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7 땅통 백두대간 1구간(중산리-천왕봉-성삼재) 후기(29회차)--천왕봉 일출
▽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
▽ 지리 1경인 천왕봉 일출
▽ 아침 햇살이 빨갛게 드리운 천왕봉 정상. 멀리 왼쪽부터 노고단, 반야봉, 만복대가 보인다.
천왕봉 정상 바위엔 일월대(日月臺)라는 암각이 세겨져 있다. 일출과 일몰, 달을 본다는 곳이라는 뜻인데...천왕봉 정상 전체 봉우리를 말한다.
▽ 천왕봉에서 바라 본 지리산 주능선..1958년 구례연하반에서 개통
천왕봉 공터에는 3칸 판옥으로 된 성모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 연하봉(1722m)
구례연하반에서 지은 봉우리 이름이다.
연하(煙霞)는 안개와 노을 즉 산수를, 그리고 반(伴)은 짝을 이른다.
즉, 산수지기 혹은 자연의 벗을 뜻하는 이름인 것이다(출처 : 지리산과 구례연하반)
▽ 만추의 세석대피소
▽ 영신봉 운장바위
조선시대 선현들이 지리산을 자주 찾는 코스는 중산리-천왕봉-세석을 거쳐 하동군 화개면 의신을 거쳐 쌍계사로 가는 코스가 가장 많이 다닌 길이였다.
현재도, 영신봉에서 칠선봉으로 가려면 철계단을 많이 타는데..
운장바위쪽과 칠선봉쪽에 험한 바위가 많아, 주능선이 1958년에서야 비로소 개통된 것으로 보인다.
▽ 벽소령대피소 인근 단풍과 주능선길
▽ 카프리 나종대님
오랫만에 지리산에 오니 참 좋았다.
▽ 현재 땅통종주는 약 35% 진행 중
1. 산행일자 : 2019. 10. 27(일)
- 산행거리 : 33km(오룩스 gpx)
- 산행시간 : 15:17(03:30-18:48)
2. 산행장소 : 땅통 백두대간 1구간(중산리-천왕봉-성삼재) / 총 29회차
- 산행코스 : 중산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연화선경-촛대봉-세석대피소-영신봉-벽소령대피소-연화천대피소-토끼봉-삼도봉-노고단-성삼재
3. 누구랑 : 홀로
4. 산행후기
1. 땅통종주가 드디어 백두대간 영취산에 도착했다. '19.4월에 해남 땅끝에서 첫 산행을 시작하여 땅끝기맥, 호남정맥, 금남호남정맥을 탔으며, 전체 거리(1,350km)의 약 35%를 소화했다. 지리산은 백두대간 출발점이다. 지리산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라는 책을 산행 전 읽었다. 이 책은 진주시에 소재한 경상대학교 강정화, 최석기 교수가 쓴 책이다. 조선시대 선현들은 지금처럼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고 변변한 등산화도 없는 처지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유람은 두 가지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나는 천왕봉에 올라 공자의 '태산에 올라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登泰山而小天下)' 의식을 맛보기 위한 것이었고, 하나는 청학동 삼신동 등의 신선 세계를 노니는 것이었다.
