않다. 이곳 '노루목'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얻은 이름이다. 반야봉을 직접 올라보거나 노고단 쪽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노라면 반야봉 정상의 남쪽 지세는 피아골을 향해 몹시 가파르게 내리다가 바로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선 모습이 마치 노루가 고개를 치켜들고 먼 산을 멍청히 바라보는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세를 관찰하는 안목과 그 표현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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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서 바라 본 돼지평전 너머로 솟은 반야봉 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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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은 이번 산행에서는 제외하였지만 1987년에 우리 부부가 당일치기로 오른 적이 있다. 노루목을 지나 정상 직전이 몹시 가파르고 암석지대로 되어 있고, 또 많은 철 계단을 올라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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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반야봉 등산 |
'반야봉 낙조(落照)'가 지리산 10경의 제4경이다. 지리산 서편에서는 제일봉인 반야봉 꼭대기에서 심원골 건너 노고단-종석대-만복대로 이어지는 서북 병풍에 짙은 암영(暗影)이 드리워지고 이글거리던 태양이 그 오만을 접고 겸손하게 주홍색 큼직한 동그라미가 되어 온 하늘을 물 드린 저녁노을의 배웅을 받으며 광주 무등산 산 그리매를 왼쪽으로 한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선(線) 너머로 사라져 가는 장엄한 모습은 이를 바라보는 이에게 경건함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장엄한 끝맺음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래도 괜찮았던 한 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반야봉낙조는 보기가 쉽지 않다. 사진작가나, 기자처럼 업으로 하는 사람이야 이 꼭대기에서 야영을 할 각오로 오르지만 보통 등산객은 이를 본 후 그 장엄한 정경을 머리 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쪽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보면 사방을 분간하기도 어렵게 어두워진다. 높은 산의 어둠은 해가 떨어지자 마자 빠르게 그리고 짙게 깔린다. 그 험한 산길을 내려 와서 노고단산장이나 뱀사골산장까지 가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 사진은 구하지 못하고 반야봉을 배경으로 찍은 낙조와 여명사진을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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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 배경 여명(왼쪽)와 낙조(오른쪽) |
조선조 성종-명종 간에 살았던 대 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선생이 반야봉에 올라 지은 한시가 있는데 원문은 구하지 못했고 번역문만 옮긴다. |
지리산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니/ 올라와 보매 마음과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험한 바위 치솟아 산 봉들 뺴어 났으니/ 아득하게 높은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리오/ 땅에 스민 현묘한 정기 비내리고 이슬 맺고/ 하늘에 서린 서기 인걸을 낳네/ 산 찾아 온 나를 위함인지 구름, 안개 걷어주니/ 천리 길 찾아 온 내 정성 이에 통함일런가 |
◆ 삼도봉(三道峰, 1499m) |
노루목 이정표를 지나 비탈길을 10여분 가면 동-서 종주 하는 사람들이나 뱀사골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고, 내림 길을 조금 내려가면 이내 오름 길로 바뀌면 서 바위 덩어리들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그래도 지리산에서는 날카롭다고 표현할 만 하고 정상 부근에는 암석뿐 전망을 막는 나무가 없어 사방이 확 트이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삼도봉(三道峰)이다. 백두대간이 남한 땅에 들어와 세 개의 삼도봉을 만들고 있다. 두 개는 우리 고향에서 지척으로 바라보이는 민주지산 삼도봉과 대덕산의 거창삼도봉이고, 나머지 하나가 이 곳 지리산 삼도봉이다. 지리산 삼도봉은 북쪽이 전라북도(남원시 산내면), 서남쪽이 전라남도(구례군 산동면과 토지면), 동쪽이 경상남도(하동군 화개면)이다. 이 삼도봉은 조선 말기 고종 33년(서기 1896년)에 전국이 8도에서 13도로 개편되면서 얻게된 백년 남짓 된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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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지경표지청동삼각뿔(왼쪽)과 삼도봉에서 피아골 조망(오른쪽) |
삼도봉을 일명 '날라리봉'이라고 부르는데 그 많은 지리산의 산봉 이름치고는 좀 천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것은 정상을 이루는 바위들이 낫 날처럼 날카롭다 하여 '낫날봉'이라 한 것이 발음하기에 어려워서 자연스럽게 변음하여 날라리봉이 되었다 한다. 삼도봉에서 지리산 10경중의 제2경 '피아골 단풍(丹楓)'을 구경할 수 있다. 피아골은 '직전(稷田)'이라고도 하는데 피아골 입구의 마을 이름이 직전이다. '직전(稷田)'은 '피 밭'을 말하는데 피밭이 '피아'로 변음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직전은 피아골의 한자어인 것이다. 옛날 이 곳에는 쌀 농사는 물론 다른 곡식도 잘 안 되는데 피(稷)농사는 그럭저럭 되기 때문에 피 농사를 지어 먹고 연명하며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많아 수입이 짭짤하다고 한다. 피아골은 지리산에서도 제일의 활엽수림이다. 시월 중순쯤 되면 독불장군이 없이 피아골 활엽수림을 이루는 모든 나무들이 함께 어울려 삼홍을 연출한다. 삼홍(三紅)! 참 멋진 표현이다. 단풍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니 산홍(山紅)이요, 그 붉은 산이 물 속에 비치니 물 또한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연인의 손잡고 이를 보러 온 사람들 그 얼굴을 상기시켜 붉게 물 드리니 인홍(人紅)이라. 곧 삼홍(三紅)이다. '삼홍소(三紅沼)'란 이름이 붙은 소도 있는데 피아골의 단풍 중에서도 제1의 단풍 경치를 삼홍소로 꼽고 있다. 피아골 단풍은 설악산이나 내장산처럼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색상이 오히려 사람을 매료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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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삼홍소 단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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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상단부 단풍나무 |
피아골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이 계곡에서 흘린 피 때문에 |
◆ 화개재 |
삼도봉에서 화개재까지 급경사 내림 길인데 지금은 상,하행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넓은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고 좌측통행으로 내려가는 쪽은 고무 판까지 깔아서 미끄럽지 않게 잘 해 놓았다. 워낙 많은 계단이라 좀 지루하기는 하지만 안전하니까 먼 산 구경도 하고,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화개재까지 내려 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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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화개재 간의 나무계단 |
화개재는 일명 '중산이재'라고 도 하며, 해발 1,300m 남짓한 지리산 주능선에서는 가장 낮은 곳이다. 북쪽은 뱀사골이고, 남쪽은 목통골로 해서 화개장터에 이른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쪽 화개장터를 거친 생선, 해산물, 소금 등이 이 곳을 거쳐 북쪽의 운봉, 산내, 마천 등지로 공급되고, 내륙의 곡식, 산채 등 특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화개, 악양, 하동 등지로 공급되는 교역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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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재 정상(토끼봉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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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재 정상(삼도봉 방향) |
