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권) 택리지 완역본(신정일이 새로 쓰는)
(이중환 택리지를 신정일님이 새로 썼다...총 10권이다. 이번에 읽는 책은 택리지 완역본이다 )
(이익성님이 옮긴 택리지를 예전에 읽고, 두번째 읽는다. 뭔지 모를 울림이 있다. 좋은 책일까?)
(특히, 이조전랑 제도가 생긴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이성계의 묘수 한 수 같다)
(당파싸움이 심하다고 영조가 전랑 제도를 없애서..안동김씨, 대원군과 같은 절대권력이 생긴 것 같다...)
(이조 전랑 제도에 대한 책을 다시 한 권 읽고 싶다)
■ 책을 읽게 된 배경 : 조선 후기 최고 인문 지리지
■ 개 요
1. 읽은날짜 : 2018. 1 .23(화) - 1. 26(금)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수 : 이중환 지음 신정일 옮김/ 다음생각/ 240
3. 제목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완역본
4. 목 차
서문
사민총론 : 서문 성격
팔도총론
복거총론
총론
■ 지은이 이중환, 옮긴이 신정일
- 지은이 이중환
1690년 출생, 1713년 24세 때 증광별시에 급제.
1722년 병조좌랑, 신임사화로 30년간 방랑생활
58세 되던 해, 금강 변에 위치한 강경의 팔괘정에서 2년간에 걸쳐 택리지를 씀
1756년 67세로 운명, 황해도 금천의 설라산에 안장
- 옮긴이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총 10권 집필
■ 책을 읽은 소감 및 줄거리
- 우리나라 전체을 알아가는 기분이다.
신정일의 택리지 완역봉 외에도, 우리산하,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를 계속 읽어갈 계획임
- 택리지는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으로 구성
서문성격의 사민총론에서 백성과 선비, 농사꾼과 광장과 상인 네 계급으로 나누어 설명
팔도총론 : 팔도로 구별, 행정구역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하여 생활권 중심으로 구성
복고총론 : 복거란 사대부들이 살고 싶은 곳을 찾아 새로운 집을 꾸리는 것인데,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등 네 개의 주제로 나위어 집약되어 있음.
■ 밑줄을 그은 글
- 이중환의 택리지는 사민총론, 팔도 총론, 복거총론으로 구성되어 있음
[四民총론]
- 진나라가 봉건 제후들을 멸망시킨 이래, 천자 한 사람 외에는 벼슬을 하는 사람이나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참된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 살면 모두 사대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八道총론]
- 태조가 장군으로 활동하다가 왕씨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도운 공신 중에 서북 지방 출신으로 용맹스러운 장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뒤에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기용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삼백여 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 후백제 견훤은 신라 말엽에 이 땅을 차지하고서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 자주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렸다.
그 뒤 태조가 견훤을 평정한 뒤에 백제 사람을 미워하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차령 이남의 물은 모두 산세와 어울리지 않고 거꾸로 흐르니, 차령 이남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
- 낙동강이 경상도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므로 강의 동쪽은 좌도라 하고, 강의 서쪽은 우도라 한다.
두 지류가 김해에서 크게 협쳐진다. 70개 고을의 물이 하나의 수구로 빠져나가며 큰 평야를 펼쳐 놓았다.
- 상주의 서쪽은 화령이다. 화령의 서쪽은 충청도 보은땅이다. 화령은 소재 노수신의 고향이고, 동쪽에 자리 잡은 안동은 여헌 장현광의 고향이다.
그 남쪽에 선산이 있다. 상주와 비교할 때 선산의 산천이 더욱 깨끗하고 맑다. 속담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 一善(지금의 구미시 선산읍)에 있다고 했다. 선산은 예로부터 문장에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사들이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그중에 술사가 외국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시기하여, 군사들을 시켜 고을 뒤쪽에 있는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 지지도록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다. 그런 뒤로 선산에서 인재가 쇠잔하여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금산(지금의 김천)의 서쪽이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곧 황간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 물이 만나서 김천이 된 뒤에 동쪽으로 흐른 뒤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김천 유역에 자리 잡은 고을이 지레, 금산, 개령이다. 이들 고을은 선산과 함께 감천 물을 관개하여 이용하므로 논밭이 대단히 기름지다.
주민들의 삶이 안락하므로 죄를 두려워하고 나쁜 일을 멀리한다. 그러한 까닭에 대를 이어서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금산은 판서 최선문의 고향이고, 금오산이 있는 선산은 주서 길재의 고향이다. 최선문은 노산군(당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길재는 고려를 위하여 절의를 지켰다.
- 성주는 산천이 밝고 수려하므로 고려 때부터 이름난 문자가와 선비가 많았다. 조선에 접어들어서도 동강 김우웅과 한강 정구가 이 고을 출신이다. 합천 남쪽은 삼가 고을로 남명 조식의 고향이다.