2. 10월 26일, 요즘 가을 하늘이 참 맑고 온산에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어, 들뜬 맘으로 배낭을 싸고, 홀로 집을 나선다. 그런데 집을 나설 때 부터 몸이 으실으실 춥다. 광주버스터미널을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는데 젊은 여성이 자켓도 없이 얇은 와이셔츠만 입고 있어 부럽기만 하다. 나는 며칠전부터 완전 겨울옷 모드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13:05분 진주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진주고속터미널에 도착하여, 택시로 진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한다. 진주시내 어디에서든 지리산 주능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꼭 광주시내에서 무등산을 보는 것 같다. 15:50분 시외버스를 타고 원지정류소, 단성, 덕산을 거쳐 오후 5시경 지리산 천왕봉의 초입지인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시골마을을 거쳐 지리산에 가는 것이 정겹다. 차창밖 시골 마을엔 빨간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3. 중산리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중산리탐방안내소 옆 민박집까지 걸어오는데 온 몸에서 식은 땀 범벅이다. 목이 따끔따끔하고 춥고 코가 막힌 것을 보니 몸살 감기다. 민박집 키를 받아 배낭을 방에 놓고서 곰탕 한 그릇 먹고 들어왔는데, 내일 산 탈 걱정이 태산이다. 아내한테 전화를 했더니, 타이레놀을 먹고 푹 자고 나서, 산행하다 힘들면 중간에 하산해서 집에 오라고 한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저녁 8시부터 잠을 청한다. 초저녁부터 잔 잠이라 두 번이나 깬다. 내일 등산을 하려면 잠을 푹 자서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겠기에 핸드폰이나 시계를 보지 않고 억지로 잠을 자서 새벽 3시에 일어난다. 씻고 새벽 3시반에 헤드랜턴을 켜고 산행을 시작한다. 중산리 야영장, 칼바위, 망바위, 법계사를 거쳐 산을 오르는데, 어제 잠을 7시간이나 자서 컨디션은 좋아졌으나 진한 콧물이 나온다.
4. 개선문을 지나는데 빨갛게 동이 튼다. 일출시간에 맞추기 위해 가파른 깔딱고개를 부지런히 올라 천왕봉에 도착했더니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천왕봉 정상에는 일출 등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정신없이 일출 사진을 찍고 등산객이 다 빠지기를 기다려 미리 인터넷에서 출력해간 용지를 보면서 '정상석 사진"을 찍다보니 1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정상석 촬영 구도' 잡는데는 천왕봉에서 우연히 만난 하동군 북천면장님의 도움이 컷다. 감사드린다.
5. 천왕봉부터 노고단까지 25.5km는 지리 주능선이며, 소의 등뼈를 닮았다고 한다. 이 주능선 길을 최초로 개척해서 종주한 이는 1958년 '구례연하반'이라는 구례중 교사모임이었다. <지리산과 구례연하반> 책자에 의하면, 우종수 선생님을 비롯한 구례중 교사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빨치산 공비 및 호랑이 위험이 도사린 지리산을, 1956년부터 낫과 톱으로 주능선 나무를 베어가며 산길을 개척했다. 그리고1958년에 최초로 주능선 길을 연 것이다. 지리산에서 연하천대피소와 연하선경은 그때 구례연하반에서 지은 지명이다. 그렇다면 '지리산' 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책자에 의하면 우리말의 '지리하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래 설명이 길어 아래에 별도의 표로 갈음한다. 작명 요지는 옛날 지리산 자락에서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나긴 지리산을 지리하게 오르내리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순수 한글 이름인데, 후대에서 지리산을 몇 가지 한자이름으로 붙혔고, 지리산(智異山)도 그 중 한가지의 한자 이름이라고 한다.
6. 장터목에서 아침을 먹고 연하선경, 촛대봉, 세석대피소, 칠선봉, 선비샘을 거쳤으며, 벽소령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이 늦어질 것 같아 걸음을 빨리한다. 명선봉, 토끼봉을 지나 힘들게 화개재 계단을 오른다. 힘이 들어 계단 수를 세면서 말이다. 계단수는 551계단이었다. 삼도봉, 노루목을 거쳐 노고단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하다. 헤드랜턴을 켜고, 노고단대피소를 지나 성삼재에 도착하니 저녁 6시 40분이다. 버스 막차는 오후 5시반에 이미 끊겼다. 택시를 불렀더니 요금이 4만원이다. 택시를 기다리는데 마침 순천에 사는 부부가 내려와, 반반씩 부담하기로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순천 부부는 지리산 애호가였고, 구례터미널에 승용차를 파킹해 놓았다고 한다. 구례터미널에 도착하여 광주가는 막차 버스가 8시반임을 확인하고, 인근 식당에서 돼지 두루치기 2인분을 시켜 구례 막걸리와 함께 밥을 맛나게 먹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7. 땅통 백두대간 1구간으로 오늘 지리산 종주를 했다. 몸 상태가 좋치 않아 걱정했는데, 그럭저럭 큰 어려움 없이 마무리한 것 같아 기쁘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신조로 지금까지 계획대로 추진하고 있지만,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갈대처럼.......