북쪽 뱀사골은 화개재에서 반선에 이르는 약 9Km나 되는 긴 계곡이고 서쪽에 지리산 제5봉 반야봉이 있고 동쪽에 토끼봉-명선봉-삼정산으로 이어지는 큰 능선 사이에 끼어 골이 깊기도 하지만 시종 험하거나 급경사 진 곳이 없고 완만하여 등산이라기보다는 장거리 산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코스다. 또 수량도 많고 물이 맑기를 그지없으나 지세 탓으로 큰 폭포는 없고 물웅덩이 소가 많아 이름 지어진 것만도 요룡소, 탁룡소, 뱀소, 병소, 병풍소, 간장소 등 여섯 개나 된다. 이들 소의 명칭들은 모두 그 유래가 있다. 소마다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간장소는 남쪽의 소금장수가 소금을 잔뜩 지고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 내려서다가 자칫 실족하여 물웅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물이 간장처럼 짜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간장소의 이름은 그 옛날 화개재가 교역로였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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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소/ 간장소 |
뱀사골대피소는 샘물 때문에 화개재에서 뱀사골 쪽으로 200m 내려가서 있는데 수용인원을 80명이다. 전기불이 없어서 밤에는 랜턴이나 후랫쉬가 필수적이라 한다. 1997년 겨울인가 미영이 데리고 내외가 산내면 일성콘도에 왔다가 성삼재로 해서 노고단을 목표로 나섰는데 눈이 많이 와 빙판이 되어 뱀사골 입구 반선마을에서 차량을 통제하는 바람에 방향을 바꾸어 뱀사골로 들어오면서 앉아서 점심 먹을 수 있는데 까지만 가자고 올라 온 것이 뱀사골대피소까지 와서 밥 먹고 그냥 내려간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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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 대피소 |
뱀사골에는 세계 7종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각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배롱나무(목백일홍) 줄기처럼 윤기 있고 불그스레 한 빛깔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꽃 또한 함박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답다. |
노각나무와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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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종주(西東縱走) 2 : 화개재 -벽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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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서 서로 바라 본 지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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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재-벽소령 지도 |
◆ 토끼봉(1534m) |
화개재에서 약간 경사가 있는 오름 길을 약 30분쯤 오르면 토끼봉에 이른다. 정상은 나무가 우거져 그 그늘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을 만한 그늘이 있어 점심을 먹었지만 조망은 좋지 않다. 기껏해야 반야봉 봉우리 윗 부분 정도만 보일 뿐이다. 정상 20m 전에 헬기장이 있고 이정표도 이 곳에 서 있다. 토끼봉에는 '지보초'라는 풀이 군생하여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부르지만 토끼가 많이 서식한다거나 산 모양이 토끼를 닮지도 않는데 '토끼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혀 다른데 이유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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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봉(卯峰) |
지리산 서편의 주봉인 반야봉에서 정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양식의 24방위(方位)로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12지(十二支)에서 토끼띠이기 때문에 이 봉우리를 '토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二十四位(24방위) |
1. 子方(자방); 352.5-7.5도, 정북(12시방향) | 2. 甲方(갑방); 7.5도-22.5도 |
3. 丑方(축방); 22.5도-37.5도 | 4. 艮方(간방); 37.5도-52.5도, 정동북 |
5. 寅方(인방); 52.5도-67.5도 | 6. 乙方(을방); 67.5도-82.5도 |
7. 卯方(묘방);82.5도-97.5도,정동(3시방향) | 8. 丙方(병방); 97.5도-112.5도 |
9. 辰方(진바); 112.5도-127.5도 | 10. 巽方(손방); 127.5도-142.5도, 정동남 |
11. 巳方(사방); 142.5도-157.5도 | 12. 丁方(정방); 157.5도-172.5도 |
13. 午方(오방); 172,5도-187.5도,정남(6시방향) | 14. 庚方(경방); 187.5도-202.5도 |
15. 未方(미방); 202.5도-217.5도 | 16. 坤方(곤빙); 217.5도-232.5도, 정남서 |
17. 申方(신방); 232.5도-247.5도 | 18. 辛方(신방); 247.5도-262.5도 |
19. 酉方(유방); 262.5도-277.5도,정서(9시방향) | 20. 壬方(임방); 277.5도-292.5도 |
21. 戌方(술방); 292.5도-307.5도 | 22. 乾方(건방); 307.5도-322.5도, 정북서 |
23. 亥方(해방); 322.5도-337.5도 | 24. 癸方(계방); 337.5도-352.5도 |
◆ 명선봉(明仙峰, 1586.3m) |
토끼봉에서 다음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 까지는 꾀 먼 거리인데 도중에 해발 1463m 봉우리를 하나 더 넘는다. 토끼봉과 명선봉 중간쯤에 총각샘 이정표가 있고,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 벼랑 밑에 솟아나는 샘을 '총각샘'이라 부르는데 이번 종주 때는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맨 먼저 장터목의 샘을 찾아내서 '산희샘'이란 처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 산악회가 1970년 7월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이 곳에서 또 샘을 발견하고는 동쪽에 처녀 샘이 있으니 서쪽의 것은 '총각샘'이라 하자는 공론이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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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샘 |
명선봉을 서북편으로 돌아서 내려서면 곧 연하천산장(煙霞泉山莊)에 도달한다. 수용인원 50명으로 비교적 작고 산과 숲으로 둘러 쌓여 사방을 둘러보는 전망이 없어 동서남북을 구분하기도 어려운 그저 한적한 곳이다. 백두대간종주지도를 자세히 보면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이다. 연하천의 물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남쪽으로 흘러 대성리를 지나 화개장터로 흘러갈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북쪽 뱀사골로 흘러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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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천 산장 |
지리산 동쪽부분에 연하봉(煙霞峰)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 곳의 샘을 '연하천(煙霞泉)'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진주 지리산산악회의 전신이 연하반(煙霞伴)이었는데 그 때 이 샘을 발견하고 산악회 이름으로 샘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 '대자연(煙霞)의 서기(瑞氣)가 어려 솟아나는 샘물' 이란 좋은 뜻이기는 하나 연하봉과 같은 이름이라 지리산을 처음 종주 하는 사람에게는 좀 헷갈리게 한다. |
◆ 삼각고지(三角高地, 1462m) |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종주길에서 북쪽 심정리 마을로 내려가는 샛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 오던 길보다 좀 높을 뿐인데 이곳이 하동의 화개면과 함양의 마천면, 남원의 산내면의 지경이 되는 곳이라 웬만한 지도에는 산봉 이름이 없지만 사람들이 삼각고지 또는 삼각봉이라 부른다. 이 삼각고지 남쪽 계곡이 빗점골이라는 깊은 계곡이다. 6. 25를 전후하여 지리산이 빨찌산의 아지트가 되어 상당기간 국군의 대대적인 공비토별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이 계곡 아래 의신마을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빨찌산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이 빗점골로 도주하였다가 이 곳에서 최후를 맞은 곳이라 한다. |