김우웅과 정구, 정인홍이 모두 남명의 문인이다. 정인홍은 학자로 자처하면서 남명을 존경하고 퇴계를 공격하였다. 정인홍으로부터 배우던 많은 사람이 그의 잘못된 지도 때문에 큰 해를 당했다. 동강은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자 정인홍을 피해 성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청주에 있는 정좌산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정인홍은 광해군 당시 대북파의 우두러리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 반정으로 저잣거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성주 사람들은 옮은 행실을 좋아하여 그의 집을 보전하였다. 이것은 동강과 한강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었다.
- 덕유산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 세 도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 덕유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한 줄기가 전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마이산의 쌍석봉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았다. 옛날에 공정대왕(정종)이 호남에서 무술을 익힐 때 산의 형상이 말의 귀와 비슷하다고 하여 마이산이라 지은 것이다.
- 공주읍 북쪽에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서리고 얽혀 있다. 그 모양이 마치 공公 자와 같아서 고을 이름을 공주라 지었다. 산의 형국을 따라서 작은 성을 쌓았고 강을 혜자로 삼아, 지역은 좁으나 형세는 견고한 성이 공산성이다.
갑자년(1624)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가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했다. 공산 위에 두 그루 나무가 있는데 임금은 매일 이 나무에 기대어 북쪽에 펼쳐진 궁원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말을 탄 사람이 나는 듯 달려오기에 그 연유를 묻자 이괄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보고였다. 임금은 대단히 기뻐하고서 이 나무에 통정대부라는 호를 내렸다. 그 뒤에 광야에서 산 위에다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다. 그러나 나무는 말라서 죽고 정자만 남아 있다. 공주성 안에는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강화, 광주廣州와 함께 특별하게 관리하는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 속리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추풍령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다시 솟아나 황강의 황악산이 되었다. 다시 전라도로 이어져서 무주의 덕유산이 되었으며, 또 장수와 남원 사이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으로 가서 마이산이 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돌상의 한 줄기가 거슬러 북쪽으로 가서 주류산과 운제산 그리고 대둔산이 되었다. 충청도로 들어와서는 금강을 뒤에 등지고 계룡산이 되었는데, 남북으로 통하는 한 줄기의 큰 산맥을 이루었다.
덕유산과 마이산의 동.서쪽, 여러 고을의 내와 골짜기의 물이 하나로 합쳐져서 금강의 근원이 되었다. 이것을 적등강(옥천군 이원면 일대를 흐르는 강 이름)이라 부른다. 이 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옥천의 동쪽으로 가서 속리산의 물(보청천)과 만나고, 서쪽으로 굽어 흐르면서 금강이 된다.
- 속리산은 청주에서 동쪽으로 백 리 되는 거리에 있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동쪽으로 흐른 것은 경상도의 낙동강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으로 들어가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충주 달천(남한강 상류)이 되어 한강으로 들어간다.
- 태조는 홍무(명나라 태조의 연호) 임신년(1392)에 공양왕에게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왕씨의 신하였던 세가와 대족 중에 조선을 따르지 않은 자는 그냥 개성에 남았다. 주민들은 그들이 살던 마을을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렀다. 태조는 그들을 미워하며 개성 선비들ㅇ게는 백 년 동안 과거 보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곳에 남아서 살던 자들의 후손은 마침내 평민이 되어 장사를 생업으로 살았으므로 학업을 닦지 않았다. 삼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자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이름까지 없어져버렸고, 서울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옮겨가 사는 사람이 없어졌다.
[복거卜居총론] : 지리, 생리, 인심, 산수
- 무릇 사람이 살 곳을 정할 때에는 첫째, 지리가 제일 좋아야 하고, 다음에 생리가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산수가 좋아야 한다.
이 네가지에서 한 가지만 모자라도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생리가 부족하면 오래 살 수가 없고, 생리는 좋더라도 지리가 좋지 않으면 이 또한 오래 살 곳은 못 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다고 해도 인심이 나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고, 가까운 곳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가 없다.
- 지리를 어떻게 논할 것인가
먼저 水口를 보고, 그 다음으로 들의 형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어서 산의 모양과 흙의 빛깔을 보고, 다음은 조산朝山(앞에 있는 높은 산)과 조수朝水(앞으로 흘러드는 강물)을 봐야 한다.
수구가 엉성하여 텅 비고 넓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땅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대개는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자연히 흩어져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을 때에는 반드시 수구가 닫혀 있고, 그 안쪽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본 뒤 구해야 한다. 그러나 산속에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그런 곳을 찾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물이 힘있게 판국을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다.
한 겹으로 막고 있어도 참으로 좋은 곳이지만 세 겹, 다섯 겹으로 감싼 곳이면 더욱 좋다. 이러한 곳이라야 오래도록 굳건하게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
- 무엇으로 생리生利를 논할 것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음식 대신 바람과 이슬만을 먹으면 살지 못하고, 옷을 가리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득이하게 먹고 입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거두어야 하므로, 재리財利를 경영하여 살림을 넓히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자도 넉넉하여진 다음에 가르친다고 하였다.
