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망 좋은 고남산(古南山)..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를 때 이곳에 제단을 쌓아 제를 올렸기 때문에 태조봉, 제왕봉이라고도 부른다(두산백과)
▼ 아막(阿莫)성터..신라 백제의 격전지
‘아막’이란 주성(主城)·주곡(主谷)을 뜻한다.
▼ 여원치 마애불상
조선 태조 이성계가, "꿈에 나타나 '황산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 노파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현장 마애불 표지판)
▼ 운보읍 장교리 장동마을에서 바라 본 고남산
▼ 한가운데 눈으로 덮힌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좌측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 고려말 왜구와 격전지 황산(가운데)이 보인다. 우측은 덕두산, 바래봉(좌측부터)
▼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남원 출신 황진 장군
1. 산행일자 : 2019. 11. 20(수)
- 산행거리 : 21.1km(오룩스 gpx 거리..여원재에서 마애불까지 0.5km 포함)
- 산행시간 : 8시간 50분(08:28-17:18)
2. 산행지 : 땅통 백두대간 3구간(여원재-고남산-복성이재)후기 (총31회차)
- 산행코스 : 여원재-장동마을-방아재-고남산(846.5m)-통안재-유치재-매요리-사치재(광주-대구고속도로)-새맥이재-시리봉-아막성-복성이재
3. 누구랑 : 홀로
4. 산행후기
11월 20일, 아침 6 35분 버스를 타고, 한 숨 자고 나니 버스가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을 지난다. 백제시대 때 남원의 옛이름은 고룡군(高龍郡)이었다. 남원 시외버스터미널 정류소에서 여원재가는 7:48 시내버스를 탔는데, 요금은 1천원이고,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버스가 붐빈다. 맨 앞좌석에 앉는다. 버스가 요천 다리를 건너 여원재에 도착했다. 여원재와 운봉은 이성계가 왜구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여원재 들머리에서 400여미터 떨어진 여원치 마애불을 둘러보고 돌아와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코스는 고남산을 올라 매요마을을 거쳐 광주대구간고속도로가 지나는 사치재와 시리봉, 아막성을 거쳐 복성이재까지 가는 21km 산길이다.
남원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한 만인의총이 있는 고을이다. 이번 백두대간 길이 남원을 지나는지라, <처음읽는 정유재란 1597>, <권율과 전라도사람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산행을 준비한다. 남원성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관군 1천명, 명나라 원군 3천명이 나흘 동안 왜구 5만 6천명을 맞아 싸우다가 성내 주민 6천명을 포함하여 1만명이 몰살을 당했다. 왜적은 당시 남원성과 호남지방에서 전공 증거물로 죽은 사람, 산 사람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코을 베어갔다고 한다.
오늘 등산길은 늦가을 서정이 가득한 길이다. 며칠 동안 흐리고 가을비가 오다 맑게 게여 정겨운 시골 마을과 들판을 바라다보며 걷는 길이 정겹다. 또 조망도 좋아 눈으로 덮힌 지리산 천왕봉도 보이고 주변 산너울도 아름답다. 아막산성을 넘어 복성이재에서 산행을 마쳤다. 오늘 민박지는 3년전 백두대간 홀로 산행 때 묶었던 남원시 아영면 성리의 철쭉식당이다. 도착해보니 민박집 여주인은 얼굴이 더 젊어졌다. 민박 방이 두군데인데 전에 잤던 그 방를 배정해 준다. 그러나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샤워하고, 차려온 밥상에 남원 생막걸리를 곁들여 맛나게 저녁식사를 했다. 내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출발하니 아침밥과 도시락을 저녁에 챙겨주라고 하는데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따스한 밥과 국, 도시락을 챙겨준 여주인께 감사 드린다.
남원 출신, '사이다' 같은 황인 장군 소개
황인 장군의 자는 명보로, 세종 때 황희 정승의 5대손이다. 남원시 주생면 출생으로 27세 과거시험 무과에 합격하여 1592년 권율장군과 함께 이치(완주군 운주면의 금남정맥 배재) 전투에서 왜군의 호남진입을 막았다. 당시 종6품 화순 동복현감이었는데, 전투마다 승리하여 익산군수(종4품)를 거쳐 충청병사(종2품)까지 승진한다.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는 행주산성에서 패하고 명나라 군사에 밀려 부산까지 남하한 일본의 분풀이 싸움이었다. 10만명을 동원하여 7천명의 조선 병사, 의병을 상대한 전투다 보니, 워낙 전력차가 커서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 의병장 곽재우 등이 몸을 사려 참여하지 않게 된다. 곽재우가 황진 장군을 아까워하며, "왜 장군은 충청병사이면서 사지에서 싸우려하는가?" "다른 병사는 다시 구할 수 있지만, 님 같은 용장을 잃는 것이 너무 큰 손실이네"하면서 전투참여를 적극 말렸다고 한다. 황진 장군은 "김천일 의병장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며 수성장으로 군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전투 8일째에 시체속에 숨어 있던 왜군 저격수 총에 이마를 관통 당해 죽고 만다.
