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산행기록/나사모산행공지(2017)

170305 남해 창선도 산행준비자료

카프리2 2017. 1. 30. 20:44


(본 자료는 나사모산우회 2017.3.5 남해창선도 산행준비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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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_대방산 힐링조10.5km 율도고개-소요원.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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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도종주 특별조23.3km


창선도종주 힐링조.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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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길 100선중 당당히 1위에 올라있는 창선/삼천포대교의 모습

2년전 1박2일 남해여행길에서 1위에 오른 이 도로를 그냥 지나쳐 아쉬움이 남는다


 수려한 한려해상에 금상첨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창선-삼천포 대교'...


사천 8경, 남해 12경중 하나인 이 대교는

사천시와 남해군간 3개섬을 연결하는 4개의 아름다운 다리로써 3.4Km에 이른다..


저 멀리 H자 형태의 사장교는사천시 대방동과 모개섬을 연결하는 삼천포 대교이고

붉은색의 아치교는 모개섬과 초양섬을 잇는 초양교,

앞쪽의 밋밋한 긴 다리는 초양섬과 늑도를 연결하는 늑도교이며,

늑도와 남해 창선까지 이어주는 창선대교는 지금 내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제 각각의 특징과 모양으로 이루어진 이 교량들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뽑힌 곳이기도 하다..




남해 지명유래

  • 남해는 사면이 바다인 도서(島嶼)로서 우리나라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남해라고 군명을 제정한 것이다.

남해군 산 지명유래

  • 강구산 : 강진바다 어구에 있는 산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듯이 생겼다 하여 강구산이라 하며, 지방사투리로 간고치라 부르기도 한다.(고현면)
  • 녹두산 : 산 모양이 사슴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녹두산이라 함.(고현면)
  • 사학산 : 이 산봉우리가 네 마리의 학처럼 생겼다 하여 사학산 또는 백운산의 줄기를 이어 남해에 생긴 산이라 하여 본산이라 함.(고현면)
  • 다리미산 : 산 모양이 다리미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다리미산 또는 가재모리처럼 생겼다 하여 오미재라 함.(고현면)
  • 응봉산 : 이 산봉우리에 매처럼 생겼다 하여 매방우라 하는 바위가 있으므로 응봉산이라 함.(남면)
  • 망기산 : 평산만호가 있을 때 성을 지키고 상부와 연락을 하기 위하여 산을 높게 하고 있던 곳이라 하여 망기산이라 함.(남면)
  • 송등산 : 이 산등성이에 소나무가 많이 서있는 것을 100여년전 어느 도사가 보고 산명을 송등산이라 지어주었다 함.(남면)
  • 괴음산 : 산 모양이 반달 안에 계수나무가 무성하게 있는 듯이 보이므로 괴음산 또는 계음산이라 함.(남해읍)
  • 관대봉 : 산형이 마치 가마(가메)처럼 생겼다 하여 관대봉 또는 가메봉이라 함.(남해읍)
  • 월구산 : 산 모양이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월구산이라 함.(남해읍)
  • 망운산 : 본래 미아산이라 부르던 산으로 후에 이 산봉우리에서 봉화를 올리게 되어 망운산이라 함.(미조면)
  • 호곡산 : 이 산의 모양이 큰 호랑이처럼 생겼다 하여 호곡산이라 함.(삼동면)
  • 약치곡산 : 옛날 어느 현인이 이 산에서 샘을 파서 물을 마시고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약치곡산이라 함.(설천면)
  • 구들뫼 : 온돌에 사용되는 구들장이 많은 산이라 하여 구들뫼라 함.(설천면)
  • 왕지산 : 옛날 이태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물을 마셨다 하여 왕지산이라 함.(설천면)
  • 국사봉 : 고려시대때 국사님이 왔다는 전설이 있어 국사봉 또는 국수봉이라고 함.(설천면)
  • 금음산 : 옛날 어느 도사가 이 산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산 어느 곳에서인지 쇳소리가 났다 하여 이 산을 금음산이라 함.(설천면)
  • 금산 : 본래 보광산이라 하다가 후에 이태조(이성계)가 이 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왕으로 등극하여 왕좌에 오른 것은 모두 이 산의 공이라 하여 산명을 금산이라 함.(상주면)
  • 납산 : 옛날에 이산에서 납이 생산되었었다고 하여 납산이라 하며 또는 산형이 원숭이와 같이 생겼다해서 원산이라 부르고도 한다.(이동면)
  • 망치산 : 옛날 왜구의 침입이 많을 당시 망을 보던 산이라 하여 망치산이라 함.(창선면)
  • 속금산 : 조선시대때 어느 풍수가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산을 보고 온 산을 비단으로 묶어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속금산이라 하였다.(창선면)
  • 여봉산 : 이 산에서 숫돌(礪石)이 많이 나므로 여봉산이라 하며, 이 산에 오르면 이 일대가 잘 보이므로 망치산이라고도 함. (창선면)
  • 대방산 : 옛날에 이 산에 모여 구학문을 닦던 학자들이 산이 높고 풍경이 아름답다 하여 대방산이라 함.(창선면)
























































