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린 배경)
- 이조전랑은 마치 지금 청와대의 인사수석과 비슷한 것 같다. 왕권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인사권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자겸시대, 무신정권 시절, 몽고집권기(충자 임금 6명) 모두 왕권이 유명무실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정도전 등 조선 개국자들이 어떻게 왕권을 유지할까 고민하면서 이조전랑 제도를 도입한 것 같다.
- 그러나 권력이 있으면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숙종이후 부터 당파싸움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끊고, 영조 때 이조전랑의 자대권 등을 없애고, 정조때 이조전랑 제도를 폐지함에 따라,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 때부터 안동김씨, 풍양조씨가 득세하여 왕권은 유명무실해졌다. 고종때도 대원군이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다 보니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 왕의 권력은 인사권과 서로 견제하는 여야의 세력 균형에서 나오는 것 같다. 왕권을 넘어선 권력자가 나오면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이조전랑 제도는 왕권을 지키는 신의 한수다. 앞으로 역사책을 읽으며, 카프리가 적어 놓은 아래 내용을 음미하며 이조전랑이라는 지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아래 문구만 보아도 명저같다. 앞으로 죽을때까지 곪씹어서 여러번 읽고 싶다.
[완역정본 택리지(이중환지음. 안대희 이승용 외 옮김) 245-246페이지를 카프리가 원문 그대로 타이핑]
우리나라의 관제는 먼 옛날과 달라서 비록 삼정승과 육판서를 두어 모든 관청을 감독하고 통솔하기는 하지만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에 큰 무게를 두어서 풍문, 피혐, 처치의 법규를 만들어 오로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의론의 정사를 맡게 하였다.
내직과 외직을 임명하는 권한은 삼정승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 속해 있다. 또 이조의 권한이 너무 커질까 염려하여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 홍문관)의 관원을 추천할 때는 이조판서에게 맡기지 않고 이조낭관(郎官)에게 전담시켰다. 따라서 이조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이 대각의 권력을 주도하게 되었다. 삼정승과 육판서가 높고 큰 관직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랑(이조 정랑과 좌랑)이 곧잘 삼사의 여러 신하를 부추켜 탄핵하게 하였다. 조정의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명예와 절도를 무겁게 여겨서 한 번 탄핵을 받으면 직책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조전랑의 권한은 삼정승에 버금갔다.
이것이 큰 벼슬과 작은 벼슬이 서로를 맞잡고, 높은 직책과 낮은 직책이 서로를 제어하는 방법이라 300년 동안 큰 권간(權奸)이 나타나지 않고, 꼬리가 커서 처리하기 어려운 근심*이 없었던 이유이다. 여기에는 고려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했던 폐단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없애려는 역대 임금의 의도가 깔려 있다.
* 근심 : 신하의 권력이 강하여 군주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로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이 때문에 반드시 삼사에서 명망과 덕행이 있는 인재를 엄격하게 뽑아서 전랑으로 삼았다. 전랑으로 하여금 후임자를 천거하게 하고 이조판서에게 맡기지 않았다. 전랑이 가지는 권한을 무겁게 여겨서 한결같이 공론에 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품계를 올릴 때면 반드시 전랑을 먼저 올리고 나서 차례대로 이조 관료의 품계를 올리고 직무를 부여했다. 그런뒤에야 다른 부서에 차례가 갔다. 한 번 전랑을 거친 사람은 큰 사고가 없다면 순탄하게 공경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전랑은 명예와 이익이 함께 따라오는 자리라, 나이가 젊고 벼슬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도를 시행한 지가 오래됨에 따라 전랑을 먼저 하고 뒤에 하는 문제와 전랑 자리에 가고 못 가고 하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추가사항 : 위키백과]
- 이조전랑의 3대 권한: 폐해가 많아 세조, 영조, 정조 임금들에 의해 점차 권한이 폐지되었다.
- 자대권(自代權)
- 후임 전랑 지명권, 즉 후임자 추천권을 말한다. 1516년(중종 11)부터 부여되었다.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에 의해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로, 전랑이 주어진 본인의 임기를 다 마치고 보직이동을 할 때 자신의 후임자를 직접 지명할 수 있는 권리였다. 거의 세습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고 많은 인사청탁이 오고 갔다.
- 통청권(通淸權)
- 역시나 1516년(중종 11)부터 주어진 권리이다. 정부의 각 부서 당하관을 천거(추천)할 수 있는 권리 +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총칭하는 조선의 언론기관으로서 이조전랑과 더불어 청요직임)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는 곧 문신 선발권을 광범위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 바로 이 통청권이 이조낭관(이조전랑) 인사업무의 핵심이다. 3사 언론기관의 공무원 임용권한이 이조전랑에게 있었기 때문에 삼사 관원 예비생들은 이조전랑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조낭관이 조선의 언론을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 낭천권(郞薦權, 부천권이라고도 함)
- 일명 재야 현사 추천권으로도 칭해지는 권리로서 다른 권리들과 비교해 다소 늦은 시점인 1569년(선조 2)부터 부여되었다. 쉽게 말해서, 명성이 높거나 실력은 있는데 과거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한 재야의 선비들을 과거시험 없이 임용될 수 있게 추천할 수 있는 권리이다. 또한 이조낭관이 추천을 받으면 대부분 등용될 수 있었다. 수많은 인사청탁이 빌미를 제공했다. 위와 같은 권한들을 토대로 사림들은 이조전랑 지위를 훈구세력의 강력한 견제(사화)에도 끊임 없이 사림을 중앙에 공급하여 훈구에 맞설 세력 기반을 다질수 있었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에 이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