지리산 이름의 유래(출처 :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19-22페이지)
1. 현재는 지리산이라 부르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지리산보다 '두류산'을, 선가(仙家)에서는 '방장산'을 더 선호하였고, 한자어로 쓰인 7가지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렇다면 지리산은 왜 이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지리산은 같은 음에 다른 한자음을 붙여 표기한 명칭이 여럿있다. 이는 '지리산'이란 순수 우리 음에 해당 한자를 빌어 사용하는, 곧 음차(音借)한 한자어에 불과하다. 지리산이란 명칭은 뜻(訓)보다는 음에 치중한 순수 토착어임을 알 수 있다.
2. 간혹 '지리산(智異山)'의 한자어를 중심으로 '지혜롭고 기이하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나, 이는 이미 생겨난 명칭의 한자 뜻을 풀이한 것일 뿐, 특별한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본래의 명칭이 한자어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한자어의 뜻으로 유추해내는 방식이 옳으나, 우리말을 음차한 한자어라면 개연성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다만 '지리산'이란 명칭이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의 고운집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그 시원은 꽤나 오래된 듯하다. 최치원의 고운집에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지리산(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3. 그렇다면 우리말 '지리산'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여기에도 여러 설들이 있으나 그중 믿을 만한 것으로는 우리말의 '지리하다'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지리산 주능선 종주는 등정과 하산 길을 합쳐 모두 40km 이상의 높고 낮은 길을 오르내리며 걸어야 하는 장거리이다. 평소 기초체력을 착실히 갖추었다 하더라도 족히 2박 3일은 걸릴 일정이다. 그 길을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이 얼마나 지리한가.
4. 그뿐인가. 주능선 종주가 아니라도 지리산 자락의 그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든, 천왕봉 꼭대기는 손에 잡힐 듯 어디에서도 눈에 보이는데 걸어도 걸어도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가 본 사람이라면, 지리산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그것이 얼마나 지리한 과정인가를 알게 된다. '지리하다'에서 유래한 '지리산' 명칭은 아마도 그 옛날 지리산 자락에서 지리산의 혜택으로 살아가던,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지리산의 그 지리한 길을 오르내리던 지리산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리라는 것이 나름 설득력을 지닌다.
카프리가 걸은 오룩스 지도
33km를 걸었다.
고도표
지리산 주능선 등산로 안내도
지리산 주능선 지도
땅통 백두대간 1구간 산행계획서
1부. 19.10.26(토) 광주버스터미널에서 중산리까지
광주종합버스터미널
13:05 진주행 버스를 타고
진주고속버스 터미널
택시를 타고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 도착
15:50 중산리행 버스를 타고
덕산 산천재를 지나고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
천왕봉을 향해 가는 중산리 익숙한 길
빨갛게 감이 익어가고
천왕봉 가는 길
좌측 3층 건물이 민박할 숙소...요금은 3만원
민박집 1층 거북이 산장 식당
식사 메뉴
이렇게 26(토) 첫날이 지나갑니다.
2부. 19.10.27(일) 중산리에 벽소령까지
10.27(일) 03:30 중산리 산행출발
로타리대피소
개선문
일출1
일출보러 온 등산객으로 인산인해
천왕봉 전체를 통칭해서 일월대라 부르고(출처 :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일출 2
일출이 끝나자, 천왕봉 동북쪽에 있는 조망처로 이동하여 찰칵
아침의 따스한 햇살이 몰려옵니다...감동의 순간입니다.
