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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관련 수집자료

카프리2 2016. 9. 7. 17:34

1. 김정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는 조선시대 가장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가장 많은 지리지를 편찬한 지리학자이다.

일제시대부터 ‘김정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다. 그리고 연구가 깊어지면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란 3대 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제작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김정호는 평생 국토정보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 매진한 진정한 학자이자 출판인이다.

[활동사항]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김정호의 업적을 시대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는 『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 3책(경기·강원·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대신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생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록을 모두 합해도 현재의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다. 이에 따라 김정호가 황해도 토산 출신이라든지, 도성 숭례문 밖의 만리재나 약현 부근에 살았다는 등의 일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의 작품 대다수가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렇게까지 기록이 없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발달한 조선에서 가계 기록조차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양반은 아니며 중인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들 중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기록한 유재건의『이향견문록』에 김정호의 전기가 실렸다는 점, 『지구전후도』,『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민의 장인 출신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뛰어난 수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지 않은 것은 그가 평민이었기 때문이며, 이는 전통시대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懷)함”이란 글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1834년(순조 34)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懷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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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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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삶터의 모습 고지도』(오상학, 국립중앙박물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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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산자 김정호 기념사업 자료집』(국립지리원, 2001)
  • 『한국의 고지도 발달사』(이상태, 혜안, 1999)
  • 「『청구도』이본 4개 유형의 지도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 연구」(이기봉, 『한국고지도연구』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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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분첩식 대축척 전국지도의 제작과 〈조선도〉」(장상훈, 『문화역사지리』2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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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여지도 연구의 쟁점과 과제」(배우성, 『한국과학사학회지』 28(1), 2007)
  • 「우리나라 고지도의 연구 동향과 과제」(김기혁, 『한국지역지리학회지』13(3), 2007)
  • 「김정호의 『동여도』제작 시기에 대한 일고찰」(이기봉, 『문화역사지리』17(3), 2005)
  •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제작과 그 의의」(오상학,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
  •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지 편찬과 그 의의」(양보경, 『고산자 기념사업 연구 용역 논문집』, 2001)

 

 

 

 

1-1. 김정호(이이화 인물한국사)

중인 신분으로 지리학에 밝아

지난날의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지나치게 무시해왔다. 과학기술은 생활의 지혜에서 이룩된 것이요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는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인 덕목, 곧 충효나 예의, 정절 따위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했다.

이것은 인간답게 살고 질서를 잡는 데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나 윤리교육에 너무 치중하면 권위주의로 흐르거나 인간의 지혜가 균형감각을 잃어 자칫 창의성이 결여되고 개척정신이 침체된다.

조선시대는 이런 인성교육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과학기술은 천업 또는 천직으로 무시해 제대로 발전을 못했다. 그리고 한때 훌륭한 창조적 발명이 있었더라도 지속적인 개량 · 발전을 기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선인들은 이 일에 종사하며 훌륭한 발명을 해내고 발전시켰다.

고산자의 내력과 교우관계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6)는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과학적인 태도와 방법으로 우리나라 지도 작성에 평생을 바쳐 완성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자기희생적인 그의 정열에 대한 사회적인 뒷받침은커녕 국가에서는 도리어 견제하거나 푸대접하기만 했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그의 높은 뜻을 알고 도와주고 끌어주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물론, 가계나 태어난 해, 자손들에 대해서조차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지도나 지리에 관한 책 외에는 입으로 떠도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본관은 청도로 호는 고산자인데, 본래 황해도에서 태어나 서울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황해도 출신이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으며, 서울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질 뿐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보면, 그는 재능과 기예를 지녔고 지리학에 밝았다고 한다.

순조 연간의 실학자요 철학자인 최한기가 〈청구도〉의 내력을 알리는 글을 쓴 것으로 보아, 최한기와 친분이 있으며 최한기에게서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단편적으로나마 그와 사귄 주변인물을 통해 그의 삶을 알아보기로 한다.