◆ 형제봉(兄弟峰, 1433m) |
삼각고지에서 다음에 오를 봉우리가 형제봉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형제봉'이란 이름은 이 산에 있는 '형제바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형제바위를 찾는데 잔뜩 신경을 썼다. 어쩌다 그냥 지나치기라도 하면 사진을 찍기 위하여 간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형제봉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그럴 듯한 바위가 자꾸 나타난다. 카메라 앵글을 잡기도 쉽지 않아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네 개나 찍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필림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정작 형제바위는 형제봉 정상을 남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려 할 때 왼쪽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제바위는 형제봉의 동편 9부 정도에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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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서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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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동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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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바위 |
형제바위는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두 형제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높이 20m가 넘는 큰 입석바위인데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있다. 옛 날 두 형제가 성불수도 하려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기에 온 정성을 드리는데 심술궂은 지리산녀(智異山女)가 끈질기게 유혹하면서 방해하였다. 두 형제는 그녀의 유혹으로부터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의지하며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너무 긴장했던지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 형상의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형제바위 옆 조금 아래 관통 동굴이 있는데 이것 또한 연하굴(煙霞屈)이라 한다니 굴의 이름에 관한 자세한 유래는 모르겠으나 아마 연하천(煙霞泉)처럼 연하반(煙霞伴) 산악회가 처음 발견하여 그들의 산악회 이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 벽소령(碧宵嶺) |
형제봉을 지나면서 간간히 벽소령 산장이 보이기 때문에 마음은 느긋해진다. 그러나 길은 지금까지 온 길 중에서 가장 거칠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등산로에 큼직큼직한 돌들이 그냥 뒹굴고 있고, 로푸를 잡고 온갖 용을 써야만 오를 큰 바위도 여러 군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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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형제바위에서 바라 본 벽소령산장 (왼쪽이 꽃대봉, 오른쪽 먼 산이 덕평봉) |
벽소령 산장에 도착 한 것이 오후 4시반이다. 성삼재 걷기 시작한 것이 오전 일곱시 40분이니까 거의 아홉시간을 걸은 셈이다. 급할 것이 없고, 좋은 경치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으니 원래 땀을 많이 흘리는 나지만 옷이 별로 젖지 않았다. 벽소령산장에서 자기로 하고 예약도 미리 해 둔 터이니 빨리 와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산장에 도착하자 예약자 명단에 등록을 하고 저녁밥을 지어먹고 5시에 방과 침상 배정을 받으면서(숙박료 1인당 5,000원), 모포 넉 장을 대여 받아(1장에 1,000원) 잘 자리를 펴놓은 다음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달을 보기 위해서다. '벽소령(碧宵嶺) 명월(明月)'이 지리산 10경의 제5경에 올라 있는데 오늘 따라 음력 7월 보름을 하루 지난날이고, 날씨도 쾌청하니 달 구경 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인 것 같다. 지리산 어디에나 달이 뜨지 않은 곳이 없을 터인데 왜 하필 벽소령의 달이 지리산 10경에 드는가? 이 곳이라고 달이 두 개 뜨는 것도 아닐 것이고, 더 크지도 않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나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태고의 고요함 속에 덕평봉 옆구리로 떠 오른 달은 어느 곳에서 보는 달보다 높고 푸르다. 왼쪽 영신봉에서 삼신봉에 이르는 낙남정맥이 동쪽 울타리가 되고, 오른쪽 빗점골 저편으로 전남과 경남의 지경을 이루는 명선봉-토끼봉-삼도봉-불무장등-황장산으로 흘러내린 능선이 또한 서쪽 울타리가 되며, 명선봉-형제봉-덕평봉을 연하는 지리산 주능선이 북쪽을 막아주니 동, 서, 북 삼면에 울타리가 쳐지고 남쪽만 트여 있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푹 꺼져 내려갔기 때문에 대성리 운수리 등 가까운 마을의 불빛은 보이질 않고, 먼 화개장터는 황장산이 가로막아 결국 이곳에서는 산장의 전기불 외에는 불빛을 구경할 수가 없다. 산장도, 전깃불도 없던 때는 그야말로 암흑 속에 하늘에 달 그것 만이 빛을 낸다. 그러니까 벽소령 중천에 떠 있는 보름달은 세상 그 무엇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고고하게 떠서 교교한 달빛을 발하니 그 빛이 희다 못해 푸른 것이다. 산도 푸르고 달빛도 푸르고 깊은 골짜기도 푸르니 자연히 밤도 푸르러 이곳이 곧 벽소(碧宵: '푸른 밤'이라는 뜻)의 고개(嶺)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저번 아산회 특별산행으로 세석산장에서 1박을 할 때 보니 그곳에서는 저 멀리 하동과 섬진강을 연한 마을의 불빛이 많이 보였고, 미영이와 우리 부부가 장터목산장에서 잘 때 보니까 그곳은 남쪽에 하동, 화개장터, 구례까지, 그리고 북쪽은 마천, 산내, 인월등지의 불빛들이 도시를 방불케 하였던 것이 생각난다. 그래서 이 곳 벽소령 뜬 달은 깊은 계곡 때문에 더 높아 보이기도 하고, 그 어느 불빛에도 방해받지 않고 중천에 고고히 그리고 유아독존으로 떠 있어 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가 즐거운 일이니 지리산 10경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선택이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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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 명월 |
그러나 벽소령 명월이 지리산 10경에 드는 대신 이곳 일출은 볼품이 없다. 꽃대봉과 덕평봉 사이로 떠오르는데 워낙 산이 가까우니까 먼동도 노을도 없고 해가 산등성이에 오르자마자 눈부신 광체를 발하니 어디 일출이라 감탄할 여가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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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대봉 일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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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산장에서 아침 서쪽 조망 (앞계곡이 삼정마을, 멀리 보이는 저지대가 섬진강과 화개장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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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벽소령에서 바라 본 서쪽 조망 (앞산 안부가 범왕고개, 뒤 안부가 당재, 당재 왼쪽이 황장산, 하늘금 왼쪽이 광양의 백운산) |
