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가거도
(2011.3.30 꽃삽님이 나사모 정기산행방에 올린 산행후기다)
(쓴 이는 여성으로, 아마 작가일 것이다. 같이 산행했지만 처음 온 분이라 잘 모른다)
지독한 멀미였다.
배 멀미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을 잘 알면서도 가거도행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내 자신이 한순간 어찌나 원망스러웠던지....
그렇게 구토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과 메스꺼움을 안고
휘청거리며 첫 발을 내디딘 가거도는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한 소녀처럼 다가왔다.
체구가 작고 수줍지만 당차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끼룩거리며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의 한가로움,
소박하지만 경계의 날을 세우지 않고 낯선 이들에게도 곁을 내어줄 것 같은
다정함을 얼굴에 가득 담은 사람들,
돌담 밑에서 작은 풀꽃들을 건들이며 웃고 있는 봄볕,
한가롭게 꼬리를 흔들며 봄바람을 쫒고 있는 강아지들,
거친 통발에 몸을 길다랗게 누이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미역들,
머리를 거침없이 떼어버린 작은 생선들은 통발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누워
따사로운 봄볕에 몸을 말리고 있는데, 가끔씩 몸을 뒤척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멀미를 채 떨치지 못한 채 아직도 몽롱한 시야속에 갇힌
나의 어지럼증 때문이었을까...
깨금발을 하고서 들여다본 돌담 안 아주 작은 터에는 화초 대신
시금치며, 파, 상치가 옹기종기 모여 자라고 있었다.
일상의 터가 넓은 육지에서라면 그 터는 색색의 화초들이
서로에게 뒤질세라 단장을 하고서 스스로를 뽐내는 무대가 되었겠지만
기르는 식물의 터가 넉넉지 않은 그 곳에선 그 작은 터마저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공 들여 한결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독실산을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 형형색색의 봄들.......
산등성이로 쏟아지는 봄볕을 등자락에 업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랏빛 제비꽃,
지나는 길손들의 다정한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이파리를 안쪽으로
둥그렇게 말고서 쫑긋거리고 있는 하얀 노루귀꽃,
간밤에 내려다 놀다 미처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위틈에 숨어
누군가에게 들킬새라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아기별꽃 한 송이,
먼 길 떠난 님을 기다리다 죽어간 여인의 슬픔이 금새라도
붉디 붉은 핏방울처럼 떨어질 것 같은 동백꽃.......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긴 시간들을 이 꽃 하나를 피워내기 위해서
겨우내 언 발을 동동거리며 어둠속에서 쉼 없이 꼼지락거렸을 그들의부지런함을 생각하면
그들 앞에 새삼 무릎이라고 꿇고
기특함의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육지에서의 봄이 그렇듯 가거도에서도 봄도 확실히 들떠 있었다.
독실산을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누군가가 내 등뒤에 서서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발길을 앞으로 내딛는게 힘겨워진다.
가끔씩 널찍한 바위에 몸을 부리고, 전망 좋은 곳을 찾아 거친 숨결을 눕히고,
그리고 어느 즈음 만나게 되는 백년등대......
그 곳은 문명의 이기가 아주 닿지 않은 곳이었으면,
세상의 시름과는 등을 진 늙으수레한 등대지기가 있었으면......했는데
그 바램은 무색하게도 등대를 업고 있는 언덕아래 바다로 떨어져버리고야 말았다.
이곳이 등대가 아닌 색이 바래버린 우체통을 가지고 있는 낡은 우체국이었으면.....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색바랜 우체통이 있었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의 수줍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옛사람에게 두근거리는 편지라도 쓰지 않았을까...
나라면 아마도 그대로 퍼질러 앉아 수신인 없는 편지라도 줄기차게 써내려 갔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곳은 바닷가 우체국이 아닌 등대였다.
아주 깔끔한 양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가진......
또 걷고, 걷고......하산길,
그토록 원했던 해넘이는 결국 놓치고야 말았다.
좀 더 나이의 숫자가 작았던 시절엔 해 뜨는 것에 열중했었는데
어느 순간 해넘이에 더 많은 마음을 싣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이제는 내가 선 자리가 내 삶의 여정을 어떻게 잘 마무리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방향 쪽에 조금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리라.
새벽 다섯 시.
요란스럽게 울리는 모닝콜을 잠재우고 일출을 보기 위해 부산스럽게
하늘공원을 향하는데 바다는 나보다 더 먼저 깨어 있었다.
새벽 바다, 새벽 하늘,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우리가 하늘공원에 미처 오르기도 전에 바다의 자궁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아침 해는 해산하고 있었다.
내가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아침 해의 해산을 지켜보고 있을 때
저 먼 바다 어느 곳에서의 누군가는 또한 바다의 자궁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숨어드는 저녁 해를 보고 있으리라.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해산과 죽음을 지켜보는 눈길은 그저 경건하고 숙연할 터..
문명의 때꼽떼기가 끼지 않는 섬, 그 곳이 가거도라고.......
이 곳에서라면 문명의 때꼽떼기만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이기의 때꼽떼기마저도 충분히 해풍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 속으로 풍덩......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배 멀미가 잊어질 즈음,
배 멀미 같은 것은 시치미를 뚝 떼버리고 가거도에 다시 오리라.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넘이를 봐야겠다.
그때라면 끊임없이 잉태되는 욕심과 그릇된 내 에고도 매운 해풍에
날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덧니 : 산행대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환장하게 멀미를 하던 사람'이 이번 산행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썼는데
주책없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