실학시대의 뒤를 이은 19세기 중엽은 중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중인들은 무엇보다 시사(詩社)라는 이름을 빌려 문학 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예전 중인들은 천문관, 의원, 화원 등 잡직의 벼슬을 맡아왔는데, 이 시기에 들어 양반 선비들이 누리던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반경을 넓히려 했다. 농민들은 민란이라는 방법으로 부정한 지배세력에 맞선 데 반해, 이들은 온건한 문학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문벌정치를 이룩한 지배세력이 정치투쟁이 아닌 이들의 운동을 방관했고 양반 출신 선비들이 때때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김정호도 중인이었고 중인 문사들과 자연스레 어울렸으나 문학인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문 지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다른 중인들과 교류하면서 사귄 인사들의 도움이 뒤따랐다. 그러면 그의 동료들을 알아보자.

먼저 최성환(崔瑆煥)을 떠올릴 수 있다. 최성환은 중인으로서 시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는 많은 벼슬아치들과도 친분을 갖고 있었다.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을 써서 1775년에 펴낸 바 있었다. 이 책은 선비들은 작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서자로서 규장각 검서로 발탁되었으나 양반 출신 선비들과 같은 대우를 해주지 않는 풍토를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이후 최성환은 〈사소절〉을 다시 찍어 배포했다.

그런데 중인들과 어울리던 최한기는 다시 찍은 이 책을 들고 충주에 사는 이규경(李圭景)을 찾아갔다. 이규경은 이덕무의 손자로, 당시 충주에서 저술에 몰두하던 학자였다. 이렇게 해 최성환, 최한기, 이규경은 자연스레 뜻을 맞추어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최성환은 세도가인 박종보의 집 활자를 빌려 책을 찍기도 했다. 박종보는 순조의 생모와 오누이 사이로 출세를 거듭해 1806년에는 호조판서로 재직하면서 비변사 제조를 겸직했다. 박종보는 최성환을 천문학자요 과학자인 원로대신 남병철(南秉哲)에게 소개시켰고 남병철은 다시 최성환을 박지원의 손자인 명신 박규수(朴珪壽)와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 그리고 여러 판서를 거친 고관인 신헌(申櫶)을 연결시켜 주었다.

최성환은 이를 다시 김정호에게 끈을 달아준 것이다. 그런데 이 복잡한 인맥을 거꾸로 짚어보면 김정호는 최성환, 남병철, 신헌으로 이어진다(이 인맥 관계는 서울시립대 교수 배우성의 견해를 참고하라).

특히 신헌의 주선으로 김정호는 비변사 소장의 관찬 지도와 중국 지도를 열람하거나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변사는 모든 대신들이 외침에 대비해 회의해 결정하는 군국대사를 맡은 기구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많은 지도가 보관되어 있었다.

최성환과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작성하기에 앞서, 뜻을 맞추어 함께 지리서 〈여도비지(輿圖備志)〉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지도 작성방법으로 사용한 천문학상의 좌표를 뒤에 그대로 사용했다.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다

김정호는 많은 지리서와 지도를 열람해 지식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청구도〉를 만들었다. 최한기는 〈청구도〉의 내력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의 벗 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지리책을 읽고 몸소 전국을 누비며 모든 지도 작성법의 좋고 나쁜 점을 살폈다. 그리고 한가할 때에 사색을 더해 간편한 집람식(輯覽式, 지도를 부분적으로 작성해서 이용하기 좋게 펼쳐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보면 그는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 지도 작성에 뜻을 두었으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지난날의 지도와 책을 모두 터득해 더 정확하고 바른 지도를 만들기에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스스로 집람식을 발견해 자신이 만든 지도에 이용했음도 알 수 있다.

김정호 이전에 정상기(鄭尙驥)라는 지리학자가 있었다. 정상기는 성호 이익과 친구 사이였는데 종래의 지도가 부정확하고 실생활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늘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실학자 중에서도 특이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 〈동국전도(東國全圖)〉와 〈도별분도(道別分道)〉를 완성했다. 이것은 종래의 단점들을 보완해 땅의 넓고 좁음, 멀고 가까움을 표시한 획기적인 지도였다.

