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리학에 조예가 깊은 박인호 교수님의 책이다. 박사논문을 책으로 발행했다.)
(산경표 저자는 미상이지만, 신경준의 여지편람의 건(乾)을 참고하여 어느분이 1780년도경에 쓴 책이다)
(지금까지 저자 미상의 산경표를 왜 신경준이 저자라고 했는지 대략 이해하게 되었고)
(동국문헌비고, 증정보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 발행경위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 책을 읽게 된 배경 : 산경표를 더 깊숙히 알고 싶어서
■ 개 요
1. 읽은날짜 : 2018. 2 .19(월) - 2. 23(금)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수 : 박인호/ 이회문화사 / 282
3. 제목 : 조선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4. 목차
머리말, 서론
제1장 문헌비고의 편찬
제2장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제3장 이만운의 증정문헌비고 여지고
제4장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결론
■ 저자 : 박인호
- 1960년 경북의성 출생.
- 1978년 경북대학교 사학과. 1986년 한국정신문화원 한국학 대학원 공부
- 1996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조선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 현 세명대학교 강의교수
■ 책을 읽은 소감
- 학문이란 끝이 없다. 박인호님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지리학의 대가 같다.
님의 책을 읽다 한국사학사대요라는 책을 또 사고, 조선후기 역사가의 역사지리인식이라는 책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 위 책은 박인호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간했다.
쓰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저 놀고 먹기로 읽는다. 그러나 읽으면서도 정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 책을 읽을 때, 다독 보다는 정독으로 하려면...한 권을 여러번 읽어야 하고, 노트정리도 해야 하는데..그게 잘 안 된다.
■ 밑줄을 그은 글
- 동국문헌비고는 모두 100권 40책으로 1769년부터 홍봉한 등이 편찬명령을 받들어 편집하였으며, 1770년에 목판본으로 출판되었다. 교정은 숭정전 명의로 이루어졌다.
증정문헌비고는 모두 240권 102책으로 1782-1790년 사이에 이만운에 의해 편집되었으며, 1809년에는 아들인 이유준에 의해 재편집되었으나, 인쇄가 이루저지지 못하여 필사본 만이 현재 남아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250권 50책(권수 1책 포함)으로 박용대 등이 1903년부터 편찬명령을 받들어 편집한 것으로, 1908년 연인본으로 출판되었다.
- 동국문헌비고의 편찬과정
문헌비고가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제도와 문물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중요한 정치적인 사항이나 참고가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통전이나 문헌통고와 같은 중국의 전장. 제도를 정리한 서적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전고서에 나오지 않는 국내문제에 대한 중요한 결정사항이 있게 되면 비변사에 모여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의 중요한 참고자료는 전조의 실록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중요한 결정사항이 있을 때마다 국조의 전장. 제도에 관하여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책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서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연혁을 하는 학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관리들 역시 서리들 사이에서 전해오던 말에 따라 일을 집행함에 따라 점점 잘못된 말이 퍼져 예전의 모습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적으로 사전적인 편람을 위한 책이 필요하였다.
영조는 우리나라의 전장과 제도에 관한 공.사 기록을 널리 채집하여 전말을 캐내 하나의 통일된 책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것이 책으로 완성된 것이 동국문헌비고이다.
- 증정문헌비고의 편찬과정
영조대 관부에 의해 급히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면서 이 책이 졸속으로 편찬되었다는 비판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사실 동국문헌비고는 일을 서두른 나머지 잘못된 곳이 적지 않았다. 체재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이 분담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일관성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도 있고, 또한 편찬 담당자들의 입장이나 시각에 따라 기존의 자료들을 초출하는 면에 있어서 일치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편찬을 직접적으로 담당하였던 이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책의 편찬 담당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조준은 개인적으로 당시 박식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만운에게 청하여 의심스럽거나 잘못된 곳이라든지 사실에 있어서 빠졌거나 틀린 곳이 있으면 바르게 고쳐줄 것을 청하였다.
- 증보문헌비고의 편찬과정
증정문헌비고가 편찬된 후, 인쇄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초고상태에 있었으나, 그것을 참고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또한 국가적인 전장제도의 장고적인 지식을 충족시킬 만한 서적이 편찬되지 않았으므로 이에 대한 인쇄의 필요성이 계속 요구되었다. 그리고 증정문헌비고에는 너무 번다한 점이 없지 않았고, 또한 정조 이후에는 더 이상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증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현종 11년(1845년) 정월에는 좌의정 권돈인이 정조년간 이만운이 증정한 겻이 아직 초고상태로 있음과 그 때 이후로 이미 50여년이 지나 중간의 사실 뿐만 아니라 공사간의 전록이 역시 많아, 그것을 이어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여 책을 완성한다면 일대의 문헌에 도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왕의 뜻을 잇는 한 방도가 된다고 말하고, 해당 관청에 분부하여 총재관 및 당랑을 임명하고 편찬청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며, 현종은 이에 허락하였다.