황진 장군은 '서 있기만 해도 부하들에게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던 장수'였는데, 불의의 전사로 진주성은 다음날 무너지고 만다. 비록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했지만, 9일동안 왜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 남원성이 있는 전라도를 감히 침입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돌아가고 만다. 4년 뒤 정유재란때야 비로소 대군으로 남원성과 전라도를 유린하게 된다.
☞ 황진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창의사(김천일)와 더불어 공약(公約)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선조 수정 실록 27권)
* 행주대첩의 일등공신은?
답은 화차이다. <권율과 전라도사람들> 책을 보면 권율 휘하 2,300명이 왜적 3만명을 물리치는데, 권율은 행주대첩이 끝난 뒤, "장성사람 변이중이 만든 화차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신무기 화차는 포와 기관총 두가지였다. 기관총의 경우 수레 위에 40개의 승자총으로 총통기를 설치하고 총의 심지를 이어서 차례로 쏘았다.
권율의 가계를 보면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고, 사위는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이다. 권율은 46세가 되서야 문과에 늦깍이 합격했고, 임진왜란 1년전 류성룡이 선조에 건의하여 2단계를 초고속 승진시켜 의주목사로 보낸 인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거 광주목사로 임명하여, 후에 이치전투, 행주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 공으로 나주목사, 전라도감사(관찰사), 도원수로 고속 승진한 육지전투의 대표 장군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후대에 전해져 그 전공이 소상히 전해졌으나, 권율장군의 전투 기록은 병자호란 때 고향집 강화도에 보관된 자료가 모두 불타서, 행주 및 이치 대첩비, 조선왕조실록으로 전공을 가름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이 전투가 끝난 후 권율 장군은
주위에 널려 있는 일본군의 시체들을 모아 찢어버린 후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나무위키 백과사전)
☞ 그러나 행주산성이 너무 취약해서, 몇일 후, 권율은 튼튼한 파주산성으로 군사를 이동했다.
카프리가 걸은 오룩스 지도
21.1km를 걸었다.
고도표
산행 지도
3구간 산행계획서
광주버스터미널에서 06:35 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남원가는 직통버스
남원버스터미널
시내버스를 타고 여원치로 감. 요금은 1천원.
07:48 달궁가는 148번 버스
버스는 섬진강의 지류인 요천을 건넌다.
여원재 도착
먼저 여원치 마애불을 들리고
여원치 마애불
다시 여원재 정상으로 돌아와
전주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들머리이다.
여원재 소개
장동마을 거쳐 방아치로
농민군이 패퇴했다고 쓰여있다. 관군은 방아산성 성돌을 중요무기로 사용
솔밭길을 걸어
계단을 오르니
좌측이 합민성(방아산성)이고, 멀리 남원 시내와 교룡산성이 보인다.
남원시내 오른쪽에 있는 성이 교룡산성
교룡[ 蛟龍 ]
뱀과 비슷한 몸에 비늘과 사지가 있고, 머리에 흰 혹이 있는 전설상의 용.
백제 시대때는 고룡군(古龍郡), 196년(초고왕 31)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산동면 사람들은 천황산, 산너머 보절면 사람들은 만행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고남산 정상엔 산불감소초소가 있고
어르신이 식사를 하고 계셨음.
대삼각점
1등 본점은 40㎢에 1점으로 삼각점간의 평균거리는 45㎞이다.
삼각점[ 三角點 ]
삼각측량의 기초가 되는 위치 및 높이의 기준점을 말한다. 중요도에 따라 1등에서 4등까지의 등급이 있다. 1등 본점은 40㎢에 1점으로 삼각점간의 평균거리는 45㎞, 1등 보점(補點)은 40㎢에 2점으로 평균거리는 25㎞, 2등점은 4㎢에 1점으로 평균거리는 8㎞, 3등점은 4㎢에 1점으로 평균거리는 2㎞로서, 잘 보이는 산정이나 구릉 등에 매설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각점 [三角點, trigonometrical point, triangulation point] (자연지리학사전, 2006. 5. 25., 한국지리정보연구회)
고남산 지도
제가 2015년도에 홀대간 하면서 찍은 사진...
지금 것은 너무 글자가 바래서...
고남산 정상에서 바라 본 북쪽 조망..
운봉읍과 지리 서북능선이 보이고...
지난온 백두대간 길을 되돌아보고
이 구간을 다섯번째 걷다보니.. 이제 산길이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한데
그래도 머리에 남기려면... 산행후기를 정성껏 쓰는 방법 뿐이 없다고 생각하네요..
번암면 동화호에서 흘러오는 물이 요천이군요..