그러나 김정호의 눈에 비친 이 지도 역시 매우 부정확했다. 그리하여 그는 몸소 곳곳을 누볐다. 백두산 · 제주도는 물론 작은 산과 작은 섬까지 실제로 답사하며 하나하나 그려 첫 번째로 완성한 것이 〈청구도〉이다. 이는 1834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지도이다. 그는 이 지도를 그리면서 경위선표(經緯線表)를 사용했고 여기에 역사적 경계까지 첨부해 역사 지도도 겸하게 했다. 그리고 각 고을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 산 · 강 · 섬 그리고 나루 · 봉수 · 성곽의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표시했다.

이것을 완성한 뒤에 착수한 것이 오늘날 말하는 인문지리서의 편찬이다. 다시 말해서 〈청구도〉가 지니고 있는 부족함, 곧 실생활에 필요한 여러 설명을 덧붙이려 한 것이다. 그는 〈청구도〉에서 다 표시하지 못한 산 · 강 · 도로 · 제방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새로이 보태어 달았다. 종래에 전해오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을 참고하면서 실제와 다른 부분, 빠진 중요한 부분들을 모두 바로잡거나 고쳤다. 그리고 이것을 《대동지지(大東地志)》라 했는데 무려 3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다.

불후의 명작 〈대동여지도〉를 완성하다

다음으로 그가 착수한 것이 〈대동여지도〉이다. 이것은 〈청구도〉가 지니고 있는 결점을 보충한 면도 있으나 각 지역과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총도(總圖)의 성질을 띤 것이다. 이것은 스물두 장의 첩(帖)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하나하나 붙이면 그대로 우리나라 전도가 된다. 연이어 붙인 서첩(書帖)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 같다.

대동여지전도

1861년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제작한 우리나라 전도로 알려져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앞에는 ‘지금의 임금 12년 신유’(1862년 철종 12)라고 쓰고 〈대동여지도〉라는 표제를 큰 글씨로 새겼고 끝에 ‘고산자 교간(校刊)’이라 부기했다. 다음 첫 장에는 각 첩의 지명 위치를 표시하는 칸을 만들어 제시하고 첫 첩에는 두만강 아래 지역의 지도를 게재했다. 이어 게재한 지도표(地圖標)에는 지도에 표시하는 표를 제시했는데, 영아(營衙) · 읍치(邑治) · 성지(城池) · 진보(鎭堡) · 역참(驛站) · 창고(倉庫) · 목소(牧所) · 봉수(烽燧) · 능침(陵寢) · 방리(坊里) · 고현(古縣) · 고진보(古鎭堡) · 고산성(古山城) · 도로(道路) 등 14개이다. 이 표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역사 · 인문 · 자연 · 지리가 모두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어 수록한 〈지도유설(地圖類說)〉에는 중국에서 여러 지도 작성자와 병법가들이 지도의 중요성을 말한 내용을 요약해 설명했다. 이는 그가 중국의 모든 지도책을 보았음을 증명해준다. 특히 마지막 〈방여기요(方輿紀要)〉에서는 지도의 효율과 용도를 설명하고 마지막 그 내용에 따라 이렇게 결론지었다.

천자는 안으로는 만국을 어루만지고 밖으로는 사이(四夷, 주변 나라)에 군림하니 가지와 줄기의 강하고 약한 구분, 변방과 중심이 무겁고 가벼운 형세를 몰라서는 안 된다. 재상은 천자를 도와 나라를 경영하니 무릇 변방의 이롭고 병이 되는 곳, 군사를 조치하는 방법 등을 몰라서는 안 된다. 모든 중앙 기구는 천자를 위해 백성의 일을 종합해 다스리니 재부의 나옴과 군국의 소용되는 모든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감사와 수령은 천자에게서 민사를 기탁받았으니, 강역의 뻗고 섞임과 산택의 솟음과 고임 그리고 무릇 갈이하고 뽕 심을 때의 수리의 이로움, 민정과 풍속의 다스림을 모두 몰라서는 안 된다. 사민이 일을 하려 왕래할 적에 무릇 수륙의 험하고 평탄함과 나가고 피하는 실상을 모두 몰라서는 안 된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를 이용해 외침이나 강폭의 무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를 가지고 나라를 경영하고 인민을 다스리는 방책을 우리의 서책에서 취해야 한다.

