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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포자 정상기와 동국지도(오상학)

카프리2 2016. 10. 25. 17:32

 

농포자 정상기와 <동국지도>

오상학 /규장각 특별연구원

때는 바야흐로 1757년, 영조가 즉위한 지 33년이 되던 해였다. 궁중의 전적(典籍)을 관리하던 기관인 홍문관의 수찬(修撰) 홍양한은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정항령(정상기의 아들)의 집에 <동국지도>가 있는데, 신이 빌려다 보니 산천과 도로가 섬세하게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또 백리척(百里尺)으로 재어 보니 틀림없이 착착 맞았습니다.’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해 가져오게 하여 손수 펴 보고 칭찬하기를, ‘내 칠십의 나이에 백리척은 처음 보았다.’하고, 홍문관에 한 본을 모사(模寫)해 들이라고 명하였다.'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가 조정에 알려지게 되는 순간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위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 후기 현군이었던 영조마저 감탄해 버린 <동국지도>. 그러나 지금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그늘에 가려 우리의 뇌리에 희미하다. 김정호의 인생역정과 <대동여지도>에 얽힌 비장한 사연은 100여 년 앞서 존재했던 탁월한 지도제작자 정상기와 그의 역작 <동국지도>를 무색케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동국지도>가 조선 후기 지도제작에 미친 영향은 <대동여지도>를 능가할지 모른다. 어쩌면 <대동여지도>는 <동국지도>가 없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21세기를 앞둔 지금, 정상기와 그의 지도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굴절된 조선지도사를 바로잡는 과정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선조들의 국토에 대한 관심과 애착의 한 편린을 읽는 작업이기도 하다

정상기의 생애와 학문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상기는 1678년(숙종 4)에 출생하여 1752년(영조 28)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자는 여일(汝逸)이고 호는 농포자(農圃子)이다. 그의 9세조는 조선전기 유명한 학자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라고 하니 소위 뼈대있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탓에 가세(家勢)가 기울어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성장해서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고, 또한 몸이 병약하여 일찍 벼슬을 포기하고 가업을 계승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정상기의 부인은 여흥 이씨 함경도 도사(都事) 이만휴(李萬休)의 딸로서 남편보다 18년 앞서 세상을 떴다. 이만휴의 부친인 현감 이식(李湜)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조부이기 때문에 정상기와 이익은 인척간이 되어 교분을 맺게 된다. 이익은 근기(近畿) 남인 계열의 대학자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을 강조하는 실학파의 태두인 점을 감안할 때 정상기의 학문도 이익과의 교류를 통해 성숙될 수 있었음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이익은 정상기뿐만 아니라 정상기 부친의 묘지명(墓地銘)까지 써 줄 정도로 인간적으로도 교분이 두터웠다.

정상기는 슬하에 희천(希天), 태령(泰齡), 항령(恒齡), 태령(台齡)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희천은 어려서 죽었고 태령도 3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항령(1710~1770)은 영조 11년(1735) 진사 장원을 한 후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정상기는 아들 항령으로 인해 말년에 중추부첨지(中樞府僉知)의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항령의 아들 원림(1731~1800)은 통정대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란 벼슬을 역임했는데, 정조 때 추천되어 『여지승람』(홈지기 붙임말 :『해동여지통재』의 오류로 보임) 편찬을 담당하였다. 원림(元霖)의 조카 수영(遂榮)은 어려서부터 시문과 서화에 뛰어나 많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들 항령, 원림, 수영의 세 후손은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수정, 교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드물게 대를 이어 지도제작에 전념했던 명가(名家)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정상기의 학문은 반드시 옛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많은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다방면으로 풍부한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중년 이후로는 두문불출 저술에만 몰두하여 『농포문답(農圃問答)』 『인자비감(人子備鑑)』 『심의설(深衣說)』 『도검편(韜鈐篇)』 『향거요람(鄕居要覽)』 『치군요람(治郡要覽)』 등의 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농포문답』을 제외하고는 현전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선비가 비록 궁박하게 집에 있어도 뜻은 항상 나라를 구제하는 데 있어야 한다. 무릇 치민(治民), 치병(治兵), 산천(山川), 관방(關防), 재부(財賦), 성곽(城郭), 거갑(車甲), 기계(器械), 행진(行陳), 의약(醫藥), 잠적(蠶績), 경농(耕農), 일용의 도구들은 진실로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니 깊이 헤아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스스로 농포자(農圃子)라는 호까지 지어 시골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학문은 공리공론의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주자성리학에 경도되지 않고 경세치용의 실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과거를 통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기보다는 향촌에 거주하면서 실지 체험을 통해 현실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책을 모색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국방을 중시하여 『도검편』과 같은 군사관계의 전문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농포문답』에서도 국방관련 항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의 국방은 지형지세를 활용하여 성곽을 축성하고 고갯길을 방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천지리를 파악하는 것이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는 그를 지도제작에 몰두하게 했고, 결국 <동국지도>라는 역작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동국지도>의 제작 배경

이전 시대의 지도들이 많은 결함들을 갖고 있어서 지도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상기는 이를 극복한 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는 의도를 지니고 지도제작에 임하게 된다.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지도들은 대부분 지면(紙面)의 모양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리나 방위들이 정확하지 못했다.