벽소령 산장에서 동쪽 덕평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주능선 남쪽 사면 9부 정도에 약 2Km를 수평으로 나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그 저 지리산 종주 등산로일 뿐이다. 그러나 군인이라는 전직에서 익힌 관찰력을 발휘하면 이 길이 예사 등산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공비토벌 당시 군인들이 닦은 도로인데 세월이 무상하여 등산객이 다닌 길만 남고 양쪽에는 관목들이 우거져 있어 도로였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산 쪽의 바위를 깨어내고, 계곡 쪽에 축대를 쌓은 부문이 군데군데 있다. 그러니까 벽소령 공비토벌을 위한 작전도로는 북쪽 심정마을에서 구불거리며 벽소령을 향해 오르다가 막바지에 와서 너무 급경사이기 때문에 벽소령으로 바로 넘지 못하고 동쪽으로 2Km를 나아가서 꽃대봉 동쪽 안부로 지리산 주능선을 넘은 다음 주능선 남쪽 사면을 따라 벽소령까지 다시 서쪽으로 2Km를 돌아와서 거기서부터 구불거리며 의신 마을로 내려 간 것이다. 공사장비도 별로 신통치 않았을 당시 이 공사를 맡았던 지휘관과 군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러니까 이 도로 때문에 벽소령은 두 개가 된 것이다, 서쪽의 원래부터 사람이 넘어 다니던 벽소령은 '큰벽소령'또는 '구벽소령'이라 하고, 2Km 동쪽의 작전도로가 넘는 고개는 '작은벽소령' 또는 '신벽소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구벽소령 남쪽 50m 지점에 '벽소천(碧宵泉)'이 있다. 이 곳 사람들이 부르는 원명으로는'뱁실샘'이다. 이 샘 때문에 이곳 구벽소령에다 산장을 지은 것이다. 산장의 수용능력은 250명으로 세석산장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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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산장 |
이 아름답고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성스러운 지리산이 6. 25를 전후하여 상당기간 이념갈등의 현장이 되었었다. 소위 빨찌산이란 공비들이 이 산을 그들의 아지트로 삼았기 때문이다. 6. 25를 앞두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훈련된 핵심요원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여러 곳에서 선동, 폭동 등 공산주의 그들 고유의 수법을 총 동원하여 아직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남한 사회를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1948. 10. 19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사건을 일으켰는데 한 때는 그 위세가 대단하여 전남지역을 담당하는 군대를 총 동원하여도 진압이 불가하여 대구에 있던 부대까지 지원을 나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 여순반란사건의 주동자들은 정세가 불리해 지자 이 지리산으로 진입하였고, 여순반란사건 진압에 출동했던 대구 부대도 돌아가는 길에 일부 좌익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동료들을 많이 살상한 다음 지리산으로 잠입하였다. 6. 25전쟁 발발 이후에는 유엔군의 반격으로 경부가도가 잘리자 퇴로가 차단 된 패잔병들이 민주지사, 덕유산 등과 함께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지리산은 전선 없는 대 격전장이 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단풍 때문에 지리산 10경의 하나에 든 피아골을 비롯하여 빗점골, 의신 등이 그들 아지트의 중심이고 이 산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 마을은 물론 도시까지도 맘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며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비극이 연출되었던 곳이다. 신벽소령 서쪽 봉우리는 지도상에는 △1426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꽃대봉'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 일대를 점거한 빨찌산 제2병단 병사들이 이 봉우리를 뒤 덮은 야생화 꽃밭이 너무 아름다워 이 봉우리를 꽃대봉이라 부른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이념에 미쳐 있던 그들에게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벽소령으로 작전도로가 개설된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지리산 주능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우리가 지나온 명선봉-삼각고지-형제봉-꽃대봉에 이르는 능선에서 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져 쌍방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곳을 '피의능선'이라고 부른다. 벽소령 산장에는 공비토벌작전 유적지를 표시하는 안내도를 그린 입간판을 세워 놓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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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산장의 공비토벌작전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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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능선(명선봉-꽃대봉) |
서동종주(西東縱走) 3 : 벽소령 - 천왕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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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서 서로 바라 본 지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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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천왕봉 지도 |
◆ 덕평봉(德坪峰, 1521.9m) |
신벽소령에서 작전도로와 결별하고 오름 길에 들어서면 덕평봉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산 중턱을 오르자 등산로는 정상을 피해 남쪽 비탈길로 돌아서 간다. 덕평봉 정남에 이르렀을 때 약 40-50평 정도 되는 공터가 있고, 야트막한 축대 아래 꽂힌 PVC 파이프에서 맑은 샘물이 물줄기를 드리운다. 이정표에 '선비샘'이라 쓰여 있어 바로 여기가 선비샘인 것을 알려 준다. 옛 날 이산 아래 있는 상덕평 마을에 착하고 점잖은 한 선비가 살았는데 워낙 가난해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몹시 천대를 받다가 '죽어서는 천대를 받지 않고, 사람대접을 받는 것이 소원' 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효자인 그 아들이 어떡하면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줄까 하고 며칠을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이 샘 위쪽에 부친의 묘를 썼다고 한다. 지나던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떠먹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니 결국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준 셈이다. 지금은 무덤도 없어지고 공터가 생겨 등산객이 쉬어 가는 쉼터가 되었다. 샘도 파이프를 박아서 무릎 꿇고 머리를 숙이며 물을 떨 필요가 없이 서서 흐르는 물줄기에 물병이나 물통을 대고 받아서 마시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이름은 '선비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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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과 이정표 |
◆ 칠선봉(七仙峰, 1576m) |
덕평봉을 지나면 좀 멀지만 덩치가 큰 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을 분기시키는 영신봉이다. 그러나 덕평봉에서 영신봉에 이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암봉을 이리 넘고 저리 넘으면서 때로는 먼 경치로 온 길을 되돌아 보기도 하고, 영신봉에서 청학동 뒷산 삼신봉까지 흘러내린 낙남정맥도 전망하고, 띄엄띄엄 우뚝우뚝 솟은 암봉을 올려다보면서 가게된다. 이 곳에 솟아 있는 암봉들을 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일곱 개라 한다. 이 바위들이 마치 아름다운 일곱 선녀들이 노니는 듯하다 하여 이 산 봉들을 '칠선봉(七仙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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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선봉 |
◆ 영신봉(迎新峰, 1651.9m) |