〈방여기요〉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줄인 이름인데 청나라 고조우가 편찬한 지지이다. 여기에는 여러 역사책에 나온 역대 주성(州城)의 형세, 산천과 들판의 구분과 험이, 지명의 변천 등을 망라해 담았다. 아마 김정호는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참고하고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지도가 단순한 용도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여러 정책과 방안을 찾을 수 있는 길잡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견해를 쓰지 않고 중국 지리서의 말을 인용한 것일까? 그는 관찬의 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이 만든 탓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 뒤 우리나라의 〈문헌비고(文獻備考)〉 등 전적에 표시된 거리를 이(里)로 표시했는데, 끝에 압록강 연안 2,034리, 두만강 연안 844리라고 해 작은 단위까지 적고 있다. 그러고 나서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서울 지도)〉와 서울에 배치된 관서 · 방리 · 사원 · 산천의 이름을 표시했다.

이것을 모두 맞붙여놓으면 도로와 산과 들과 강이 연결되고 각 지역의 위치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곧 오늘날의 우리나라 전도와 거의 같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이 지도만 펼쳐놓으면 여행은 물론 중앙의 행정, 군대의 작전계획 등에 일목요연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지도 또는 지리서 제작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곧 첫째 군사 목적에 필요하며, 둘째 조세 · 농사 등 일반정책에 이용할 수 있고, 셋째 지방의 풍속 · 민정을 잘 살필 수 있다.

1862년에 이 지도를 판각해냈으나 나라에서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벼슬아치들은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역정과 죽음의 의문

김정호는 서울 동대문 밖 용두동 또는 마포 공덕리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예전의 용두동은 백정 같은 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요, 예전의 공덕리는 장사치나 하층민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니 생업을 버리고 살았던 그가 가난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딸이 이 지도 작업을 힘껏 도왔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렇게 생계가 말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그는 손수 제작한 지도를 판에 찍어냈다. 경비가 많이 드는 지도의 판형을 그가 어떻게 자금을 염출해서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앞에서 소개한 인사들, 곧 그의 친구 최한기 등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도를 만들어서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있다”며 그를 옥에 가두어 문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가 만든 지도의 판각을 불살라버렸다고도 하고 문초를 받다가 옥중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모두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의 지도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터인데 이와 관련된 기록도 거의 없다.

앞서 소개한 《이향견문록》의 저자 유재건은 중인으로 중인 인사의 일화를 많이 소개했다. 그는 김정호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보면 잡혀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철종실록》이나 《고종실록》은 물론 철종과 고종 당시 범죄자의 심문기록을 충실하게 모은 《추안급국안》에도 김정호와 관련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김정호에 얽힌 고난의 이야기는 민중이 그를 전설적 인물로 만들기 위해 지어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감독해 발행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그가 옥사했다는 이야기를 실어 마치 정설인양 가르쳐서 더욱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교과서인데도 전설이라고 밝히지도 않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일제 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깎아내리려 지어냈다고도 말한다.

