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접해보면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검소한 국민인데)
(우리나라를 삼국시대부터 괴롭혔다. 왜구에 대한 피해가 얼마이고 임진왜란, 일제36년에 대한 피해가 얼마인가?)
(따라서 일본을 자세히 더 알고 싶어 본 책을 읽었다. 679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김희영 저자님이 글을 매끄럽게 잘 썼다)
■ 책을 읽은 배경
- 우리 역사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일본한테 많이도 당하고 살았다.
- 만나보면 겸손한 일본인이 대체 왜 그럴까? 궁금했다. 등산으로 일본에 세 차례 간적이 있는데
후지산, 북알프스, 남알프스를 오를 때 보면...10미터 앞에서 스미마셍 하고 길을 비껴주고...
남을 배려하는 문화가 좋다.
- 따라서 일본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이 책을 읽었다.
■ 개 요
1. 읽은 날짜 : 2018.9.9(일)-9.21(금)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 : 김희영 / 청아출판사 / 679
3. 제목 : 이야기 일본사
4. 목차
1. 야마토 정권
2. 귀족 정치의 대두
3. 무사 정권의 수립
4. 남북조 시대
5. 군웅할거 시대
6. 천하통일 시대
7. 막번 체제의 성립
8. 동요하는 막번 체제
9. 메이지 유신
10. 메이지 시대의 일본
11. 세계와 일본
12. 대전 후의 일본
■ 저자 김희영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는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 김희영 작가님은 이야기 중국사 1.2.3권도 썼고. 나는 이 책 3권도 샀다.
3권 합쳐 약 2천페이지의 거작이다. 김희영 작가님은 상당히 실력파인데...네이버나 교보에서
경력을 조회해 봐도 위 사항만 나온다. 상당히 겸손하신 분 같다.
(그러나. 이야기 중국사 1.2.3권은 대체 언제 읽을까?)
■ 책을 읽은 소감
- 일본하면 막부, 쇼군, 다이묘, 메이지 유신 등 용어가 많은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 1,500년대에 포르투칼 사람에 의해 화약 총이 전해진 후,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총으로 우리 국민을 많이도 죽였다.
- 또 사무라이가 옆에서 모시는 자라는 뜻도 알았고, 미국의 군함에 굴복하여 미국과 수교하교 메이지 유신을 거쳐 사회, 경제가 발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밑줄을 그은 글
- 진무천황이 천황에 즉위한 것이 기원전 660년이라고 하지만, 고고학상으로 진무 천황의 실재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모두 가상으로 적혀진 것으로 간주된다.
- 세계 최대의 능묘로 일컫어지는 난토쿠 천황의 능은 오사카의 사카이 시에 있으며, 크기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 진시황의 능보다 훨씬 크다. 만약 이 고분에 쌓인 흙을 운반한다고 하면 5톤 트럭으로 56만 2천 300대분이나 된다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의 남부 지역인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근 200년간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 고사기는 712년에 오노야스마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일본 역사서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전설과 가요 등을 많이 담고 있어 일본 최고의 문학서라고도 일컫어진다.
- 일본서기는 720년에 도내리 천황이 총재관이 되어 그의 책임 아래 편찬되엇다. 고사기가 설화체 형식으로 쓰여졌던 반면 일본서기는 편년체로 엮인 전 30권의 역사서이다.
- 무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무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부라우모노에서 유래했다. 즉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이다.
-이듬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집권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그 사신을 목을 베었다. 이어 1279년 다시 사자가 왔으나 이때도 참수하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보낸 사자들이 잇따라 돌아오지 않자 더욱 노하여 다시 일본 침공을 준비하였다.
- 태풍으로 인하여 몽골과의 싸운에서 두 차례나 승리했다는 소식이 일본 전역에 전해지자 이것은 분면 가미카제가 일어난 것이라며 신앙심을 한층 심화시켰다. 이 태풍은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남조의 항쟁
1336년 12월 21일 밤 고다이고 천황은 유폐되어 있는 가산인에서 여자로 변장하여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험악산 산길을 따라 요시노 산으로 탈출하였다. 그곳에서 지지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요시노 정권을 수립하게 되니 역사상 이를 남조라 부른다.
여기에 대하여 지묘인 계통의 고곤 상황과 고묘 천황의 조정을 북조라 일컫게 되었다. 이후 남북조는 50년에 걸친 항쟁과 대립으로 크고 작은 전란이 되풀이되었다.
- 치카후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신황정통기의 집필을 계속하여 이를 완성시켰다. 이 책은 대일본은 신의 나라이다 라는 논조를 전개한 것으로서 천황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3종의 신기를 보유하고 있는 남조가 정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 남북조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1392년으로, 요시미쓰의 제의를 받아들여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로 올라가 북조와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한다는 형식으로 신기를 전함으로써 57년간에 걸친 남북조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왜구는 쓰시마, 이키, 히젠, 마쓰우라 등 주로 농경지가 없는 지방에서 빈곤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소규모인 경우는 2,3척, 대규모인 경우는 50척에서 200척, 500척까지 거느린 대선단도 있었다. 이들의 첫째 공격목표는 배와 창고였으며 쌀과 콩을 약탈하고 보상금을 노려 사람을 강제 유괴하기도 하였다.
-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관점에서 왜구의 상황을 살펴 보자.