칠선봉의 봉우리들이 끝나고 등산로는 짙은 숲에 들어서 영신봉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남쪽으로 우회하더니 정상에서 약200m남쪽의 낙남정맥 마루금에 올라서게 된다. 이 곳부터 동쪽 사면으로는 키 큰 나무는 없고, 철쭉과 구상나무 군락을 이룬다. 여기서부터 세석평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능선 모퉁이를 돌아서니 산뜻한 건물의 세석산장이 보인다. 꼭 1주일 전에 10명의 아산회 회원이 1박을 한 곳이다. 취사장에서 집사람이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카메라를 들고 온 길을 되돌아와 낙남정맥 마루금에서 영신봉 정상으로 올라갔다. 낙남정맥의 시발점 영신봉 정상을 직접 밟아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길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희미하다. 그러나 큰키나무가 없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정상에는 역시 큰 나무는 없고 철쭉들이 큼직큼직한 바위들 사이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온 길 서쪽을 바라보는 전망이 감회롭고, 일주일전에 아산회 회원들이 따라간 남쪽의 낙남정맥과 그 끝자락의 내, 외삼신봉을 바라보는 전망 또한 감회가 깊다. 뿐인가 동쪽으로 돌아서서 산장을 포함한 세석평전을 내려다보는 풍경과 건너편 촛농 흘러내린 듯한 촛대봉을 바라보고 그 왼쪽으로 이번 산행의 최종 목표인 천왕봉을 바라보는 경관은 내가 혼자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집사람도 같이 올걸. 그래도 이 곳에 참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대간은 좀 더 가서 남한 제2봉 천왕봉에서 끝맺음을 하면서 끝나기 직전 이 곳 영신봉에서 낙남정맥(洛南正脈)을 분기시켜 낙동강 지류 남강의 남쪽 산들로 맥을 이루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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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을 분기시키는 영신봉 정상 |
◆ 세석평전(細石平田) |
세석평전을 '잔돌평전', '세석고원'이라고도 부른다. 혹자는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며 '고원(高原)'이라 해야 맞다는 주장을 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맞는 말 같지 않다. 언제 지어졌는 지 연대는 미상이지만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불러 온 '새타령' 이라는 가사에 꿩을 묘사한 이런 대목이 있다. "오색채의(五色彩衣)를 떨쳐입고 아홉 아들 열두 딸을 좌우(左右)로 거느리고 상평전(上平田) 하평전(下平田)으로 아조 펄펄 날아든다. 장끼 까토리 울음 운다 꺽꺽 꾸루룩 울음 운다." 남한에서는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 둘레 12Km, 넓이 약 30만평에 바닥에 잔돌이 깔려 있는 위에 수십만 그루의 철쭉이 대 군락을 이루고 드문드문 구상나무가 있어서 오월 말에서 유월 초가 되어 철쭉꽃이 만발하면 은은한 철쭉꽃과 주변경관이 조화되어 과히 장관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세석평전 철쭉'이 지리산 10경의 제6경이다. 철쭉은 한자로 척촉(足鄭 足蜀)이라 하는데 '척촉'이 '철쭉'의 어원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는 '발길을 머뭇거리게 한다'는 뜻이다. 산길을 가다가 철쭉꽃을 만나 그 모습이 은은하고 아름다워서 갈 길을 못 가고 머뭇거리며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서 있는 광경을 연상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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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평전 철쭉 단풍(1997년 가을) |
'97년인가 부부가 세석평전 철쭉을 보겠다고 백무동-한신계곡의 급경사 길을 천신만고로 올랐는데 철이 지나 꽃은 못보고 이곳 풍경만 보고 내려간 적이 있다. 세석평전은 철쭉꽃도 꽃이려니와 평전 그 자체가 그림이다. 영신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나 촛대봉쪽에서 바라보는 정경이나 간에 완만한 경사면에 철쭉과 구상나무가 펼치는 조화로운 색채, 그기에 산뜻한 산장까지 더하여 한 폭의 그림이라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이 없다. 철쭉꽃이 한창일 때는 정말 꿈같은 거대한 화원이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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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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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
세석산장은 '96년에 건립된 것으로 2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 최대의 대피소이며 세석천(細石泉)이 있고, 이 곳을 중심으로 동서로 지리산 종주길이 있고, 북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한신계곡을 통해 백무동으로 내려가며, 남쪽으로 200m쯤 내려가면 산청 시천면 내대리 거림마을로 가는 동쪽 길과 서쪽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마루금으로 올라서는 길이 갈린다. 또 낙남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화개면 대성리로 내려가는 서쪽 사면길이 갈리고, 마투금을 계속 따라가면 1주일 전에 아산회원 여덟명이 걸었던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 또는 불일폭포와 쌍계사로도 갈 수 있어서 세석산장은 등산로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늘 사람이 붐비는 곳이니까 산장도 크게 지어해야 했을 것이다. 1972년부터 진주 지리산산악회 주최로 '세석철쭉제'를 열어 오다가 혼잡과 철쭉 훼손의 우려 때문에 지금은 폐지되었다. 조선조 세종-성종간에 영남학파의 거두로 알려진 점필제(占畢齊)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마흔 살의 나이로 그의 제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3년(1472년) 음력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 동안 지리산을 올라 두루 둘러보고 자세하게 쓴 지리산등산기행문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는 세석평전의 '세석(細石: 잔돌)'에 관한 내용은 보이는데 철쭉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에 큰 산불로 일대의 무성했던 나무들이 전소하고 몇 백년을 거치면서 자생력이 강한 철쭉이 이 평전을 독점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 탁영 김일손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스승인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 사초(史草)에 넣었다가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입게 되며, 이미 죽은 김종직도 부관참시(副棺斬屍) 당하는 화를 입는다. |
◆ 촛대봉(1703.7m) |
우리나라 전국의 산에는 수 없이 많은 촛대봉이 있다. 우선 지리산에만 해도 세 개나 있다.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세석평전의 동쪽산과 천왕봉을 지나 중봉, 하봉에 이르러 북쪽 추성동으로 향하는 능선길로 조금 내려가면 또 하나의 촛대봉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이미 지나온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불무장등, 통꼭봉, 황장산을 지나 좀 더 내려가면 또 촛대봉이 있다. 그런데 '촛대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면 촛불을 꽂는 촛대를 연상케 하는 위로 길쭉하게 치솟은 입석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 부부가 오르고 있는 촛대봉은 이와는 전혀 다른 뜻에서 촛대봉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해발 17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지만 촛대는커녕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과 사면이 완만하게 흘러내리기 때문에 산 모양만 보면 오히려 '삿갓봉'으로 부를 법하다. 그런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들이 하나같이 모나지 않고 두리뭉실하여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 하여 촛대봉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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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과 정상의 촛농바위(오른쪽) |
지리산에서 일출(日出)! 하면 당연히 지리산 제1경인 천왕봉 일출이겠지만 이 곳 촛대봉 일출도 꿩 대신 닭으로 꾀 호평을 받는다. 세석산장에서 불과 15분이면 오를 수 있고,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천왕봉 음영을 왼 편에 걸어 놓고 그 오른쪽 하늘과 땅을 구별하기 힘든 아득히 먼 지평선으로 구름을 오색으로 물 드리며 떠오르는 크고 붉은 태양은 정말 볼만하고 운치가 있다. 너무 단조롭다고 느껴지는 천왕봉 일출에 비하여 운치가 더 있다는 평도 있다. 그기에 촛농처럼 제 멋대로 굳어버린 촛대봉 바위들과 어울려 한층 멋을 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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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 일출 |
또 촛대봉은 일출뿐만 아니라 천왕봉의 위용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 볼 수 있고, 뒤 돌아 온 길, 노고단, 반야봉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산봉우리들도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식별할 수 있으며, 북쪽의 한신계곡, 남쪽의 도장골을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전망을 제공해 준다. |
