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018-30권) 나는 이렇게 살아 왔다

카프리2 2018. 6. 17. 09:35

(우리나라 등산 서적을 많이 출판하는 선배 3인방이 있다)

(이용대님, 김영도님, 고손경석님 세분이다. 후배들이 배워야 한다)

(이 책은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을 많이한 김영도님이 자서전 식으로 쓴 책이다)

(흔들리지 않고 꾸꿋히 살아온 여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 책을 읽게 된 배경 :  신문의 책소개를 보고 구입

 

 - 산서를 많이 쓴 분의 인생을 살짝 엿보고 싶어서

 

 

 

■ 개 요

 

1. 읽은날짜 : 2018. 6. 15(금) - 6.17(일)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수 : 김영도/ 수문출판사 / 351

 

3. 제목 : 나는 이렇게 살아 왔다

 - 이 책은 회고도 고발도 아니다. 오직 지난 날의 나와 내 주변의 삶의 실상을 그 일부나마 뒤늦게 보고할 뿐이다.

  

4. 목차

 

- 이 글을 남기며

 

- 1. 스무 살 때까지

   2. 혼자 38선을 넘고

   3.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4. 6.25는 내 생애의 원점

   5. 나는 살아야 한다.

   6. 무에서 유로

     

 - 이 글을 맺으며

  (본문 중에서 : 이 글은 내가 38선을 넘고 6.25를 겪은 기록이며, 또한 38선과 6.25로 파생된 황무지를 살아간 나의 자화상이다)

 

 

■ 저자 : 김영도

 

 - 1924년 평북 정주 출생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 1972년 제9대 공화당 국회의원

 -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 회장,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

 

 

 

 

■ 책을 읽은 소감

 

- 김영도님은 올해(2018년) 95세다. 이 나이에도 영어와 독일어로 된 산서를 번역하고 있다. 카프리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라는 김영도님의 수필집을 사서 읽은 적이 있다. 등산인은 산을 타면서 책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이다. 김영도님이 번역한 검은 고독 흰 고독, 8000미터 위와 아래도 책을 구입했으나 아직 못 읽었다.

 

- 이러한 분의 자서전이 나왔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게 되어 바로 구입해서 읽게 된 것이다. 김영도님은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다 6.25가 터져 서울대를 다니는 친 동생과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수원에서 화물칸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간다. 대전에 가니 모든 젊은이들은 도망가기에 바쁜데...서양인들은 기차를 타고 전선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마침 학도 의용병을 모집하는 사람이 있어 1번으로 학도의용병에 자원한다. 동생과 친구도 따라서 지원하게 된다. 

 

- 단기간의 군사 훈련을 받고 경주시 안강의 형제봉이라는 전투에 2분대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동생은 부분대장, 친구는 1분대장이다. 거기서 분대원 11명중 혼자서 살아남게 된다. 친구와 동생도 전사한다. 후에 동부, 중부전선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다 통역병 장교 모집에 응모하여 대위로 5년간 군생활을 마친다.

 

- 전역하여 성동고등학교 선생, 공화당 당원으로 선전부장, 사무차장을 거쳐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73년부터 79년까지 6년간 재직하면서, 1977년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 원정대 대장을 맡는다. 80년부터 대한산악연맹을 회장를 10년간 맡았고..90년부터 외국의 산서를 번역 출판하고, 산악 책자를 써서 몇 권 출판했다.  

 

- 지금까지가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시대에 부딪쳐 물러서지 않고 소신껏 청빈하게 산 김영도님의 생애를 책에 밑줄을 치며 감동하며 읽었다.

   선배님이 남기신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 볼 계획이다...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애기가 떠오른다. 

 

 

 

■ 밑줄을 그은 글


- 이렇게 모두 도망칠 때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며 우리는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하는 것이며, 이런 때 부녀자나 노약자라면 모르되 20대 젊은 대학생마저 앞을 다투며 자기만 살겠다고 한다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 싶었다.

 

- 북한의 인민군은 벌써 수원까지 내려온 듯했다. 시내를 서성거리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재빨리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러자 국방부 정훈국에서 나왔다는 자가 그런 대로 둘러선 젊은 학생들에게 사태가 급변하고 있으니 나가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앞으로 나갔다. 국방부 직원이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김영도가 제1호로 지원했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옆에 있던 상과대학의 동생 영식이와 공대생인 김종우도 가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모두 청량이 기숙사 한방에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김성건의 동생도 따라 나섰다. 하기야 혼자 떨어질 수도 없었을 거다.

 

-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그늘도 없는 야산의 퇴약볕 아래서 M1 소총과 박격포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땅바닥에 앉아 노트에 기록하다 보니 옆과 앞뒤에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교육장소 한가운데 앉아 있었고, 교관은 여전히 흑판을 보며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주위를 살피니 어느새 자리를 옯겨 모두 나무 그늘 밑에 가 있었다.

 

- 드디어 우리 학도병 중대에 특공 명령이 떨어졌다. 목표는 역시 안강 형제산이었다. 생긴 모양이 긴 능선 한가운데가 다소 꺼지고 산의 남봉과 북봉이 마치 형제처럼 마주 보고 있어서일까?

 

- 그때까지 나는 앞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 돌아서니 여기저기 병사들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사이에 모두 죽은 것이다. 내 분대만해도 11명 가운데 9명이 쓰러지고 이제 나하고 또 한 명 남았을 뿐이었다.

동생은 복부를 맞았다. 다른 데도 아니고 북부니 가망이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 보병 제9사단은 중부 전선 금화에서 청눤지구로 이동했다. 이 지역은 당시 철의 삼각지대로 불린 전술 전략상 용충지대하고 했다. 그리고 9사단이 여기서 백마부대라는 이름을 덛게 되었다. 철원 북쪽에는 395고자가 있고 이 고지와 마주 보고 396고지가 있어 두 고지를 두고 적과 아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곤 했다. 즉 396고지에는 적이 있었고 395고지는 우리의 주저항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종군기자가 이곳 상황을 취재하러 왔다가 마침 흰 눈을 쓴 395고지의 모습이 백마 같다고 해서 이것이 그래도 부대 이름이 됐다고 한다.     

 

- 종우형에게 우리는 피난길 대전에서 남들이 모두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을 때 서로 자기 의사에 따라 총을 들었고, 학도병 60명으로 된 중대에서 종우가 1소대 1분대장, 내가 2소대 1분대장 내 동생이 부분대장으로 있었으며, 우리는 3개월 동안 잘 있었고 잘 쌰웠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국군이 쫒기고 쫒겨 경주 북방 사방리까지 밀려 최우 방서선을 쳤을 때, 그곳 형제산 전투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종우와 영식이 전사하고 40명 가까운 학도병이 쓰러졌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