왜구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있었으나 그때는 그 규모와 피해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갑자기 들끊기 시작한 왜구는 고려.원나라 연합군이 2차에 걸친 일본 정별이 실패한 후 이를 보복이라도 하듯 노략질이 더욱 심해졌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동서의 연안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까지 침범해 들어와 강화 교동.예성강 어귀 등지를 어지럽혀 수도 개경의 치안까지 위협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고려에서는 막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의 단속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고 또 최영과 이성계 등이 왜구를 토벌하여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왜국 격퇴에 가장 공이 컷던 사람의 화통과 화포를 제작한 최무선으로 그는 진포에 침입한 왜선 500여 척을 격파하였다.
- 왜구의 화를 기록한 명나라의 역사에 의하면 1553년 8월 한무리의 해적이 절강성에 상륙하여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 해적의 무리는 다시 절강 서족을 휩쓸고 지나가 안휘성 남쪽을 짓밝은 다음 남경에 육박하였다. 그 후 또 다시 표양, 무석, 소주 등지에 상륙하여 절강, 안휘, 강소의 3성을 80여 일에 걸쳐 유린하면서 6천 명 이상을 살상하였다.
이 해적들의 처참한 잔학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절강에 상륙한 일단의 해적들은 젖먹이 어린아이를 긴 장대 끝에 매달고 펄펄 끊는 물을 끼얹어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환성을 지르는가 하면, 임신한 여자를 잡으면 그 태아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내기를 걸고 그 즉석에서 임신부의 배를 갈라 내기에서 이긴 자에게 술을 실컷 마시게 하여 흥겨워했다. 그들의 술자리에는 임신부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목불인견이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더라도 왜구들의 횡포가 얼마나 혹독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이렇게 해서 1467년부터 시작되었던 오닌의 난은 11년 후인 1477년에 어렵게 막을 내렸다.
- 오닌의 난이라는 거센 바람이 일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후 약 100년 동안에 걸쳐 전국 시대가 펼쳐진다.
- 철포의 전래
일본에 철포가 처음 전해진 것은 1543년 포르투칼의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포르투칼의 상인들은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던 끝에 규슈 남쪽 다네가 섬에 도착하여 그곳 영주인 도키타카에게 철포를 전하게 되었다. 영주 코키타카는 철포 두 자루와 화약의 조제법까지 그의 가신들에게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 후 2정의 철포 가운데 1정이 당시 승병의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던 기슈 네고로지의 스기노방에게 전해졌고, 이 후 네고로는 철포의 명산지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 노부나가는 아군의 배반자인 미쓰히데에게 기습을 받아, 자결로써 풍운의 일생을 마쳤다. 일본 전국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일세의 영웅 노부나가는 수족처럼 믿었던 부하의 배반으로 안타깝게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 철포를 일본에 전한 포르투칼 사람들은 그 후에도 무역을 하기 위해 규슈 각지를 왕래하였다. 매년 7.8월경 서남 계절풍을 타고 일본에 왔다가 10월이나 11월경 다시 토호쿠 계절풍을 이용하여 규슈를 떠났다. 그 무렵의 일본 사람들은 그 무역선을 남만선이라 부르고 포르투칼 사람들을 남만인이라 불렀다.
- 이윽고 노부나가가 그의 부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급서하자, 히데요시는 아기지를 토벌한 후 부장, 행장 등과 함께 군사를 돌려 미쓰히데를 주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폐하고 관백의 자리에 오르니 그때가 만력 14년 1586년이었다.
-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피살된 후 불과 8년 만에 마침내 일본 전국을 통일하기게 이르렀다.
- 히데요시가 제시한 강화조건 7가지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련가!
세상만사 모두가 일장춘몽이로세!
히데요시는 이렇게 남기고 죽어갔다. 때는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의 나이 62세였다.
-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죽어도 차마 죽을 수 없는 걱정거리를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가장 사랑하고 금지옥엽처럼 소중히 여겼던 아들 히데요리는 겨우 6세의 어린 나이였다.
- 에도 : 나중의 도쿄
- 이에야스는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이 못지 않게 원기가 왕성하여 그가 즐기는 매사냥 등으로 소일하다가 1616년 정월부터 병상에 눕더니 4월 17일에 75세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메이지유신 : 1868년
- 1868년 9월 천황은 에도를 향하여 교토를 출발하였다. 에도의 이름도 서쪽의 교토에 대응하여 도쿄(東京)로 고쳤다. 이렇게 해서 신정부의 정치적 중심지는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지게 되었다.
- 1882년(메이지 15년) 봄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 각국의 헌법을 조사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이토는 군주의 힘이 약한 영국식 헌법보다는 독일식 입헌제를 참고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직행하였다.
- 1905년 5월 27, 28일 양일 간에 걸친 대한해협의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 38척 가운데 33척을 격침 혹은 나포함으로써 러일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기에 이르렀다.
- 이토 등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이른바 한국의 을사오적의 찬성을 얻어 1905년 11월 17일 을사 조약을 체결하였다.
- 1910년 8월 22일 한국의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한일 합병 조약이 조인되고 그 다음날 외국에 이를 통고하였으나 한국 내에는 일주일간 이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월 29일에 이를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 1926년(다이쇼 15년) 12월 25일 다이쇼 천황이 죽자 섭정 히로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고 연호를 쇼와로 개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