한동안 필자는 김정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찾기 위해 여러 자료를 뒤져보았다. 그의 교우관계와 가문을 추적해 찾아보았지만 이삭줍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조정에서 그만큼 그의 공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묵은 선비들의 시구 따위는 수없이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 그의 지도를 제대로 써먹은 것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군대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일본군대는 〈대동여지도〉를 입수해 군수물자의 수송, 군사작전 등에 활용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만일 나라에서 그의 지도를 찍어 관가나 일반에게 널리 돌려 이용하게 했더라면 그 효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더욱이 19세기 말 일제와 맞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의병의 손에 이 지도가 들려 있었더라면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터인데, 이것을 의병들이 이용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희생으로 이룩한 그의 공적을 곰곰이 되씹어보며 이런 인물을 역사 속에 파묻히게 한 그 시대의 잘못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 〈대동여지도〉 판본은 숭실대학교와 성신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동대문 밖에 그가 살았다는 거리를 ‘고산자로’라 이름 지어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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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의 편....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2. 도리도표(道里圖標)

 

요약 조선 순조 연간에 제작된 8도전도의 도리도표첩

 

도리도표

조선 순조 연간에 제작된 8도전도의 도리도표첩. 채색목판본. 크기는 가로 15㎝, 세로 26?㎝이며, 6절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국도의 경로와 거리표, 각 도별 이정표가 포함되어 있다. 도리도표첩 중 팔도전도 부분.

[내용]

채색목판본. 크기는 가로 15㎝, 세로 26.5㎝이며, 6절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국도(國道)의 경로와 거리표, 각 도별 이정표가 포함되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첫머리에 8도전도가 있으며, 축척으로 백리척(百里尺)이 표시되어 있고 도별로 각각 빛깔을 다르게 하고 있다. 도로 표시는 없고 군현·병영·수영 등이 표시되어 있고, 여백에 물산총론, 도별 역수(驛數), 지도의 범례 등이 있다.

둘째로 분방정리(分方程里)에서는 주요 국도인 서울∼의주·강계, 서울∼경원, 서울∼강릉·평해, 서울∼동래, 서울∼해남에 이르는 자세한 경로와 거리가 표로 되어 있다. 각 도별 이정표는 2개 도를 한 장에 같이 실었으며 경기도·충청도, 경상도·전라도, 강원도·황해도, 함경도·평안도로 나누었다. 도별 이정표는 각 부·군·현 간의 이수(里數)를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도리도표』는 중앙집권정부의 행정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고, 지방관리들의 행정은 물론 일반 여행자에게도 필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최한기 (崔漢綺 )

 

요약 19세기 조선 후기의 철학자.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 급제 후 학문에 전념하다가 1872년(고종 9)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냈다.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여 근대적 합리주의와 개화사상을 싹트게 했다.

 

본관 삭녕(朔寧). 자 지로(芝老). 호 혜강(惠崗)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기화당(氣和堂). 1803년 황해도 개성(開城)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최치현(崔致鉉)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하지만 큰아버지인 최광현(崔光鉉)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 남대문 근처 창동(倉洞)에서 자랐다.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 급제하였으며 이후 학문에 전념하였다. 경학(經學), 사학(史學), 예학(禮學), 수학(數學), 지리(地理) 등 다방면에 걸쳐 두루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동서양의 많은 서적을 수집하였다. 1872년(고종 9)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이 되자,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지냈다.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북학파인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영향으로 서학(西學)을 수용하였다.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認識論)을 확립하여 일체의 선험적(先驗的) 이론이나 학설을 배격하고 사물을 수학적 ·실증적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

기학(氣學)을 제창하였으며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통상개방론을 주장하였으며 조선의 개화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런 기초 위에서 진보적 역사관을 수립하고 현실문제를 비판, 과감한 개혁을 부르짖었으며, 외국과의 대등한 교류를 주장하는 등 실학파 학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뒤이어 등장하는 개화사상가들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외국에서 높이 평가되어 그의 집필한 저서들이 중국에서 간행 ·소개되었으나, 당시 한국 학계에서는 최한기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20세기에 들어와 그에 대한 연구서가 발표되기 시작되었다. 천문 ·지리 ·농학 ·의학 ·수학 등 학문 전반에 박학하여 1,0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현재는 15종 80여 권만이 남아 있다.