◆ 삼신봉(三神峰) |
촛대봉에서 내림길로 내려서는가 싶으면 이내 약간의 완만한 오름 길이 있고, 바위들이 쭈삣쭈삣 솟은 봉우리가 의아스럽게도 '삼신봉'이다. 지도상에 산 높이가 표기되지 않았지만 등고선으로 보아 1600m가 조금 넘는 것 같다. 물론 등산길은 바위 정상을 피해 서쪽으로 우회한다. 낙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지리산 남쪽 전경을 한눈에 보는 청학동 뒤 삼신산, 아산회 특별산행 때 이곳에서 지리산 파노라마 사진을 찍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번 종주산행을 하게 된 그 삼신봉, 특히 외삼신봉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三神)으로 모시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도 있고, 그 남쪽 청 학동에는 이 삼신을 모시는 삼성궁(三聖宮)도 있어서 산 이름을 '삼신산'이라 한 것은 이치에 맞지만 이곳 삼신봉 이름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마 정상에 삼신을 상징하는 세 개의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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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봉과 반생반사의 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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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봉의 악어바위(아산회 명명) |
◆ 연하봉(煙霞峰, 1667m) |
삼신봉에서 북쪽으로 약간 오름 길을 오르다 보면 산 봉인지 분간하기 힘든 곳에 암봉이 솟아 있는데 연하봉이다. 이 '연하봉'이란 이름 또한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전신인 연하반(煙霞伴)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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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봉정상에 서서 온 길 뒤돌아 본다 |
바위에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이끼가 덮어있고,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의 평전이 펼쳐 저 그 끝이 일출봉에 이른다. 큰 나무가 적어서인지 기화요초(琪花瑤草) 야생화들이 만발하여 선경(仙境)을 이룬다. 그래서 이곳 '연하선경(煙霞仙境)'이 지리산 10경의 제8경이다. 때가 초가을이라 구절초, 쑥부쟁이, 산오이풀, 투구꽃, 그 외에도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활짝 피어 선경을 꾸미고 있다. |
◆ 일출봉(日出峰) |
연하봉 선경이 끝나는 동쪽 끝 자락을 사람들이 지도상에는 없지만 일출봉이라 부르는데 연하봉 쪽에서 보면 산 봉우리라기에는 좀 뭣한 구능이다. 그러나 장터목쪽에서 보면 연하봉은 보이지 않고 이 부분이 산 봉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에 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일렬로 성벽처럼 서 있어 성릉(城稜)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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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에서 올려다 본 일출봉 성릉 |
이 곳을 '일출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촛대봉 일출과 같은 사연에서다. 천왕봉 일출을 보겠다는 등산객은 모두 장터목산장에서 숙박하게 마련이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초가을인 지금 천왕봉 일출은 아침 6시니 4시반에는 출발해야 먼저 가서 좋은 자리 잡고 앉아 기다리게 된다. 높은 산 깜깜한 밤길을 렌튼에 의지하여 제석봉과 톱날 능선을 지나 천왕봉까지 가자면 족히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천왕봉에 간다고 해서 천왕봉 일출을 본다는 보장도 없다. 오죽하면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삼대 덕을 쌓아야 한다'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래서 새벽에 화장실에 가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날씨가 좀 시원치 않다 싶으면 천왕봉으로 향하지 않고, 느긋하게 일으나 반대쪽인 이 곳 일출봉으로 오른다. 20분이면 충분하다. 이곳에서 운이 좋으면 일출을 보고, 아침 먹고 천천히 천왕봉을 오른다. 천왕봉에 오르는 보람이 어디 반드시 일출을 보는 것뿐인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일망무제(一望無際) 사방을 둘러보는 전망은 일출에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출봉에서의 일출은 촛대봉 일출과 비슷하지만 촛대봉에서는 촛농 같은 바위들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대신 이곳 일출봉에서는 자연성릉을 이룬 기암과 고사목 그리고 기화요초 만발한 연하의 선경이 그 조연을 담당한다. |
◆ 장터목(1750m) |
일출봉에서 장터목은 코앞으로 가깝게 보인다. 옛 날 산청의 시천사람들과 함양의 마천사람들이 닷새에 한번씩 만나 물물교환을하는 장터였기 때문에 '장터목'이란 이름을 얻었다 하니 해발 1600m가 넘는 이곳에 장이 섰다니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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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산장 |
장터목 역시 종주길이 동서로 지나는가 하면 북쪽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하동바위길과 백무동계곡길 두 길이 있고, 남쪽으로 유암폭포-칼바위를 지나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오거리이면서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마지막 캠프 역할을 하기 때문에 늘 사람들이 붐빈다. 그래서 '71년에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지리산산장'이 이곳에 세워졌고, '86년에 재건축하면서 '장터목산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지금의 산장은 '97년에 다시 건축하여 140명을 수용할 수 있다. '99년 7월 24일 우리부부가 미영이를 데리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올랐을 때 이곳에서 1박 한 적이 있는데 반야봉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배경으로 두 모녀를 찍은 '장터목 낙조' 사진은 마치 만종(晩鐘)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수작이라 8×10으로 확대하여 지금도 현관에 걸어 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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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 낙조 |
천왕봉 일출처럼 반야봉 낙조도 좀 단조로울 것이라 생각이 드니 장터목 낙조가 오히려 더 운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장터목 남쪽 20m쯤 아래 있는 샘을 '산희(山姬)샘' 이라 하는데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처음 발견하였을 때 동행했던 이기호 열성 회원의 어린 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한다. |
◆ 제석봉(帝釋峰, 1806m) |
아침 4시 반에 배낭과 침구를 챙겨 그 자리에 두고 랜턴과 카메라만 들고나섰다. 제석봉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주변이 평전인데 다가 목책을 쳐서 위험하거나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다. 제석봉에는 옛 날에 제석천(帝釋天)에 제사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던 곳이다. 제석천은 민간신앙의 수호신으로 십이천(十二天)의 하나이며,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와 도리천( 利天)의 희견성(喜見城)에 살면서 인간의 선악(善惡)과 사정(邪正)을 관장하고, 저승의 아수라(阿修羅)를 통제한다고 한다. |