남해 대방산 봉수대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한국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대방산 산정부에 위치한 대방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1171~1197)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봉수로 가운데서 동래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2봉수로에 속한 것으로, 남해 금산봉수대로부터 연결 받은 봉수를 북쪽의 사천 각산 봉수대로 연결하고 있다. 현재 봉수대의 원형은 찾을 수 없지만, 이곳이 봉수대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지름 13m, 높이 3m의 석축과 연대로 추정되는 유지, 그리고 건물터 가 남아 있다.[1]


남해 대방산 봉수대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의 대방산에 있는 봉수대이다. 산 정상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이를 주변 지역에 연락하기 위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금산 봉수대와 사천 각산 봉화대를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봉수대 벽은 흙과 돌을 섞어 만들어졌으며 높이 약 8.6m, 폭 약 3.6m인 망대가 남아 있다. 대방산 봉수대에 대한 기록이 《경상남도 지리지》(1477)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 책의 편찬시기 즈음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6월 1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대방산(臺芳山)

경상남도 남해군창선면 옥천리에 소재한 산이다(고도 : 470m). 창선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곳에서 발원한 계류천들이 흘러 동쪽 산록의 옥천저수지로 유입한다. 저수지는 해안에 있는 옥천리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옥천리 지명은 구슬 같은 물이 흐르는 시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가장 먼저 "대방산봉수()가 현의 남쪽 백십 사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진주에서 남으로 110리에 대방산봉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창선면 대방산()이라고 되어있다. 『광여도』에 창선도에 창선목장과 함께 처음 대방산봉()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도』에 대방산봉()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영남지도』에는 대방산봉()으로 나타난다. 고려 때부터 군사 통신수단으로 연기를 올려 이곳 상황을 전국의 봉화망으로 묶어 연락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남해군 창선면의 진산으로 옥천리에 있으며 산 북쪽 정상부에 봉수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방산 [臺芳山, Daebang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 국토지리정보원)



왜구(寇)

정의

13∼16세기에 우리 나라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인 해적의 총칭.

개설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왜적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하였으며 그 피해도 적지 않았다. 왜구는 ‘왜가 도둑질한다’는 뜻이지만, 고려말 이래 그들의 약탈 행위가 잦아지면서 왜인들의 해적 행위를 표현하는 명사가 되었다. 왜구는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쓰시마〔〕·마쓰우라〔〕·이키〔〕등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 중에는 왜구가 일본인과 고려인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발생배경

