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권) 무등산(박선홍)
(2019.7..2. 화요일. 땅통호남 12구간 어림고개-무등산-유둔재 산행을 하기 위해 읽은 무등산 책자이다)
(호남정맥이 지나는 길을 위주로 주요내용을 정리했다)
■ 책을 읽은 배경
- 땅통종주 무등산 구간(어림고개-서석대-유둔재)를 하면서 무등산을 더 깊숙이 알고 싶어서
■ 개 요
1. 읽은 날짜 : 2019. 6. 26(수) - 6. 30(일)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 : 박선홍/ 다지리/ 521
3. 제목 : 무등산
- 무등산의 유래.전설과 경관
4. 목차
서설
무등의 지리지
풍속과 유적.유물
사우
정자문화
사찰
개발
유서석록
여백의 장
■ 지은이 : 박선홍
- 광주에서 태어나 80평생을 광주에서 살아온 광주의 토박이
- 광주상공회의소 부회장
- 조선대학교 이사장
- 저서 : 광주 1백년 전3권
※ 1926년 출생
2017년 별세(향년 91세)
■ 책을 읽은 소감
- 무등산을 깊숙이 아는데 큰 도움이 된 책이다.
- 의병장 고경명에 대해 더 깊숙이 알게 되었다.
- 무등산을 갈때 마다, 읽고 가고 싶은 책이다.
■ 주요내용 요약(밑줄을 그은글 위주)
1. 서설
1) 개관 :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의 동쪽 가장자리와 전라남도 담양, 화순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광주. 전남의 진산이며 남도민의 신산이다. 산세가 유순하고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보나 둥그스럼한 모습이 한결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직스럽고 후덕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광주 시내 중심지인 충장로 5가에서 정상까지 직선으로 9.2km의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는 더욱 친숙한 산이다.
무등산의 자랑은 토산이 지나는 후덕한 풍모와 더불어 정상을 중심으로 곳곳에 펼쳐진 웅장한 암석미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규봉, 입석, 서석으로 이것을 무등산 3대 석경으로 주상절리라 한다.
2) 위치와 산세
무등산은 행정구역으로는 광주광역시와 동구.북구와 전라남도 담양군, 화순군 등 1개 광역시와 1개도, 2개군에 걸쳐 있다. 평면 면적은 30.23㎢(도립공원 관할면적 : 광주 27.03㎢, 화순 2.4㎢, 담양 0.8㎢)이다.
무등산을 떠받치는 산줄기는 호남정맥이다. 호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영취산(1,076m)에서 분지하여 광양 백운산(1,218m)에 이르는 도상거리 462km인 호남의 중심 산줄기이다. 호남정맥은 세 번 솟는다. 다시 말해 시작인 장안산, 끝인 백운산 그리고 한복판의 무등산에서 각각 1,000m가 넘는 용솟음을 한다.
3) 산 이름의 변천
1) 무등산은 백제 이전가지는 무돌이나 무당산이라 일컬었다. 통일신라 때는 무돌의 이두음인 무진악 또는 무악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부터 서석산이라는 별칭과 함께 무등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무주가 광주로 바뀌게 된 것은 940년(고려 태조 23년) 3월에 여러 주, 부, 군, 현의 명칭을 바꾸었을 때부터이다.
2) 서석산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 것은 고려 때의 일로 추측된다. 무진주를 광주로 고쳐 부른 것은 940년(태조 23년)인데, 고려사 지리지는 '무등산'이라 적고, 혹은 무진악이라 하고 또는 서석산이라 한다고 그 명칭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어 서석산이란 이름이 이때부터 무등산의 별칭 또는 애칭으로 함께 불려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3) 무등산
무등산이란 명칭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부른 이름으로 '무돌', '무진'이라 했던 것이 무등산으로 바뀐 것이다.
무등산 어원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등산의 '무등'은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무돌'의 이두음이다. 이 무돌에는 옛 농경사회의 보편적 지명인 물둑이라는 뜻과 순수 우리 옛말의 조어인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도 있겠으나, 이미 '무당산' 대목에서 말한 대로 '당산'과 비슷한 음을 따서 한자로 나타냈을 가능성도 있다.
4) 역사 속 무등산
지리지의 기록들
- 삼국사기 지리지 : 무주의 기록만 전하고 무등산의 기록은 없다.
- 고려사 지리지 : 무등산이 있다. 일명 무진악이라고도 하고 서석산이라고도 한다.
- 세종실록 지리지 : 무등산은 일명 무진악이라고도 하며 또는 서석산이라고도 한다.
- 신증 동국여지승람 : 무등산은 광산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진산이며, 일명 무진악 또는 서석산이라고도 한다.
- 대동지지 : 무등산에 관해서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이다.
동쪽 30리에 있는데 화순 동복 창평과 경계이다. 신라 때 무진악이라 칭했고, 고려 때 서석산이라 불렀다.(중략)
- 광주읍지 : 광주읍지는 산천조에서 무등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은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거의 같다.