천왕봉 좌측에 멀리 백운산이 보이고
천왕봉 남쪽 산너울
천왕봉 동쪽 산너울
만고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남명 조식이 산천재에서 지은 시)
산천재에서 천왕봉을 보면 중봉과 천왕봉이 동시에 보인다. 천왕봉과 반야봉 모두 불교 용어다.
남명 조식(1501-1572)
남명은 61세 때 천왕봉이 바라다보이는 덕산으로 이사하여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더욱 깊숙이 은거하였다.
산천이란 주역 대축괘의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남명조식은 1558년 58세 때 합천 삼가 계부당을 출발하여 쌍계사 불일암과 신흥사를 17일 동안 유람하고 유두류록 유람기를 남겼다.
홀로 땅통종주 중인 카프리 나종대님. 북천면장님 촬영
땅통종주란 해남땅끝에서 고성통일전망대까지를 말함.
통일이 되면 백두대간 두만강까지 진행계획임.
19년 6얼부터 사람과산에 매달 연재하며 산행 진행 중
종주 후, 책자도 발간 예정임.
카프리님 얼굴에 아침 햇살이 듬. 하동군 북천면장님이 촬영.
제가 열심히 사진 찍는 모습과 역광에 어울린 모습이 보기 좋아 찍었다고 함.
아침 햇살에 산너울 촬영중인 카프리님. 북천면장님이 촬영
촬영지는 천왕봉 동쪽 바위
지리 주능선
통천문
제석봉
정상이 평평하여 옛날에 제석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
장터목 대피소
옛날에 남쪽의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북쪽의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교역을 하던 장터
연화봉 가는 길
가운데 보이는 산은 하동 금오산
연화봉에서 카프리님..구름이 곱다
연하선경 가는 길
연하란 한가로운 자연의 풍경의 의미.
촛대봉에서 바라 본 천왕봉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것 같아서 촛대봉이라 함.
세석대피소와 반야봉
역광의 촛대봉
사진 작가일수록 역광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목가적인 세석대피소1
세석평전이란 잔돌이 많은 밭의 뜻. 우리말로는 세석고원
세석대피소2
세석 갈림길에서 까마귀님(좌측)을 만나...셀카 샷..반갑습니다.
머라이온(J3무돌이님)께 안부 전해주라고 하네요.
세석대피소
영신봉에서 바라 본 촛대봉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분기점. 영신봉 계단은 175개
영신봉에서 바라 본 천왕봉
영신봉에서 바라 본 반야봉
운장바위
지리의 주능선에서 바라보면 영신봉 정상에 불룩 혹처럼 튀어나온 암봉이 항상 눈에 띈다.
그 우람한 바위가 지난날 비결장이들이 불러왔던 운장바위이다.
칠선봉
암릉이 마치 일곱선녀가 노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칠선봉이라 함.
지리산 천왕봉
선비샘 전망대가 새로 생겼고
선비샘 전망대에서 바라 본 대성골 단풍
대성골 좌측은 남부능선, 멀리는 광양 백운산..