14세기 중엽 이후 왜구가 크게 세력을 키워 한반도는 물론 중국 연해안까지 침략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이와 관련된 일본 국내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14세기 중엽에 들어 원이 쇠퇴하게 되자, 원의 일본침입 이후 전제화되어 있던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는데, 남조 세력권에 있던 일부 지방세력들이 해적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하였다. 일본 사회 내부의 모순이 국내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국외로 공격성을 띠게 된 것이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일본에서 해적이 크게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1367년에 한족왕조인 명이 건국하였으나, 북원과의 패권 경쟁으로 왜구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고려는 원간섭기에 원의 간섭과 감시로 자체의 군사력을 갖추기가 어려워 국방이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지만, 약화된 군사력을 일거에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려는 북원과 중국대륙의 신흥국인 명과의 외교관계 긴장으로 왜구 침입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 때의 기록에서 왜구는 두 시기에 발생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금주(: 지금의 김해)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첫 번째 침입이다. 이때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수행하던 기간이었다.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기 전인 1265년까지 왜구는 11회 고려를 침입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13세기 왜구’라고도 한다. 몽골의 2회에 걸친 일본 침공 이후 14세기 중엽까지 80여년 동안 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충정왕 20)부터였다. 이를 ‘후기 왜구’라고도 부르는데, 동해·서해·남해의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범하였다. 수도인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에까지 출몰해 개경의 치안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며, 고려는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 침입해온 왜구의 규모, 빈도, 침입한 지역과 침입하는 양식 등에 있어서 ‘13세기 왜구’와 차이가 크다. 또한 고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지방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침략하여 명대를 통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왜구는 1370년대∼1380년대의 10여년 간 가장 치열하게 발생하였다.

내용

1223년 첫 침략 이래 해마다 왜구가 이어지자 고려는 1227년(고종 14) 박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 금지를 요구하였다. 이때의 왜구는 여몽연합군의 2차례의 일본 공격 이후 사라졌다. 1350년 이후 ‘후기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여 피해가 심해지자, 1366년(공민왕 15) 검교중랑장() 김일()을 아시카가막부〔〕의 쇼군〔〕에게 보내어 왜구 금지를 요구하였고, 이를 근절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1375년(우왕 1)에는 판전객시사() 나흥유()를, 1377년에는 전 대사성 정몽주()를 파견하였다. 정몽주는 규슈단타이〔〕·이마카와 료순〔〕의 협조를 받아 잡혀갔던 고려인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한편, 왜구 소탕전을 보면 1376년 최영()이 홍산(: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에서 대승을 거둔 홍산대첩, 1380년 왜선 5백여 척이 진포()에 침입했을 때 나세()·최무선() 등이 화포로 모두 불살랐던 진포싸움, 이 때 상륙한 왜구가 내륙 각지를 노략하고 황산()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 등이 이를 물리친 황산대첩, 1383년(우왕 9) 정지()의 남해대첩()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이 컸던 인물은 최무선이었다. 그는 화약·화포·화전() 등의 화기를 만들어 진포 싸움과 남해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밖에도 성을 쌓고 방어 초소를 더 설치했으며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양반·백성·재인()·화척() 등으로 군인을 삼고, 공·사노()로 연호군()을 삼아 왜구에 대비하였다. 한편, 회유책을 써서 경상도·전라도에 왜인만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때 투화()한 왜인들을 국내에 거주하게 하여 일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본래 거주하던 일본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군사력을 강화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특히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1377년에는 전함들을 만들고, 1380년에는 최영을 해도도통사(使)로 임명해 적극 대처하였다. 또, 해변의 인민을 모집해 3정()을 1호()로 삼아 수군을 편성하고, 연해의 토지는 조세를 면제해 수군의 처와 자식을 부양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

