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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친구와 1박2일 자료(강진 다산초당.영랑생가)

카프리2 2017. 3. 30. 08:53

1. 다산초당(1-4번 강진군청 자료)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6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2. 백련사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3. 다산기념관

다산기념관은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신 다산 정약용의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디지털 자료와 다산 선생 관련 진품 유물을 전시하였다.

* 참고사항
- 기념관 주차가 다산초당 관람에 편리.
- 기념관을 먼저 관람한 후 다산초당 관람이 보다 효과적.
- 대형버스는 주차하기 어려움(기념관 입구 쪽에 버스 주차공간이 있음)

 

4. 영랑생가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5. 강진의 역사유래(전남도청 자료)

「강진」은 백제시대에 도무군의 도강과 동음현의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자와 탐진의 “진”자를 합해 강진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도강현은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 양무군(陽武郡)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에 도강으로 고쳐서 영암(靈岩)에 속하게 하였다. 탐진현은 원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에 예속시켰다.

고려시대에 영암에 속하게 했다가 뒤에 장흥(長興)으로 이속(移屬)시켰다. 1417년(태종 17) 각 병마절도사영을 도강 구치(舊治)에 이설(移設)하고 도강현과 합쳐서 강진군을 설치하여, 탐진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1895년 나주부(羅州府) 관할에 들어갔고, 1913년 백도면(白道面) 월성리·항리·만수리·좌일리·금당리·내봉리·동리·중산리·방축리·남촌리의 일부를 해남군에 속하게 하는 한편, 완도군 군내면 가우도(駕牛島)를 이 군에 속하게 하였다. 1936년 7월 1일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신전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마량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일원이 도암면에 편입되었다.

2003년 현재 강진읍 및 군동면(郡東面)·칠량면(七良面)·대구면(大口面)·도암면(道岩面)·성전면(城田面)·작천면(鵲川面)·병영면(兵營面)·옴천면·신전면(薪田面)·마량면(馬良面) 등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