저서에 《농정회요(農政會要)》 《육해법(陸海法)》 《청구도제(靑丘圖題)》《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 《추측록(推測錄) 1836》 《강관론(講官論)》 《신기통(神氣通) 1836》《기측체의(氣測體義)》《감평(鑑平) 1839》《의상리수(儀象理數) 1839》 《심기도설(心器圖說) 1842》 《소차유찬(疏箚類纂)》 《습산진벌(習算津筏) 1850》《우주책(宇宙策)》《지구전요(地球典要) 1857》 《기학(氣學) 1857》 《인정(人政) 1860》 《명남루집(明南樓集)》 등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

 

 

 

4. 동여도지(東輿圖地 )

 

요약 : 조선 철종 연간에 김정호(金正浩)가 저술한 전국지리지

 

[내용]

22책. 필사본. 총 22책 중 8책, 14책, 18책 등 3책은 결본이다. 현존하는 지리지는 영남대학교 도서관 17책과 규장각 도서 2책 등 19책이 남아 있다.

『동여도지』를 편찬하게 된 동기를 서문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첫째,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진지 300여년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군현과 진보 등이 새롭게 설치되거나 폐지되는 등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서술하였다.

둘째, 지도와 지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지도로서는 천하의 정세를 살필 수 있지만 지지가 아니면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볼 수 없으므로 상호보완적인 입장에서 『청구도』·『동여도』와 연관성이 깊은 『동여도지』를 편찬한다고 하였다.

셋째, 치국경제(治國經濟)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지지를 편찬하였다. 저자는 『동여도지』에서 호구·전세·군진·성곽·군병·창고·곡식·봉수·역참·역원·진도·교량, 목장 등 42개 항목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함으로써 국가의 통치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권1은 역대주현의 변천에 관한 것이며, 권2∼4는 서울, 권5∼10은 경기도, 권11∼14는 충청도, 권17∼20은 경상도, 권21∼26은 전라도, 권36∼37은 함경도에 관한 지지이며, 평안도편은 결본이다. 이는 『대동지지』에도 평안도편은 일부만 있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여도지』는 『동국여지승람』을 저본으로 필요한 사항을 발췌한 뒤 『동국여지승람』 편찬 이후 달라진 사항을 첨부하였고, 추가사항을 좌우의 여백이나 첨부란을 이용하여 편찬하였으며, 이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 『대동지지』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최성환

 

[생애]

최성환(崔瑆煥)은 1813년(순조 13)에 출생하였다. 자는 성옥(星玉)이고, 호는 어시재(於是齋)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중인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최윤상(崔潤祥)이고, 아버지는 최광식(崔匡植)이다.

1838년(헌종 4) 무과에 급제한 뒤 1843년(헌종 9) 이후 수문장을 지냈고, 1844년(헌종 10)에는 훈련도감 초관(哨官)을 지냈으며, 1845년(헌종 11)에는 종4품의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무겸선전관과 훈련원주부를 지냈다. 1849년(철종 즉위) 훈련원 판관, 1851년(철종 2) 경복궁 위장(景福宮衛將)을 지냈고, 같은 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852년(철종 3)에는 중추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에는 대왕대비와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설치한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에 별간역(別看役)으로 참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다시 수문장에 제수되었다. 1891년(고종 28)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최성환은 중인인 율과(律科) 출신 장지완(張之琬), 역과(譯科) 출신 정수동(鄭壽銅) 등과 교류하는 한편, 판서를 역임한 남병철(南秉哲)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2년(고종 19)과 1885년(고종 22) 두 차례에 걸쳐 시무에 관한 상소를 올린 바 있는데, 특히 1882년에는 『효경대의(孝經大義)』와 『고감(古鑑)』두 책을 올리고 이를 중외에 널리 알려 교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효경대의』는 『효경』의 장구(章句)에 옛 사람들의 훌륭한 행실을 경서와 사서 등에서 발췌하여 첨부한 것이고, 『고감』은 이전 역사에서 군신(君臣)의 선악 중 경계할 내용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이 밖에도 최성환은 다수의 저술을 편찬하였는데, 『고문비략(顧問備略)』은 헌종 연간 국왕의 초치(招致)를 받은 뒤에 국왕을 만나 발언하기 위해 정치와 군사, 제도 및 관리의 인사나 인재 등용 등과 관련된 시무를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그러나 헌종의 승하로 국왕에게 올리지는 못했다.

