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7권) 옛길박물관 옛길편
(2020.5.11 고향친구와 땅통 백두대간 이화령-하늘재 구간을 다녀와서...산행후기를 쓰기 위해 본 책을 읽는다)
■ 책을 읽은 배경 : 영남대로 문경새재 구간 산행후기를 쓰기 위해서
- 본 책은 문경새재 옛길박물관에서 쓴 책임.
- 2014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
■ 개 요
1. 읽은 날짜 : 2020. 5. 13(수) - 5. 14(목)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 : 옛길박물관 / 대원사 / 312
- 저자 : 김하돈(시인,환경운동가), 김남석(작가), 박광덕(시인), 박지숙(동화작가)
3. 제목 : 예길박물관 옛길편
-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
4. 목차
1. 우리나라의 산하
2. 우리나라의 옛지도
3. 우리나라의 옛길
4. 옛길따라 사연따라
■ 저자
- 김하돈 : 시인, 환경운동가
- 김남석 : 작가
- 박광덕 : 시인
- 박지숙 : 동화작가
■ 책을 읽은 소감
- 이번에는 급히 산행 일정을 잡느라 책을 볼 수 없었는데, 다녀와서 책을 보니 선조의 고운 숨결이 느껴진다.
-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 이번 코스를 5번 정도 걸었다. 928봉 지나 문경새재 길을 보니, 왜 문경새재로 조선시대에 길을 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늘재 길은 상주를 지나 오자면 뺑 돌아서 넘는 고갯길이어서 직진의 문경새재를 뚫은 것 같다.
- 이번에는 차로 이화령-하늘재 구간을 두 번 다니다 보니, 산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 많이 보였다.
- 향후 성주봉 암벽 코스를 올라 운달산, 대미산까지 산행을 하고 싶다.
■ 밑줄을 그은 글
1-1.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글자 그대로, 산은 그 스스로 물을 나눈다. 바꾸어 말하면 물을 나누는 것은 모두 산이다라는 뜻이다. 아무리 작은 언덕이라도 물을 나누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로 따진다. 논둑, 밭둑도 물론 산이다. 비가 올 때 빗물이 흐르는 것은 땅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평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산이다.
1-2. 백두대간
백두대간을 가장 쉽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며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동해와 서해로 갈라 주는 산줄기'이다. 백두대간을 제외한 나머지 14개 산줄기는 정맥, 정간이라 부르며 우리나라 10대 강들의 경계선을 이루는 산줄기이다.
2. 산경표
산경표(山經表)에 보면 한국의 산줄기는 1개 대간, 1개 정간, 13개 정맥의 체계로 되어 있다. 산경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선의 굵기 차이로 산맥의 규모를 표시했는데 제일 굵은 것은 대간, 두 번째는 정맥, 세 번째는 지맥, 기타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나타냈다. 정맥과 정간의 차이는 산줄기를 따라 큰 강이 동반되면 정맥, 강이 없으면 정간이 된다. 유일한 정간은 장백정간이다.
3-1.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 계립형 '하늘재'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늘재는 서기 156년,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에 개통된 '계립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2. 죽령
하늘재를 개척한 아달라이사금은 내친 김에 2년 후 서기 158년,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가로막는 소백산 자락에 또 하나의 군사도로 '죽령'을 개척했다.
3-3. 추풍령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 경계에 있는 고개다. 높이 221m, 백두대간 상의 고개다.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영남 지방과 중부 지방을 넘나드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3-4. 여럿이 어울려 넘는 고개 '이우릿재'
이화령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길이 험하고 산짐승의 피해가 두려워 여럿이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불렸던 것 같다. 이우릿재의 정확한 어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화현(伊火峴)으로 나온다.
3-5. 조선 최고의 옛길 '문경새재'
태종 14년(1414년), 오늘날 문경새재 계곡을 따라 문경새재 제3관 조령관이 있는 650m의 고갯마루를 개척해 문경에서 괴산, 연풍을 잇는 새로운 영남대로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문경새재가 개통됨으로써 동래에서 한양까지 죽령 15일, 추풍령 16일, 문경새재는 14일로 하루에서 이틀이 빨라졌다. 이때부터 문경새재는 조선 600년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영남대로의 관도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문경새재보다 산이 낮고 산로가 비교적 평탄한 이화령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가 개통되었다. 그리하여 인적이 끊긴 문경새재는 600년간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묻어 둔 채 조선의 옛길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문경새재의 유래
문경새재를 한자어로 '조령(鳥嶺)'이라고 하는데, 이는 '새들도 쉬어 넘는 힘든 고개'라는 뜻이다. 이 유래는 650m의 가장 높은 곳에 길을 뚫어 새 길을 낸 것과도 연관이 있다. 또 억새풀이 많아 그걸 헤치고 길을 냈다고 해서 '새'라는 말이 부여되었다 한다. 한편, '새로운 길을 냈다.'는 뜻에서 '새'라는 뜻이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이우릿재(이화령)와 하늘재 사이에 문경새재가 있는데, 두 고갯길의 '사이 고개'가 '새재'여서 '새재'라는 말이 '사이'라는 말로 쓰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5. 천혜의 관방 시설이 자리한 문경새재
문경새재에는 관문이 세 개나 세워져 있다. 그것은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이다. 이들은 산세의 지형을 이용해 돌로 튼튼하게 쌓은 석성이다. 튼튼하고 견고하게 쌓은 이 관방 시설들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조총 한번 쏘지 않고 조선의 국력을 조롱하며 지나간 그 길목에 훗날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졌다.
문경새재에 관방 시설을 세운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 유성룡의 건의에 의해서다. 유성룡은 고향 안동을 오갈 때 문경새재를 자주 넘나들면서 지형지세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문경새재 관방 시설의 설치는 신충원에 의해 선조 27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왕들은 문경새재의 관방 시설에 대해 증축의 필요성을 감지하고는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우리 옛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문경새재는 오랜 동안 군사 요충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늘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오가는 길손이 많은 문경새재에는 도적 떼가 없었다. 그래서 안전한 문경새재를 넘나드는 길손들이 더 늘어났고, 영남대로의 관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6. 인재 양성의 등용문 '과거'
조선 시대 과거에 급제한 응시자의 평균 연령이 문과의 경우 35세였다. 소과 2단계(초시,복시)와 대과 3단계(초시,복시,전시) 등 총 5단계의 과거시험을 거쳐 선발되는 인원은 33명이었다. 그런데 이 과거에 응시한 인원은 6만여 명에 달했으니, 평균 2천 대 1의 경쟁률이었다.
7.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고집한 이유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문경새재나 추풍령, 죽령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를 고집했다. '문경(聞慶)'이라는 뜻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것이고,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었기에 마음의 평안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죽령과 추풍령을 넘기 싫어한 이유는 지명의 어감 때문이었다. 죽령을 넘으면 과거시험에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행 경로상 부득이 추풍령 앞에 이르게 되면 옆쪽의 '괘방령(掛榜嶺)'을 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