왜구는 일본에서 유래한 해적이 일방적으로 고려와 명을 침략한 것이지만, 고려(조선)와 명 사이에 심각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명은 고려에게 왜구를 엄금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혹시라도 고려(조선)이 일본과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군사적 위협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명의 의심과 협박을 잠재우기 위해 왜구를 정벌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주변국인 고려(조선)와 명의 의심을 잠재우고, 남북조의 혼란기에 일본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을 필요성에서 왜구 문제가 해결될 필요성이 있었다. 고려말인 1389년(창왕 1)과 조선초인 1418년(세종 즉위년)에 단행된 쓰시마 정벌은 동아시아 3국의 이해가 맞아 이루어진 군사적 행동이었다. 왜구를 토벌하는데 고려에 협조한 측은 북조인 막부-쇼군측이었는데, 이들은 왜구 토벌에 협조함으로써 국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국왕’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으며 남조에 대하여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고려말의 첫 쓰시마 정벌은 1389년 2월에 경상도원수()인 박위()를 파견하여 병선 1백여 척을 이끌고 공격한 것이다. 이때 적선 3백여 척을 불사르고 잡혀갔던 고려인 1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첫번째 정벌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고려는 이 정벌로 왜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왜구는 고려 말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어 1393년(태조 2)부터 1397년까지 53회나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근심이 왜구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구를 금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고, 조선 쪽으로 귀화해오는 향화왜인()과 평화적인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소탕과 변경의 방어를 엄중히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조선 초에는 평화적 사절의 왕래와 향화왜인들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부족한 물자를 교역하기 위해 오는 자들을 특별히 흥리왜인(: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태종 때에는 부산포()·내이포(: )·염포()·가배량()의 4포를 개항해 이들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조선초에도 왜구가 계속되자 토벌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1396년 왜구가 120척으로 경상도 동래·기장 등지에 침입하자, 김사형() 등을 시켜 쓰시마와 이키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쓰시마에서는 매년 사절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미두를 받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왜구가 계속되자 1419년(세종 1) 이종무() 등에게 다시 쓰시마를 정벌하고, 규슈 등 일본의 다른 지방과는 계속 통교하였다. 또한 조선도 대마도를 영구히 점령할 의사가 없었고, 이들의 왕래를 엄금하면 왜구가 재발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다시 통교를 허락하였다.

세종은 삼포(: ··)를 개항하고 여기에 왜관을 설치하여 일정한 규모의 무역을 허용하는 회유책을 병용하였다. 그 뒤에도 삼포왜란을 비롯해 사량진왜변()·달량왜변() 등이 있었으나, 조선의 회유정책은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말 조선초의 왜구는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 리의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개경의 계엄령에 따른 민심의 동요, 천도론의 대두로 인한 조정 상하의 불안감, 민가의 약탈 등은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피해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국고 수입의 원천인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과 조창의 약탈은 국가 재정을 파탄의 지경에까지 몰고 갔다. 이에 조세를 내륙으로 운반하려는 육지 운송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군량미의 부족까지 초래하는 등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왜구 [Japanese invaders, 倭寇]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관음포대첩

[ ]

요약
고려 말인 1383년 5월(고려 우왕 9) 정지()의 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

남해대첩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국운이 쇠퇴하는 기미를 보이자 왜구는 고려의 해안가를 노략질하는 횟수가 잦았다. 왜구가 이처럼 고려를 약탈을 일삼는 이유는 육지에서 노련한 칼솜씨로 번번이 그들이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에서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 해상에서 수군이 함포로 왜적을 막는 작전을 사용하였다. 3년전인 1380년 진포에서 왜선 500척이 격침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383년 왜구는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침입해 왔서 합포(지금의 마산)를 공략하였다. 급보를 받은 해도원수() 정지는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하였다. 정지가 섬진강 어구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소집하여 전열을 다시 정비할 때는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다다라 있었다. 곧바로 적선을 찾아 나선 정지의 함대는 박두양()에 이르러 왜구의 배들과 맞닥뜨렸다. 왜구는 정예병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화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화포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최무선이었는데 움직이고 있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진정한 해전이었다.

이 싸움은 승리를 거둔 뒤에 정지가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다. 이 때 왜선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군기윤() 방지용()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왜구는 이 해전에서 17척의 큰 배를 잃은 외에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한 채 퇴각하였다. 관음포대첩은 왜구들이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 함포()로 적을 물리친 최초의 전투라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승전이었으며 관음포대첩으로 자신감을 가진 고려군은 대마도정벌을 추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포대첩 [觀音浦大捷]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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