또한 남병철이 발문을 쓴 『시민요결(視民要訣)』, 역대 중국의 시선집인 『성령집(性靈集)』과 한국의 역대 시를 모은 『동국아집(東國雅集)』, 교류했던 정수동의 시를 모아 간행한 『하원시초(夏園詩抄)』, 교화서인 『태상감응편도설(太上感應篇圖說)』, 지리서인 『여도비지(輿圖備志)』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여도비지(輿圖備誌)

저자 : 최성환, 김정호

요약 1853년(철종 4)부터 1856년(철종 7)에 최성환(崔惺煥)과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지리지


[내용]

20권 20책.

내용 구성은 앞에 총목(總目)이 있고, 권1에 경도(京都)·동반부서(東班府署), 권2에 서반부서(西班府署)·한성부(漢城府), 권3에 경기좌도(京畿左道), 권4에 경기우도(京畿右道), 권5에 충청좌도(忠淸左道), 권6에 충청우도(忠淸右道), 권7·8에 경상좌도(慶尙左道), 권9·10에 경상우도(慶尙右道)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11에 전라좌도(全羅左道), 권12에 전라우도(全羅右道), 권13에 황해좌도(黃海左道), 권14에 황해우도(黃海右道), 권15에 강원동도(江原東道), 권16에 강원서도(江原西道), 권17에 함경남도(咸鏡南道), 권18에 함경북도(咸鏡北道), 권19에 평안남도(平安南道), 권20에 평안북도(平安北道)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권2·권5·권9·권16·권18의 5권 5책은 전하지 않는다. 각 도별 지지(地志)의 앞에는 군현명과 위치가 표시된 도지도(道地圖)가 있어 안내 지도 구실을 해 준다. 군현별 지지 앞에 실린 도(道)에 관한 기록도 연혁·관원(官員)·진관·진영·호구·전부(田賦) 등 역사로부터 재정적인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어 도(道)의 사정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군현(郡縣) 지지의 항목 구성은 편(篇)과 목(目)을 분리하여 설정한 점이 독특하다. 건치(建置)편에 읍호(邑號)·관원·궁실(宮室)·방면(坊面) 등의 소항목을 기록하였다.

산천(山川) 편에 도서(島嶼)·형승(形勝)·풍속(風俗), 식화(食貨)편에 토산(土産)·수리(水利)·창고(倉庫)·장시(場市)·목장(牧場), 무비(武備)편에 성지(城池)·영아(營衙)·진보(鎭堡)·봉수(烽燧)·전략(戰略), 도리(道里)편에 역도(驛道)·기발(騎撥)·보발(步撥)·영로(嶺路)·진도(津渡)·교량(橋梁)·원점(院店)을 기록하였고, 사전(祀典)편에는 소항목이 없다.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된 지지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강역표(疆域表)·극고표(極高表)·방위표(方位表)·군전적표(軍田籍表)·도리표(道里表)가 도별로 수록된 점이다. 이들 표는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으로서 매우 주목된다.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서 일부 연구자들은 이 책을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되었던 책으로 보기도 한다.

≪여도비지≫는 조선 시대에 매우 드물었던 사찬(私撰) 전국지리지의 하나로서, 김정호가 편찬한 3종의 지지(地志) 중 첫 저술이었던 ≪동여도지 東輿圖志≫로부터 마지막 작품이었던 ≪대동지지 大東地志≫로 완성되어 가는 중간적 모습의 지지로서 의의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1년 한국인문과학원에서 ≪한국읍지총람 韓國邑誌叢覽≫ 3책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