이들 지도의 대표적인 것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삽입된 일명 <동람도(東覽圖)>라는 지도인데, 이 지도는 조선전기 활발했던 관찬지도제작의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판본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에 맞도록 지도의 형태를 조정했기 때문에 <팔도총도(八道總圖)>의 모습은 남북으로 압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각 도별도(道別圖) 역시 판본의 규격에 맞도록 지도의 형태를 조정하고 있어서 축척도 일정하지 못한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동람도>가 행정·군사적 용도에서보다는 『동국여지승람』의 부도(附圖)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도에 담고 있는 내용도 매우 소략하다.

정상기는 말년에 <동국지도>의 제작에 몰두하였는데, 구체적인 제작 경위는 기록이 없어서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도제작은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과는 달리 개인의 독창성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역사적·사회적으로 축적된 이전의 성과들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도제작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통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곡된 윤곽을 지니고 있는 <동람도> 유형의 지도에서 국토의 모습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로 연결시키기에는 중간의 공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17세기경 국가적 사업으로서의 지도제작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고, 현존하는 당시 지도도 많지 않다. 따라서 이 시기를 지도제작의 정체기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탄생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정상기의 지도가 제작되었던 시기는 오히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적·행정적 차원에서의 지도제작이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전쟁 후의 복구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양안(量案)의 정리와 호적(戶籍)의 정비가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졌고, 농업생산력의 회복을 위해 농지의 개간과 농법의 개량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광업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상품교환경제의 발달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해 지역간의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실학이 태동하여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우리 나라의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든 여건들은 당시 지도제작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서의 지도 소유를 금지했던 조선전기와는 달리 사대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의 지도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민간에서의 지도제작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김정호의 <청구도> 범례에서 뛰어난 지도제작가로 언급하고 있는 윤영(尹鍈, 17세기 인물로 추정), 황엽(黃曄, 1666~1736)과 같은 이도 이 시기에 활약하고 있었다. 또한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접어 들면서는 청나라와의 국경분쟁을 계기로 변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던 시기였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관방지도(關防地圖)가 제작되기도 했다. 중국으로부터 지도 및 지리지를 적극 수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변경지역의 지도를 제작하여 국방에 이용했던 것이다.

정상기의 지도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당대까지 축적된 지도제작의 성과와 지리 지식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유일한 저작인 『농포문답』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그는 병약하여 한 고을 밖을 제대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전 국토를 답사하고 측량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며 고위 관직에 있었던 정인지의 직계 후손으로서 집안에 소장된 지도와 각종의 지리 관련 서적 등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고,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자료를 폭넓게 활용하면서 백리척을 사용한 독특한 방법으로 당대 최고의 <동국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국지도>의 체제와 내용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대전도(大全圖)와 이를 팔도로 나누어 첩으로 만든 팔도분도(八道分圖)로 이루어져 있다. <동국지도>는 정상기의 원도에서 계속 전사되어 후대에 이어졌는데, 현재 국내의 도서관 박물관 등지에 다수가 보존되어 있다. 대전도의 경우는 현존 사본이 팔도분도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인데, 이들의 규격은 대략 가로 130∼140cm, 세로 240∼260cm 정도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도인 양성지(梁誠之), 정척(鄭陟)의 전도 유형에 속하는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의 규격이 가로 61cm, 세로 132cm인 것을 보더라도 정상기의 지도는 이전 시기의 전도와는 달리 대축척의 지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축척의 전도는 여러 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서 그려야 하는 전사(傳寫)상의 불편함과 열람, 휴대상의 문제 때문에 후대까지 활발하게 전사되지는 못하였고 대신에 팔도분도의 형식이 정상기 지도 사본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정상기의 팔도분도는 이전의 팔도분도와는 다른 양식으로 되어 있다. 즉,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에 실리는 팔도분도는 각 도별 지역의 넓고 좁음에 관계없이 한 지면에 무조건 한 도를 배정하여 그렸기 때문에 축척이 서로 달라 산천의 표현과 도리(道里)가 모두 부정확한 것이 특징이었다. 정상기의 팔도분도는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도록 고안되었는데, 경기도와 충청도는 면적이 다른 도에 비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한 장의 지도에다 합쳤고, 함경도는 넓은 면적으로 인해 남도와 북도로 분리하여 두 장의 지도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각 분도의 규격도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가로 60cm, 세로 100cm 내외이다.