□ 동국문헌비고 편찬의 직접적인 계기
- 동국문헌비고 편찬의 직접적인 계기는 울릉도에서 산출되었던 인삼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지역 특산물의 정확한 파악과 외교적인 분쟁시 근거자료 확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영조 45년(1769) 당시 국내 인삼값이 많이 뛰자 북경에서 인삼을 삭지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그것을 진짜 인삼으로 간주하기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산출되는 인삼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울릉도에서도 인삼이 생산되었는데 장사치들이 몰래 들어가 캐어 나오곤 하였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홍봉한은 울릉도의 인삼건으로 영조 45년(1769) 10월 14일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울릉도에서는 인삼이 산출되는데 장사치들이 몰래 들어가서 캔다고 합니다. 왜인들이 만일 알게 되면 뽕나무를 두고 싸우다가 모두 베어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고 하였다. 이에 간청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와 관련된 일에 대하여 고증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이와 관련된 문헌들을 널리 모아서 이로써 큰나라를 섬기고 이웃나라들과 화친하는 문건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즉, 홍봉한은 울릉도에서 인삼이 산출되는 것을, 왜인들이 알게 될 경우 분쟁이 있을 것임을 지적하고 울릉도에 대한 문서들을 정리하여 향후 외교적 문제에 대비할 것을 아뢰었으며, 영조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 영조는 정재겸, 이최중으로 하여금 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홍봉한의 천거로 원인손, 채제공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10월 17일에는 홍봉한이 구윤명을 천거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10월 19일에는 원인손에게 일찌기 삼척영장을 지낸 사람 가운데 사물에 밝은 사람과 함께 울릉도의 산봉우리와 아름다운 경치 물산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들어오라고 지시하였다. 10월 25일에는 비변사에 정식으로 국을 설치하고 당상으로 이최중 외 여러 사람과 낭청으로 조준, 김상묵, 신경준을 정하였다. 그리도 책명도 잠정적으로 강역지로 정하였다. 그 후에 영조는 강역지라는 이름이 조잡하므로 여지편람으로 개칭하도록 하였다.
□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 영조 45년(1769) 10월 14일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의 영유권에 관한 외교관계 문건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을 편찬할 것을 청하여 영조의 허락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변사에 강역지 편찬을 위한 국을 개설하고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게 되었다. 이 때 신경준은 홍봉한의 추천으로 비국낭청이 되었다.
그리고 12월 영조는 강역, 산천과 도리의 원근 뿐만 아니라 균역, 준천(浚川) 등에 관한 사항도 심도록 하며, 이름도 강역지에서 여지편람으로 바꾸도록 명을 내렸으며, 이 때 그는 홍찬해와 함께 여지편람 편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1770년 1월에는 여지편람이 중국의 문헌통고와 체제가 비슷하여 책명을 동국문헌비고로 개명하였으며, 책의 편찬을 위한 편집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이 때 신경준은 편집청의 낭청의 직책을 맡아 여지고를 직접 편찬하였다.
그는 여지고의 편찬임무를 맡아 일하던 중, 또한 우리나라 8도 전도인 동국여지도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신경준이 수정 제작한 팔도전도에 어제서문을 달아 신경준의 노고를 치하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경준은 중앙에서의 여러 관작과 북청부사, 강계부사, 제주목사 등의 외임을 지내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그는 3년간 상복을 입고 지내다가 순창으로 퇴거하였으며, 정조 5년(1781년) 70세로 일생을 마치었다.
□ 신경준의 지리인식
- 강계고 외에 신경준의 역사지리학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는 사연고, 산수고, 도로고, 가람고 등의 저술과 지도류가 있다.
- 산수고에서는 우리나라의 12산과 12강을 주축으로 각 산맥의 지맥과 강의 수맥을 정리하여 산과 강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구조적인 체계를 밝힌 것이다.
산수고의 권1에는 산경으로 12개의 주요 산의 그 상호 연결관계, 산이 포괄하는 군현과 지역, 그리고 산계가 영향을 미치는 강의 지역적 범위 등을 통해 산줄기를 거시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수록 순서에서는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식으로 정리하였다.
권 2의 산위와 권 3의 산경은 12산의 수록순서에 따라 각 군현의 행정단위별로 군현 내의 주요 산의 위치 갈래 등을 미시적인 측면에서 다루면서 다양한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권 4의 수정에서는 한강에서 발원한 전국 12개 주요 하천과 그 발원지 경유지 합류점 등을 기록하고, 그리고 수계가 영향을 미치는 산의 지역적 범위를 적고 있다.
권 5와 원 6의 수위는 12수의 수록순서를 기준으로 각 하천의 연, 지, 진, 포의 위치와 자료들을 군현별 행전단위를 기준으로 정리하였다.
□ 여지고의 구성과 서술
동국문헌비고 총 100권 가운데 여지고는 17권으로 편성되었다. 1-2권은 역대국계, 3-6권은 군현연혁, 7-10권은 산천. 도리, 11-17권은 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7-10의 산천조는 산수고와 유사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산수고에서는 산.수를 나누어 산경,산위, 수경,수위로 분리하고, 순서도 경도를 앞세우고서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산경과 수경에 해당하는 부분을 총설 1.2로 앞세우고 한성부 경기도 ~ 평안도 순의 행정단위별로 산위와 수위에 해당하는 내용을 모두 종합하여 정리하고 있다.
※ 158페이지 주248)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간행한 산경표는 문헌비고가 나온 뒤에 그것을 참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의 하나를 든다면 광문회본 99항과 장서각 소장 여지편람 본 50 A면에 문헌비고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문헌비고 여지고는 신경준이 지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은 문헌비고 내용을 비판하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