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통영] 한산도 망산 대봉산 등산지도 모음
1. 통영 한산도 망산(이순신 역사길)
- 일자/누구랑 : 2016. 3. 27(일) 나사모산우회
- 코스 : 봉암리(들머리)-대봉산-추봉교-망산-선착장-제승당-선착장(날머리)
- 산행컨셉 : 섬산행 + 이순신역사길
- 산행거리 : 14km(트랭글) * 평지길도 많음
(한산도 개요)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최초로 자리잡은 곳이고 앞바다 한산해역은 세계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지명(地名)치고 이충무공과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공의 호국혼이 지금도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섬이다. 그래서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지만,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보다「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충무공의 우국심정이 담긴 시조로 더 잘 알려진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한산도 제승당은 이충무공 사적지로 유명하지만 한산만의 정경 또한, 한폭의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 수려하여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관광공사-
(추봉도)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추봉도는 한산도 서남쪽에 이웃한 섬이다. 2007년 추봉교가 놓이면서 한산도와 연도교로 오갈 수 있게 됐다. ‘추봉도’라는 이름은 그가 품은 4개의 마을 중 가장 큰 추원마을과 봉암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통영이라는 지명)
한산도는 이순신 장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한반도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 충무공은 이곳 통영 한산도 제승당에서 난중일기의 2/3를 써내려갔다. 나아가 한산도를 품은 ‘통영’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한몫 거든다. 한산대첩 후인 1593년(선조 26년) 한산도에 충청·전라·경상의 3도 통제영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통영’이라 부르게 됐기 때문이다.
1872년 통영지도
(한산대첩의 학익진)
잠시 한산대첩을 살펴보자. 때는 1592년(선조25년), 통영과 거제 사이 좁은 물길 견내량에 왜선 70여 척이 정박한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공격하다 도망가는 것처럼 꾸며 그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나오도록 유인한다. 추격해오는 왜군들이 한산도 앞바다로 나오자 충무공은 반격명령을 내린다. 이때 쓰인 전법이 그 유명한 ‘학익진’이다. 이름 그대로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을 치고 적을 공격하는 전술로 고도의 기술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결과는 대승리. 한산대첩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 해상권을 장악한다.
(일본은 조총과 칼을 쓰는 근거리 전투에 능했던 방면, 조선은 근접전을 피해서 멀리서 대포를 싸서 적선을 침몰시켰다)
(학익진이란, 적의 배를 둘러싸서 대포로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 전술이다)
(제승당)
충무공 이순신, 임진왜란으로 신음하던 백성과 나라를 구한 장수. 제승당(사적 113호)은 한산대첩 대승리한 이듬해 1593년 세워져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참패로 소실되기 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다. 이후 1739년(영조 15년)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며 유허비를 세우고 1979년 한산대첩비를 건립하는 등 확장·보수를 거듭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경내에는 제승당을 비롯해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 통제사 조경이 세운 유허비, 충무공이 활을 쏘던 한산정, 적의 동정을 살피던 수루 등이 자리한다
제승당 경내를 돌아본 뒤 수루에 오른다. 그가 지은 시 한수 읊어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TIP. 통영↔한산도 배편
통영여객선터미널(1666-0960, 055-645-3717)에서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출항. 성수기 증항. 날씨와 여객수에 따라 배편에 변동이 있으니 반드시 사전에 확인하자. 한산도에서 통영항으로 나오는 배는 매일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항. 30분 소요. 왕복요금 성인 1만1000원, 청소년 1만원, 소아 5500원. 차량 선적 요금 별도, 왕복 소형차 2만400원, 중형차 2만8800원, 승합차 3만6000원. 인터넷 예매는 가보고 싶은 섬(http://island.haewoon.co.kr/)에서 가능.
(한산도 망산 293.5m)
통영시 한산도의 한산면 두억리에 위치한 망산(293.5m)은 섬 지역의 등산로라는 의미와 이충무공 유적지가 산재하고 있어 등산과 유적 탐사를 겸할 수 있는 곳이다. 산정에 오르면 동·서·남 으로 점점이 떠있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섬 뿐만 아니라 한산대첩 구국의 현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망산 등산로의 특징은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볼거리와 먹을거리 제공이 쉬우며 전국 최고의 송림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 진린이 본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평가 중 가장 정확하고 감동적인 평가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도독으로 조선에 온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적혀있는 글입니다.
"황제폐하, 이 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 또한 장수로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를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유필화 저 <역사에서 리더를 만나다>에서 발췌-
(임진왜란과 이순신)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첫 발을 디딘 왜군은 이틀 만에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북상한다. 불과 20일 만에 한양(서울)도 함락되고, 6월에는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했다. 한마디로 파죽지세.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천천히 걸어가도 20여 일 걸린다. 조선의 군대는 왜군의 기세에 눌려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혼비백산 사라진 기막힌 상황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식량과 군수물자 등 더 이상의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육군이 지리멸렬하면서 연전연패하는 반면, 수군은 연전연승하면서 왜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 왜군의 진격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수군의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그는 풍전등화의 조선을 살린 구세주였다.
이순신과 한산대첩, 임진왜란의 대세를 조선으로 바꾼 최대의 인물이고 최대 전환기적 사건이다. 한산대첩은 행주대첩·진주성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한산대첩은 기원 전 480년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의 칼레(Calais)해전, 1805년 영국 넬슨의 트라팔가(Trapalgar)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에 꼽힐 정도로 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