*십이천(十二天): 범천(梵天), 지천(地天), 월천(月天), 화천(火天), 수천(水天), 풍천(風天), 염마천(閻魔天), 나찰천(羅刹天), 다문천(多聞天), 제석천(帝釋天), 도리천( 利天), 대자재천(大自在天) *제석신(帝釋神): 민간신앙에서 나온 가신제(家神祭) 대상의 하나로 일명 세존(世尊)이라고도 한다. 무당이 숭봉(崇奉)하는 신의 하나로 집안사람들의 수명을 맡아보며 곡물, 의류와 한 집안의 무사태평을 맡아본다. 신체(神體)는 작은 단지에 쌀 또는 조를 넣어 백지로 덮고 또 뚜껑을 덮어서 다락 위나 부엌 한 귀퉁이에 안치하고 헝겊 조각을 잡아매어 놓는다.(부루단지) 이 성스러운 곳에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저지른 상처의 흔적, 제석봉 횡사목이 인간을 비웃고 서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간에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으로 찬양 받는 태백산이나 소백산의 주목 고사목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제석봉에 장승들처럼 서 있는 죽은 나무들도 그 수명을 다한 고사목이라면 이 역시 아름다운 정경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것은 고사목이 아니라 횡사목(橫死木)이기 때문에 아름답기는커녕 그 내력을 알고 보면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제석봉 일대에는 전나무와 구상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자유당정권 말기에 산청 출신의 농림부장관의 삼촌이라는 자가 조카의 힘을 믿고 성스러운 제석단에 다 제재소를 차려 놓고 질 좋은 나무만 골라 도벌하여 하산하기 쉽도록 제재하였는데 이것이 국회에서 말썽이 나 조사단이 구성되자 증거인멸(證據湮滅)을 목적으로 고의로 불을 질러 주변의 수 백년 생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하여 오십 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서 서 있는 것이다. 공원관리소측은 이러한 내력의 간단히 요지만 적은 입간판을 세워 놓고, 등산로 양측에 목책을 쳐 출입을 제한하면서 어린 구상나무 묘목을 심어서 복원을 꾀하고 있지만 어느 세월에? 나무가 없으니 초본성 식물이 번창하여 이 곳에도 연하선경처럼 산오이풀, 구절초, 쑥부쟁이, 투구꽃 등 가을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어 좀 위안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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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봉 횡사목과 구상나무 묘목과 야생화 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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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사목 내력 공시 입간판 |
◆ 톱날능선 |
제석봉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천왕봉 오름 길이 시작되는 통천문까지 약 1Km 남짓한 거리에 여러 개의 날카로운 암봉이 솟아 있고, 양측은 급경사 낭떠러지라 등산길은 이 암봉들을 이리 저리 피하면서 어렵게 지나간다. 사람들은 이 곳을 톱날처럼 날카롭게 톱니가 솟아있다 하여 '톱날능선'이라 부른다. 가장 잘생긴 암봉 앞에는 반갑게도 백두산 해발 2000미터의 수목한계선에 빽빽이 서 있는 사스레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대간의 끝까지 종주하며 흘러왔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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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날능선 암봉 |
톱날능선의 북쪽이 지리산 10경의 제9경 '칠선 계곡(七仙溪谷)'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 속에 초록빛 물살(綠水)이 잠시 심연(沼)에 머물었다가는 곧 하얗고 반들거리는 암반위로 굉음과 물보라와 포말을 토하며 떨어지기(瀑布)를 연속으로 반복한다. 위로부터 이름 있는 것만 해도 삼층폭포, 마폭포, 대륙폭포, 칠선폭포, 선녀탕, 용소 등이 그것들이다. 칠선계곡은 지리산 최고의 계곡미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반달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입통제지역이라는 표말이 꽂혔으니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고 그저 이 톱날능선에서 수박 겉 핥기로 내려다 볼 뿐이다. 그래도 칠선계곡은 내려다보는 경관만으로도 속이 후련하도록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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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날능선에서 내려다 본 칠선계곡 |
톱날능선이 끝나고 천왕봉을 마지막 오르기 시작하는 곳에 양쪽은천길 벼랑이고 사람 하나 지나 갈 수 있는 바위틈에 위를 또 바위가 덮은 문을 '통천문(通天門)'이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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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천문 |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를 수 없다는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지금은 교행할 수 있도록 넓게 갈지(之)자로 철계단을 설치하여 여기까지 와서 오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 천왕봉(天王峰, 1915.4m) |
천왕봉은 백두산 장군봉을 출발하여 장장 1,572Km(약 4천리)를 달려 온 백두대간의 종착점이다. 동시에 지리산 종주 산행의 목표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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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1915m, 지리산 천왕봉 표석 앞면(왼쪽)과 뒤면(오른쪽)과 일출없는 일조 동쪽 배경 사진 |
천왕봉의 주소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이고, 동시에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300번지이기도 하다.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제2봉이지만 한라산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화산 분출로 생겨난 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맥으로 연결된 산으로는 남한 제1봉이다. 정상에는 밥주걱을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의 어깨 높이의 자연석 표석이 있는데 동쪽의 전면에는 세로로 '智異山天王峰'이라 한자로 표기되고 그 밑에 1915m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서쪽 후면에는 '韓國人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적혀 있는데 자세히 보면 '韓國' 두자가 다시 새긴 것이 표가 난다. 처음에는 그 자리에 '慶尙'이라 썼던 것인데 그 후에 고쳤다는 것이다. 천왕봉 정상 서편 암괴에 언제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하늘을 받히는 기둥'이라는 뜻으로 '天柱'(천주)라고 음각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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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 |
옛날에는 천왕봉에 신비스런 사연이 많은 '성모(聖母)' 여신상(女神像)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때 경주산(慶州産) 옥석으로 다듬어진 이 여신상은 높이가1.2m이고, 너비가 50cm로 천 여년을 지리산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천왕봉에 모셔져 있었는데 몸에는 수많은 상처를 입고 지금은 하산하여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라는 조그마한 암자에 옮겨져 머물고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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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모셔진 지리산성모상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저 <국토와 지명> 중에서 |
천왕봉 여신상이 겪은 수난은 고려 말 서기 13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부지방 일대에 노략질을 나왔던 왜구들이 황산(지금의 운봉) 싸움에서 이성계에게 대패하고 급한 나머지 지리산을 넘어 도망가면서 그 분풀이로 천왕봉 여신상을 두 조각 내었는데 그래도 여신상은 상처를 입은 채로 천왕봉에 서 있었다. 왜정 때 일제가 여신상을 모신 사당을 철거하고 여신상을 산 아래로 굴러버렸다. 그 후 산청에 사는 어느 처녀가 여신상을 다시 산꼭대기로 올려놓았는데 해방되던 해에 누군가에게 보쌈을 당해 행방불명 되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천왕봉으로 돌아왔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천왕봉 여신산은 사당 안에 모셔져 많은 기도객들의 염원을 들어주고 있었는데 '72년 봄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한 모 교인들이 천왕봉 여신상을 부셔서 없애버려 또 행방불명이 되었다. '86년 1월 천왕사 혜범스님이 천왕봉 아래 골짜기에서 여신상의 머리부분과 몸통을 발견하여 정성스럽게 봉합하여 지금은 천왕봉 남쪽 자락 천왕사에 모셔 놓고 있지만 다시 천왕봉으로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 또 어떻게 수난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리산 천왕봉 성모 여신상이 천왕봉으로 돌아와 안전하게 안치되어 지리산을 찾는 많은 산악인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으련만--- '천왕봉 일출(日出)' 지리산 10경의 제1경이다. 그러나 이곳의 기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삼대에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유전되어 올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비 성수기 평일에도 천왕봉 일출을 보겠다고 올라와 앉아 기다리는 사람이 족히 사 오십 명은 되는데 이 중 한 사람이라도 삼대에 덕을 쌓지 못하면 일출을 볼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결국 일출을 못 본다는 뜻이다. 나 또한 이번에 세 번째 천왕봉을 올라왔다. 내 욕심으로는 이번에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휘림애미의 무사 출산과 득손자를 빌고 싶었는데 못보고 서운한 마음과 함께 '더 덕을 쌓아야겠구나'하는 반성의 마음을 가지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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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일출(왼쪽)과 내가 본 천왕봉 일출(오른쪽) |