내용면에서 농포자 지도는 조선 전기의 지도들과 비교했을 때 무엇보다 한반도의 윤곽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의 북부지방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 전기 양성지, 정척의 <동국지도>를 계승한 대부분의 지도들은 북부 지방이 중·남부 지방에 비해 면적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로가 부정확한데,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구가 위도상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도 거의 같은 위도상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농포자 지도에서는 이러한 지도의 결점을 거의 극복하여 현대 지도의 한반도 윤곽과 비교해 보아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산천으로 대표되는 자연적 요소이다. 김정호가 지적한 것처럼 산맥과 물줄기는 지표면의 근골(筋骨)과 혈맥(血脈)이 되기 때문에 과거의 지도제작자들은 다른 것들보다 우선적으로 산천의 표현에 관심을 두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에서 산천의 표현과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계(山系)와 수계(水系)가 이전 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상세해졌다는 점이다.

이전의 지도들은 소축척 지도이기 때문에 산계와 수계를 자세히 표현할 수 없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산천으로 대표되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후대에 비해 상당히 제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대축척의 지도로 제작되어 산계와 수계가 보다 자세히 표현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고, 이전까지 축척된 공간인식을 바탕으로 후대의 김정호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산천체계를 표현해 내고 있다.

셋째는 인문적 요소인데 이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교통로이다. 서울로부터 지방으로 뻗어 가는 대로는 물론 각 군현을 잇는 연결도로까지 자세히 그렸고, 서해안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해로도 표시하였다. 또한 산지상의 영로(嶺路)인 고개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교통로와 더불어 역보(驛堡), 산성(山城), 봉수(烽燧)와 같은 군사적인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정상기는 국방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에서도 이를 중시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역의 경우는 찰방역(察訪驛)만을 그렸지만 진보(鎭堡)의 경우는 연해와 북방의 것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이 밖에도 유명한 포구와 마을, 사찰, 고읍, 저수지, 나루터 등도 그려져 있다.

<동국지도>의 가치와 의의

정상기는 <동국지도>를 제작하면서 이전 시기의 지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축척인 백리척을 사용했다. 백리척은 대략 9.4∼9.8cm의 긴 막대모양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길이가 백리에 해당한다. 전통시대의 지도제작에서는 거리와 방위를 고르게 하면서 축척의 기능도 수행하는 격자형의 방격(方格)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오히려 지도가 번잡해지는 결점을 낳기도 했다. 따라서 정상기는 이러한 방격 대신에 백리척을 고안하여 두 지점간의 실제 거리를 쉽게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동양 문화권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또한 <동국지도>는 현대 지도의 축척으로 환산했을 때 대략 1:50만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지도에 이전 시기 지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대축척지도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국지도>는 우리 나라 국토의 원형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동국지도>에서 확립된 국토의 모습은 약간의 수정은 가해지지만 일제에 의한 근대적 측량지도가 나오기 이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1757년 조정에 알려지게 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이후 관청에서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기의 지도가 행정·군사적 용도로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는 1770년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여지도(輿地圖)> 제작사업이다. 그는 영조의 명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짝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 때 기본도로 사용된 것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였다. 이를 토대로 도별도(道別圖), 군현지도(郡縣地圖) 등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지도는 이후에도 관에서 계속 모사되면서 널리 이용되었다.

민간에서도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제작에 이용되었다. 특히 해주 정씨 가문의 정철조(鄭喆祚 1730~1781), 정후조(鄭厚祚 1758~1793) 형제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편집하여 더 뛰어난 해주본(海州本)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이후에 제작되는 많은 전도들은 정상기의 대전도를 바탕으로 축소한 것들인데, 도리도표(道里圖表)에 수록된 전도(全圖),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목판본 <해좌전도(海左全圖)>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그의 후손과 다른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 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었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는 그의 <청구도> 를 바탕으로 보완·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근대식 지도제작의 기법이 서서히 도입될 때에도 정상기의 지도는 여전히 정부에 의해 제작되는 각종 전도의 기본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동국지도>가 조선후기 지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지도제작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 제작된 <동국지도>와 같은 전통시대의 지도들은 현대의 지도와는 제작기술이나 표현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정확도의 관점에서 전통시대의 지도를 평가한다면 여전히 미숙한 지도에 불과할 것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도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하나의 지도가 탄생하기까지에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의 독창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된 많은 경험과 당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던 지식과 관념들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만큼 지도는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과는 다른 강한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동국지도>는 비록 정상기 일 개인의 역작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조선시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지도제작의 문화적 역량이 담겨져 있으며 우리의 국토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표현하려 했던 선조들의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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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국토」 99.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