대간과 개동지맥 사이가 요천이고, 개동지맥과 성수지맥 사이는 오수천
고남산 송신탑
통안재
매요마을 회관
매요 휴게실 할머니는 보이지 않아 쓸쓸함으로 지나고..
몇 년전 홀대간할 때..원광대 병원에 다닌다고 했는데..
좌측 덕두산, 우측이 바래봉
유치삼거리에서..대간 길은 다시 산길로 접어들고
점심시간...밥이 달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네요.
오늘 신문에서 읽었고..
지나온 고남산을 되돌아보고
광주대구고속도로...하얀 아치탑이 지리산휴게소의 88고속도로 준공기념탑
유홍준작가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지리산휴게소를 엄청 나무랍니다.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지 않은 곳에 세웠다고"...저도 동감입니다.
후손들도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천천히, 여유를 갖고 공사를 해야 되겠죠?
사치재
사치재 동물이동통로
맨 좌측이 고남산...가운데 뽀쪽한 산이 천황봉..맨 오른쪽이 장수 대성산
가운데 지리산 천황봉이 보이고...눈으로 덮혀 있고
지리산휴게소 준공탑도 지척
왼쪽은 삼봉산, 가운데는 지리산천황봉, 오른쪽은 덕두산과 바래봉
가운데 야트막한 산은 황산(이성계가 왜적과 싸운 산)
20여년전쯤..직장에서 지리산을 놀러가서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와 싸웠다는 애기를 듣고 그 배경을 몰랐는데..
진실은 이렇다. 고려말 왜구가 충남 서천쪽에서 배로 상륙했는데, 최무선이 화포로 배를 불태워버리고 만다.
배를 잃은 왜구들은 상주까지 노략질을 하다..지리산으로 들어온다. 공민왕이 이성계를 파견하여 왜적을 물리친 전투가 바로 황산전투인 것이다.
언젠가 기회되면 황산을 오르고 싶어 지도 한 장 올리고
태양열발전소 같은 것이 설치된 곳이 황산이다.
이제 덕두산과 바래봉은 멀리서 산의 형태만 봐도 알 것 같다.
새맥이재
내일 가야할 봉화산, 함양 계관산이 보인다.
남원시 아영면, 함양군 백전면 들판이 보이고..맨 오른쪽이 연비지맥이 연비산이다.
백제에서는 아막산, 신라에서는 모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아막성터...정성스럽게 몇 장 찍었다.
복성이재
복성이재 유래
내일 새벽에 오를 복성이재 육십령 구간 들머리
좌측은 남원시 번암면, 우측은 남원시 아영면
약 1km를 걸어 철쭉식당에 도착
샤워하고..남원 막걸리에 밥을 맛나게 먹고 잠을 잔다.
오늘도 잼나게 라디오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 카이샤르, 변신이야기를 들었다.
자꾸 듣다 보니, 산행 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
산행 참고 자료
의(義)로 뭉친 3인
임진왜란 개전 20여일만에 서울(한양)을 내준 조선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신하고, 명나라가 참전한다. 왜군은 임진강을 넘으면서 이순신에 의해 차단된 서해 보급로 대신에 육로 확보를 위해 호남을 침입한다. 웅치, 금산성, 이치 전투가 벌어지고, 권율과 전라도 사람은 호남을 사수한다. 권율은 서울 수복을 위해서 수원 독성산성과 행주산성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義)로 뭉친 3인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인물은 권율이다. 권율은 46살 늦깍이로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한 권율은임진왜란 때 육상 전투에서 3전 전승을 거뒀고, 행주산성전투에서는 2,300명의 병력으로 13배인, 3만명의 왜적을 물리친 장수다. 권율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고, 사위는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이다.
두번째 인물은 광주의 의병장 고경명이다. 고경명과 두 아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60세의 고경명은 둘째 아들과 금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순절했고, 큰 아들은 2차 진주성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순절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은 과거시험 문과에도 합격한 엘리트였다.
세번째는 남원 출신 황진이다. 과거시험 무과에 합격한 황진은 이치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왜군을 물리쳤고, 충청병사로 재직시 10만명이 넘은 왜군에 1만명으로 외롭게 싸운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다 순절하였다. 곽재우 의병장이 자기 관할도 아니면서 왜 불나방처럼 뛰어드냐고 말했지만, 김천일 의병장을 도우며 꿋꿋이 싸우며 목숨을 바친 장군이다. 결국 진주성전투에서 6만명이, 남원성 전투에서는 1만명이 전몰돼지만, 왜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 전투였고, 일본인이 더 이상을 조선인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든 싸움이었다
남원시 지도
청주의 노준양 선생님이 만든 지도...닉은 산바람님
저와 다음 블로그 친구임. 이 정도 지도를 만들고 나면 주변 산수, 도로, 지명이 저절로 머리에 입력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