2. 무등산 지리지
1) 서석대
장불재의 고산초원을 헤치고 동북쪽으로 900m쯤 올라가면 마치 거대한 병풍을 둘러 쳐놓 은 것 같은 장엄한 돌무더기가 펼쳐져 있다. 이것이 유명한 서석의 수정병풍이다. 서석대(1,100m)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어서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이라고도 했다.
2) 입석대(立石臺)
입석대가 바위기둥 모양을 띠는 이유에 대해 전남대 지리학과 박승필 교수(지형학)는 "펄펄 끊는 용암이 지표상에서 급속히 식으면 수축현상이 일어나고 냉각면이 수직방향으로 갈라지는 주상절리가 일어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직방향의 틈에 비나 눈으로 물이 스며들게 되고 스며든 물은 겨울에 얼어 팽창하면서 바위틈을 벌어지게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어느새 용암덩어리는 독립된 돌기둥 여러 개가 늘어선 모양으로 쪼개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입석대는 9천만년 전에 솟아올라 억겁의 풍상을 겪는 동안 쪼개지고 깍이고 눕고 하여 오늘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정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어 화산암이 풍화. 침식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윤회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으로 그 가치가 높다.
조선조 중기까지도 입석대에는 입석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보면 '입석암'은 입석대의 한가운데 자리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돌이 높이 솟아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다'고 쓰여 있다.
문화재청은 2005년 12월 16일 무등산 정상 일대의 주상절리 중 입석대와 서석대를 국가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했다.
3) 규봉(圭峯)
광주와 화순의 경계지점인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2km쯤 평평한 산길을 돌아가면 지공(指空)너덜의 돌무더기를 지나 규봉에 이른다. 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에 자리잡은 규봉의 높이는 해발 950m,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에 속한다. 이 일대의 층암괴석을 규봉이라 부른다. 원래는 철의 입구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을 규봉이라 했다는데, 지금은 이 바위를 삼존석이라고 한다.
삼존석은 여래존석, 관음존석, 미륵존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도선국사가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규봉암에 들어서면 삼존석 왼편 바로 밑에 넓은 반석이 있는데 이것이 입석. 서석과 함께 무등산 3대 석대의 하나인 광석대(廣石臺)다. 이곳에서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화순의 물염적벽과 광주광역시의 상수원이 된 동복수원지가 한눈에 펼쳐지고 청명한 날이면 멀리 구례 지리산, 순천 조계산, 광양 백운산과 장흥 제암산, 화순 모후산, 영암 월출산이 바라다 보인다. '금강산을 보지 않고 한국을 보았다고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듯이 규봉을 보지 않고 무등산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4) 정상 삼봉
무등산 정상은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그것인데, 서석대, 입석대처럼 어느 것이나 선돌의 무더기로 되어 있다. 그중 제일 높은 천왕봉은 1,186.7m이다.
지왕봉은 일명 비로봉이라고도 불린다. 지왕봉 정상에는 뜀바위(뛰엄바위)가 있다. 뜀바위는 김덕령 장군이 뜀질을 하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기르던 훈련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서석대 쪽으로 있는 봉우리가 인왕봉인데 일명 반야봉이라고도 한다.
5) 장불재
'문헌비고'에는 장불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불동이라 적혀 있으나 이 고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장불재라고 불렀다. 장불재는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의 경계가 되는 해발 900m의 고갯길이다. 이 고개를 따라 곧장 산 아래로 내려가면 화순군 이서면이다. 옛날 이서.동복 사람들이 광주에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던 지름길이었다.
6) 백마능선
가을철에 이 능선 위에 피어난 억새꽃이 바람결에 하늘거리면 마치 백마의 말갈기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 중머리재
중머리재는 해발 608m의 높은 곳이지만 정작 고개 위에 올라서면 말잔등처럼 아주 넓은 초원이 전개된다. 이곳은 바람목이 되어서 그런지 언덕에는 소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고 억새풀과 철쭉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중머리재는 흔히 중치라고도 하고 유서석록에는 중령이라 했는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것을 스님의 머리에 비유하여 중머리재라 부르게 된 것 같다. 따라서 한자로 쓰자면 승두봉(僧頭峯)이다.
스님의 머리 같다 하여 중머리재라 하는 이 고개는 무등산 등산로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옛날 화순 동복사람들이 광주를 내왕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8) 너릿재
광주에서 화순읍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가 너릿재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화순을 광주 생활권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터널이 둟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험준한 고개였다.
광복 전 혼란기에는 도둑이 들끓어 행인들이 고개를 넘을 때 많은 피해를 입기고 했던 곳이다. 오죽하면 광주사람들이 행실이 고약한 사람을 비아냥거릴 때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 했겠는가.