- 땅이 기름지다는 것은 그 땅이 오곡을 가꾸기에 알맞고, 목화 재배에 알맞은 곳을 말한다. 논에 벼 한 말을 심어서 60두를 거두는 곳이 제일 좋은 곳이고, 그다음이 40~50두를 거두는 곳이며, 30두 이하밖에 추수할 수 없는 곳은 땅이 메말라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 그리고 경상도의 성주와 진주 등 몇 곳이다. 그 지역은 논에 벼 한 말을 심어서 가장 많이 나는 곳은 140여두를 거두고, 다음은 100두를 거두며, 가장 적은 곳은 80두를 거둔다.
나머지 다른 고을들은 모두 그렇지 못하다. 경상도의 좌도는 땅이 모두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다. 그러난 우도는 기름지다.
전라도의 좌도는 지리산 곁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으로 모두 기름지다. 그러나 바닷가에 연한 고을은 물이 없고 가뭄이 많다.
- 무엇으로 인심을 논하는가?
공자는 마을 인심이 착하면 아름다운 곳이 좋다. 아름답고 착한 곳을 가려서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 하였다.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은 아들을 훌룡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살 고장을 찾을 때 착한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반드시 해가 되어 좋지 못한 풍속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살터를 잡을 때에 그 지방의 풍속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 인사의 권한을 중히 여겼던 관제 : 이조 전랑(정랑+좌랑)
우리나라의 관제(벼슬 제도)는 고대와 다르다. 비록 삼공(삼정승)과 육경(육조판서)를 두어 모든 관청을 감독하고 통솔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을 더욱 중히 여겼다. 관리와 풍문을 조사하고 작은 일이라도 잘못이 자신에게 관련되어 있으면 그 벼슬자리를 피하고, 규탄하고 처벌하는 법규를 두어 오직 의논으로써 정치하였다.
무릇 내외 관원을 임명하는 것은 삼공에게 있지 않고, 오르지 이조에 속하였다. 또 이조의 권한이 너무 커질 것을 염려하여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을 임용할 때는 판서에게 맡기지 않고, 이조낭관(판서를 돕는 역할을 하며 정랑은 정5품, 좌랑은 정6품이다)이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상공과 육경이 비록 벼슬은 크고 높지만 銓郞(저울질한전,사내랑)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바로 삼사의 여러 관원으로 하여금 논박하게 하였다. 조정의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명예와 절개를 중하게 여겼으므로 한번이라도 탄핵을 받으면 그 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전랑의 권력은 바로 삼공과 비슷하다. 이로써 높은 벼슬과 낮은 벼슬이 서로 유지되고, 상하가 서로 견제하여 삼백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큰 권세를 가진 간사한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신하의 세력이 커서 임금이 뜻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폐단이 없었다. 조종조(태조)가 임금의 권세는 약하고 신하의 세력이 강했던 고려 왕조의 폐단을 거울삼아, 그런 점을 예방하는 장치를 조용히 마련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삼사의 관원 중에서 반드시 명망과 덕행이 있는 사람을 철저하게 가려 전랑으로 삼았으며, 또 스스로 그 후임자를 추천하게 하였다. 추천권을 이조의 관장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인사의 권한을 중하게 여겨 모든 것을 공정한 논의에 부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괸직의 품계를 올릴 때는 반드시 전랑을 먼저 올려서 임명한 연후에 다른 관청까지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번 전랑을 지낸 사람으로 다른 큰 사고만 없으면 쉽게 공경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전랑이란 관직은 이처럼 명예와 권력이 갖추어져 있었기에 나이 젊은 신진 중 전랑 자리를 희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제도를 시행한 지가 오래됨에 따라, 추천하는 데 산과 후, 운과 불운으로 논쟁의 단서가 없지 않았다.
- 어떻게 산수를 논할 것인가.
백두산은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서 나라의 빛나는 지붕이 되어 있다. 산 위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팔십 리이다.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간이 되었다.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혼돈강이 되는데,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이 바로 우리나라이다.
백두대간의 산줄기의 끝인 지리산
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이곳에서 백두산의 큰 산줄기가 끝난다. 그런 까닭에 이 산의 다른 명칭을 두류산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병방산이라 하며, 한라산을 명주산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이른바 삼신산이다.
지리지에는 지리산을 태을성신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며, 흙의 성질이 두텁고 기름지므로 온 산이 사람이 살기에 알맞는 곳이다.
산과 강이 어우러져서 살 만한 곳
그러니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보다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해야 옮다.
시냇가에 살 때에는 반드시 고개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한다. 그래야만 평시나 난세나 모두 오래 살기에 알맞다. 시냇강 살 만한 곳은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가 첫째다.
- 무릇 산수란 정신을 기쁘게 하고 감정을 화창학 하는 것이다. 사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럽고 거칠어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풍부하지 못한 곳이 많다. 사람들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숨어 살 수가 없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만을 취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 그리고 지리가 아름다운 곳을 택하여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 리 밖이나, 혹은 반나절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는 곳을 사두어서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근심을 풀고, 혹은 머무르다 돌아온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옛날에 주자가 무이산의 산수를 좋아하며 물 구비와 산봉우리 꼭대기마다 글과 그림을 그려 빛내고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 집을 두지는 않았다.
그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봄철에 저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는 것이 또한 싫지 않았다. 후세 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으로 본을 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