일출을 못 본 대신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조망은 그저 그만이다. 정동으로는 별 특별한 산은 없고 희미하게 진주 진양호가 식별되고, 동북으로는 희뿌연 안개에 덮여 있는 합천호를 가운데 두고 서쪽의 황매산, 북쪽의 오도산이 있고 그 오른쪽 구름위로 불꽃 형상의 화성(火星) 가야산이 하늘에 살짝 얼굴을 내밀어 신기루처럼 나타나 있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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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동북쪽 전망 |
남쪽으로는 큰 산이 없으니 산을 식별하기는 꾀 힘들지만 남해의 금산인 듯한 산이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식별된다. 그리고 하동의 섬진강 하구 쪽으로 여천만 바다가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광양의 백운산이 남서쪽 하늘금을 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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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남쪽 전망 |
북쪽은 덕유산 주능선 30Km가 겨우 엄지손가락 길이만큼으로 보인다. 가까운 쪽에 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이 도토리 키 재듯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을까! 그 뒤로 삿갓봉, 무령산 그리고 최고봉 향적봉, 오른쪽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지봉 그리고 덕유산괴의 시작덕유삼봉산이 뚜렷이 보인다. 그 오른쪽에 내고향 사드레에서 늘 바라보던 대덕산도 보인다. 그뿐인가 나를 더욱 흥분하게 하는 것은 내 고향의 산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이 뚜렸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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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북쪽 전망 |
불과 얼마 전에 우리부부가 삼도봉으로 해서 석기봉에 올랐고, 또 내가 국민학교 동창회에 간 사이에 집사람은 시화하고 삼도봉-석기봉- 민주지산까지 갔다 왔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는가. 그 뿐인가 1년에 한 번 씩 모이는 우리 6남매 모임을 올해는 고향집으로 정해 함께 삼도봉을 오르고 복숭아를 수확하지 않았던가. 지난 두어 달 사이에 다섯 번이나 오른 그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을 이곳 천왕봉에서도 볼 수 있다니 일출을 보지 못한 것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 같다. 북쪽으로 내 고향을 바라본다는 것 때문에 좀 흥분했지만 천왕봉에서의 조망은 아무래도 서쪽을 바라보는 것이 하이라이트다. 반야봉과 그 옆 중봉이 마치 발가벗고 엎드린 여인의 궁둥짝 같은 모양으로 제일 먼저 눈에 띄고, 왼 쪽에 엊그제 올라 돌탑 옆에서 사진을 찍던 노고단과 오른쪽에 만복대가 똑 같은 모양의 삿갓을 엎어놓은 듯한 삼각형이 반야봉을 가운데로 하여 대칭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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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서쪽 전망 |
반야봉에서 이쪽으로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삼각고지, 형제봉,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 제석봉, 톱날능선이 한눈에 다 보이고, 산장 건물은 직접 보이지 않지만 벽소령, 세석, 장터목이 어디쯤인지 쉽게 판별할 수도 있다. 저 가물가물한 길을 우리가 걸어서 온 것이다. 나야 산골출신에 사관생도 때 축구를 했고, 초급장교에서 대대장시절까지 내 노라 하는 강원도 산들을 다 누비며 살아왔으니 이쯤으로 크게 장할 것도 없지만 집사람이야 정말 장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 전망에서 또 하나 흥분시키는 것이 있다. 동북쪽에 가야산이 마치 하늘에 신기루처럼 떠 있듯이 서쪽 노고단 위로 하늘 가운데 희미한 산 그리매가 보인다. 방향으로 보나 위도 상으로 보나 광주 무등산이 틀림없다. 거기가 어딘데 여기서 무등산이 보인단 말인가! 이곳 천왕봉의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 바로 그것이다. 지리산을 종주하면서 또 다른 반갑고 낯익은 두 주인들을 만났다. 다름 아닌 작년에 백두산 등정 때 만났던 귀한 나무들이다. 그 하나는 백두산 수목한계선에서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최전선을 지키는 보병처럼 군집해 있던 사스레나무가 여기 지리산 종주로 주변에서도 간혹 보였고, 톱날능선의 가장 잘 생긴 암봉 앞에도 암봉과 어울리게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또 하나는 키 큰 나무 속에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빨간 열매 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마가목이 여기서도 주렁주렁 새빨간 열매를 달고 있었다. 장터목산장으로 돌아와 천천히 아침을 해먹고 하동바위길을 따라 백무동에 내려오니 오전 11시쯤인데 백무동에서는 남원, 함양으로 가는 버스가 평균 30분마다 있고 동서울터미널까지가는 직행도 하루에 5회나 있다. 함양행 버스로 콘도에 도착하여 콘도 입구 사골 음식점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콘도 목욕탕에서 피로를 풀고 지리산을 뒤로하고 고향을 향했다. |
결 언 |
지리산 종주 산행을 언제나 해 보나? 하고 걱정만 하면서 해가 지나갈수록 나이를 더하니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초조감 마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갑작스레 계획하여 실행하고 보니 좀 싱거운 생각도 든다. 나도 그렇지만 집사람도 2박3일 백리를 넘어 걸었는데도 다리통에 알이 뱄거나 몸이 피로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상쾌하다며 바로 서울로 상경하지 않고 다시 시골로 가서 갓 심은 무 배추에 물도 주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였다. 나 역시 골프로 치면 18홀 도는 정도로 느껴졌다. 그것은 고도가 높기도 하고, 짙은 숲 속을 걸으니 그늘이 시원할 뿐만 아니라 습도가 적절하며 무엇 보다 공기가 맑고 군데군데 좋은 전망이 있으니 피로를 느낄 턱이 없는 것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어질고 착한 사람 산을 좋아 한다'는 뜻이지만 역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 어질고 착하고 어질게 된다'는 뜻도 된다. 산에서 만나거나 지나치는 사람, 어찌 하나같이 그렇게 상냥하고, 건강하고, 남자는 씩씩하고, 여자는 예쁘게 보일까!. 내가 이렇게 지리산종주산행을 극구 칭찬하는 것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며, 이렇게 장황하게 쓴 것은 동기생 여러분께서도 한번 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충동에서다. 동료들끼리 어울려 정신 없이 걷기 대회라도 하는 듯 체력단련을 하는 것보다는 부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여보! 내 방구 꼬시제?'하면서 오손도손 얘기도 하고, 길이 좀 험한 데는 끌어주고 밀어주며 남들이 봐도 '거 참 보기 좋습네다!'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산행을 권하고 싶다. 가다가 힘들면 중간 중간에 있는 산장에 들러 자고 가면 되는 것이다. 지리산 종주 한번 한 것 가지고 장황하게 쓴 것은 좀 자세하게 써서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지리산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루한 글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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