너릿재에 얽힌 시대의 아픔이나 애환의 이야기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갑오동학농민 전쟁 때에는 동학농민군 포로들이 일본군에 의해 무더기로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너릿재를 일명 널재라고도 하는데 이 때 처형된 동학농민군들의 수많은 널이 너릿재를 지난 데서 연유한 말이라고 한다.
3. 사찰
1) 규봉암(圭峯庵)
규봉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밤 예불 마디마다 달은 점점 밝아오네.
삼존석 십대를 돌아 밤새도록 헤맬거나
-노산 이은상-
규봉암의 확실한 창건연대가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은 없고 다만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그 뒤에 순응대사(신라 애장왕)가 중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 만연사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젊은 시절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 하던 때에 만연사 동림암에 거처한 적이 있다.
4. 개발
1) 안양산 휴양림
무등산의 장불재에서 백마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동쪽 끝머리의 안양산(해발 853m)에 다다른다. 봄철이면 안양산 정상 부근에 수만 평의 철쭉 군락이 장관이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자태 또한 장엄하기 이름 데 없다. 안양산 휴양림(화순군 이서면 산 168번지)은 이 산자락 해발 400~600m 지점의 소쿠리 모양처럼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안양산 휴양림은 1961년부터 시작된 조림사업으로 40여 년 동안 잘 가꾸어진 곧게 자란 49만 ㎡의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어우러져 한결 운치를 더한다.
2) 둔병재(屯兵峙)
임진왜란 때 의병이 주둔했었다는 호국유적지이다.
5. 유서석록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이 41세 되던 해 1574(선조 7년) 음력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당시 74세의 광주목사 임훈 일행과 함께 무등산에 올라 그 감상을 약 4,800자의 순 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이다.
유람코스
4.20 : 증심사 숙박
4.21 : 중령(중머리재)-입석대(입석암)-염불암에서 유숙
4.22 : 상원암-정상삼봉(천왕봉.지왕봉.인왕봉)-서석대-삼일암과 금탑사-은적사-석문사 등-규봉암-광석대 등
4.23 : 영신골-적벽- 소쇄원-식영정-환벽당
4.24 : 광주로 돌아옴
6. 절의지사 제봉 3부자
1) 고경명
유서석록의 저자 고경명(1533-1592)의 호는 제봉으로 광주 남구 압촌동에서 출생한 선조 때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의병대장이다.
1552년 19세 진사가 되고 1558년(명종 13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조 좌랑,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563년(명종 18년) 울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서에 묻혀 한가로이 지냈는데 유서석록은 이 때에 쓴 것이다. 1581년(선조 14년) 영암군수를 거쳐 서산군수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년) 5월 3일 임진왜란으로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60 고령임에도 분연히 일어나 유팽로와 더불어 담양에서 회맹하여 각지에 격문을 띄웠다. 이에 구름처럼 모여든 의병들을 조련하여 맹주로 출사하니 그 군세가 7천여 명에 이르렀다.
휘하 의병부대가 북진 중 전주를 거쳐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를 침공할 것이라는 급조를 접하자 제봉은 진로를 바꾸어 금산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성 밑까지 진격한 제봉 휘하 의병부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병전을 전개했으며 제봉은 이 격전장에서 한치도 물러섬이 없이 진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전세는 갈수록 기울어 둘째 아들 인후와 유팽로, 안영, 김덕홍 등의 막료와 함께 천추의 한을 남긴 채 호국의 영령이 되었다. 비록 많은 희생을 냈지만 금산성 전투야말로 왜군의 호남진격을 저지했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가슴속에 충효와 의리와 민족정기의 횃불을 밝혀 주었다는 점에서 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포충사 주벽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이라 하였다.
2) 고종후
고종후(1554-1593, 40세)는 의병대장 고경명의 큰아들로서 문신이며 왜적에 항거한 의병장이다.
1570년(선조 3년)에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현령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가 전사하자 일단 귀가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이라 칭하였으며, 왜적을 무찌르고 동쪽으로 나아가 영남에 이르렀다. 왜병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지켰다. 진주성이 왜병에게 함락 당할 때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3) 고인후
고인후(1561년~1592년, 32세)는 고종후의 아우인데 임진왜란의 의병장이다.
1577년에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학유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아버지를 따라 종군, 수원의 권율 휘하에 들어가서 행재소로 가려고 했으나 길이 막히자 담양에 집결, 금산전투의 선두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4) 제봉 고경명의 후손들
제봉의 충절의 피는 삼백년을 이어오다가 한말 의병항쟁의 최대 격전장이 된 호남에서 다시 녹천 고광순과 고제량으로 이어졌으니, 이를 우연으로 여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5) 유서석록은 불후의 명작
제봉은 임란의 전화 속에서 이토록 충성스러운 수하 장수들과 수천의 의병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의병장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했으나, 그야말로 진정한 선비 중의 선비로서 역사를 빛낸 유학자이며 시인이었다.
특히, 무등산을 사랑하시어 한국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저로 평가되는 산악기행문 유서석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