선비샘 물이 약하게 나와...패스
덕평봉 선비샘
여기는 작은새골 들머리
작은 새골 들머리에서 바라 본 산너울(앞부터 팔백능선,불무장등능선, 왕시루봉능선)
오공능선 들머리인 공터
벽소령은 저지대라 아직 단풍이 떨어지지 않고
3부. 19.10.27(일) 벽소령에서 성삼재까지
새로 보수한 벽소령대피소
여기서 햇반으로 점심을 먹고
달빛이 너무 맑아서 푸르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 벽소명월
형제봉
근접하여 찍은 형제봉
지리산녀의 유혹을 형제가 등을 맞대고 견뎠다는 전설이 깃든 곳
명선봉
삼정능선으로 갈라지는 삼각고지
연하천대피소
1년에 70일 정도 맑고 계속 연하(煙霞)로 해를 가리고 있어 연하천이라 함(연기연, 놀하)
토끼봉 헬기장
토끼봉
반야봉을 기점으로 24방위의 정동에 해당하는 묘방이라 하여 묘봉으로 부름(토끼묘)
화개재
삼도봉 오르는 화개재 계단(551개)
천천히 계단을 세면서 오르고
예전에 날라리봉이라고 부르던 삼도봉
■ 삼도봉 일화(구례 연하반)
1962년 종주등반 때, 지도를 만들기 위해 각 봉우리마다 봉명을 표기하여 산행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삼도봉은 그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우종수 총무가 이 봉우리를 어떻게 부르면 좋겠느냐고 회원들에게 물었다. 회원 한 명이 봉우리 앞에 바위가 '나라니'(나란히의 사투리) 서 있으니 '나라니봉'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다른 회원들에게 재차 물었으나 좋은 봉명이 없었기에 지도에 일단 그렇게 표기를 해 놓았다.
그런데 종주등반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정리를 하는데, 지도에 습기가 차고 잉크가 번져 그 글자가 '날라리'로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 봉우리를 '날나리봉'이라고 불렀는데, 한국 산악사진의 대가인 김근원 선생님이 우종수 총무에게 연하반에서 지은 이름이 모두 좋은데 '날라리봉'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후에 남원산악회 이병채 씨와 상의를 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인 이 봉우리의 이름을 '삼도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흉물스런 삼도봉 쇳덩이
반야봉
불무장등 능선....
노루목
노루목 전망바위
노루목은 봉우리 모양이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과 같아서 노루목이라 함.
노루 머리와 같은가요?
노루목에서 바라 본....노고단 정상부터 노루목끼지 이어진 주능선 산너울
임걸령 샘터
초목두목 임걸령의 이름에서 유래
피아골 삼거리
돼지령
멧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파먹는 모습이 보여서 붙여진 이름
큰 나무가 쓰려졌네요...태풍 영향인 듯
왕시루봉 능선
노고단 정상에 해가 넘어갔고
노고단 고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묘의 높임말로 노고와 제사를 올렸던 성단의 의미로 노고단으로 불림
노고단 돌탑
노고단 대피소
성삼재 주차장
성삼재란 마한의 한 부족인 성다른 장수 3명이지켰다 하여 붙혀진 이름
택시를 불러 순천의 부부 산님과 함께 이동
배가 고파 버스 타기 전, 돼지 두루치기 2인분을 구례 쌀먹걸리와 함께 맛있게 먹고..
저녁 8시반 버스를 타고 광주에 갑니다.
산행 참고 자료
지리산 주변 산경표
산을 타다보니 낙남정맥, 호남정맥, 백두대간 우듬지 모두 탔지만...기억이 가물가물
강정화, 최석기님은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책 서문)
이 책의 서문에는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지리산이 빼어난 자연경관을 지녔으나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다면, 지리산은 그저 우리나라에 널려 있는 다른 산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지리산이 지리산다운 것은 뛰어난 인물들이 지리산을 찾아 올랐고, 또 아름다운 글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역사 속 아름다운 인물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산기(遊山記)가 많다. 모두 100여 편이 넘는다.
우리나라 명산 가운데에는 금강산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구례연하반님들...지리산 주능선 개척하느라 수고하셨어요..
구례연하반(지리산악회)의 족적 3가지
1) 산악단체로서 지리산 종주 등반로 개척
2) 산림 도벌을 막기 위해 지리산 국립공원화 추진(1967년 1호 국립공원 지정)
3) 지리산 자연보호활동
연하반 우종수 총무는 1958년 구례중학교 교사를 퇴임하고 지리산 등반로 개척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리산 지킴이 우종수님(93)은 2014년 3월 23일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님은 갔지만, 님의 향기는 책으로, 인터넷으로 후세에게 전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