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020-1권) 마운틴 오디세이

카프리2 2020. 1. 20. 16:56

(심산의 산악문학 답사기이다)

 

 

 

■ 책을 읽은 배경

- 산서에 대해 알고 싶어서  

 

 

 

■ 개 요

 

1. 읽은 날짜 : 2020.1.2(목)-1.9(목)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 : 심산 / 바다출판사/ 511


 

3. 제목 : 마운틴 오디세이(심산의 산악문학 답사기)

 

 

4. 목차

 

01 기쁨의 여신이 허락한 짧은 숨결외 40건

 

 

 

 

 

■ 지은이 : 심산

 

- 연세대 불문학과

- 2005년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참가

- 비트, 태양은 없다 등의 시나리오와 마운틴 오디세이, 히말라야의 눈물을 씀

 

 

 

■ 책을 읽은 소감

 

- 두번째 읽게 된 책인데..산서의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됨

- 등산을 하려면 산도 타고 산서도 읽어야 함. 심산은 글솜씨가 뛰어난 작가임

 

 

  

 

■  밑줄을 그은 글

 

-  산서가 오직 산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산서는 무엇보다도 등반 행위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곧 산과 인간이 빚어내는 격렬한 드라마다. 한국 산악계의 원로이며, 산악문학의 보급과 창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김영도 선생은 "산서가 산만을 묘사한다면 산서로서 가치가 없다"(하늘과 땅 사이 서문)고까지 단언한다. 거대한 대자연에 맞선 인간의 드라마와 그 희노애락의 파노라마가 산서의 세계 속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산과의 부딪힘이 빚어낸 책이다. 그리고 산은 그 책 속에 드넓고 높게 펼쳐져 있다.

 

- 꿈속의 알프스에서는 한때 대책없이 산에 미쳐 살았던 '우리 젊은 날의 초상'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흑백 스냅사진처럼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있다.

 

- 이 책의 초판인 '심산의 마운틴 오딧에이'의 부제는 '산이 만든 책, 책 속에 펼쳐진 산'이다. 나는 초판 서문에서 부제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거대한 대자연에 맞선 인간의 드라마와 그 희노애락의 파노라마가 산서의 세계 속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산과의 부딪힘이 빚어낸 책이다. 그리고 산은 그 책 속에 드넓고 높게 펼쳐져 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산서 속에서 우리는 산에 오르는 인간을 만난다. 그 만남이야말로 산서를 읽는 최고의 기쁨이다.

 

- 영광의 북벽의 초판이 나온 것은 1989년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의 집필이 완료된 것은 1982년 여름이었다. 정광식이 1956년생이니 불과 스물여섯 살 때 해치운 등반이요 집필한 산악문학이다. 그로부터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이 작품을 뛰어넘는 산악문학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을까? 그만큼 '영광의 북벽'이 걸출한 작품이라는 것이 우호적인 해석이요 그만큼 한국의 산악문학계가 낙후되었고 게으르다는 것이 비판적인 해석이다.

 

- 라인홀트 매스너가 주창한 존재등반론

요컨데 그는 정복을 위한 등반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등반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징하게 깨어 있는 상태로 삶을 지속시키고 싶어서 '죽음의 지대'를 찾는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지대에서 삶의 한계에 부딪쳐본 자만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깨달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무' 즉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깨달음이 그를 자유롭게 만든다.

 

- 고대 인도철학에서는 인간을 '삶을 고행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삶을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자'로 나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에무라 나오미야말로 '삶을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세계챔피언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훗날 '머메리즘'이란 명명된 이 남자의 등반관은 이것이다. 어떻게든 오르기만 하면 다가 아니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무슨 등반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오르느냐'이다. 굳이 보다 어려운 루트를 골라 오르는 것이야말로 알피니즘의 핵심이다. 이전까지의 등반사를 지배해온 '등정주의'가 폐기되고 '등로주의'가 전면으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 가이드 없이 산행하는 것 역시 등로주의와 더불어 머메리즘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다. 그는 가이드를 따라 그저 가축처럼 내 몰리며 오르는 산행에서 도대체 무슨 기쁨을 느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은 값비싼 행락이요 고역이며 인간의 자존심에 대한 포기와 다름 아니다.

 

- 길이 끝난 데서부터 등산은 시작되고, 일상의 언어가 끝난 데서부터 시가 비롯된다는 그의 등산관 혹은 시관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 호랑이 등뼈는 의연하다.

곰곰히 들여다보면 그 지도 안에는 분단이 없다. 만주대륙을 향하여 포효하는 호랑이의 등뼈를 갈라놓은 것은 못난 인간들의 역사요 이념일 뿐이다. 아니다. 그 호랑이의 등뼈는 한 번도 꺽인 적이 없다. 이념과 체제가 그 발치에서 제아무리 분탕질을 쳐대도 언제나 그곳에 의연히 남아 있던 호랑이 등뼈가 바로 백두대간이 아닌가?

 

- 하얀 능선에 서면은 1984년 1월 1일부터 3월 16일까지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의 태백산맥을 단독 주파한 남난희의 산행일기다.

 

- 홀로 집채만 한 배낭을 짊어진 채 길도 나 있지 않은 겨울 산을 끝없이 걸어가고 있는 스물다섯 살의 산 처녀(산행 당시의 나이)를 상상해보라. 가슴이 먹먹하다. 배낭이 무게에 짓눌린 그녀는 새삼스럽게 왜 인간은 먹어야만 살 수 있는지를 원망한다.

 

-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 그들은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허리를 한번 훑어서 이가 한 웅큼 잡히지 않으면 진정한 빨치산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이 망할 놈의 이는 숨이 끊어져 체온이 식기 시작해야 밖으로 나온다. 빨치산의 시체 밖으로 바글바글 기어 나오는 이의 모습은 흡사 싸라기를 뒤집어쓴 것 같다.

 

- 일어버린 지평선은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이상향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든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우리에게 묻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가치는 영원불멸한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이 뼈아픈 만큼 샹그리라가 되돌려주는 해답은 더없이 매혹적이다.

 

- 발에 밟히는 흙의 감촉이 부드러운 걸 보니 완연히 봄이 왔음을 느낀다.

 

- 북악의 경우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동쪽으로는 낙산(125미터)이,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남산(262미터)이 버티고 있어 그 안의 분지에 왕궁을 짓고 도읍을 일으켜 세울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을 서울의 내사산이라고 한다.

 

- 여기에 덧붙여 서울의 외사산을 짚어보면 그 정확한 놓임새가 빚어내는 기하학적인 균형에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동쪽으로는 용마산(348미터), 서쪽으로는 덕양산(125미터, 행부산성이 있는 산), 남쪽으로는 관악산(629미터)이 정확히 내사산을 확대 복사한 형국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매일매일을 내 생애 유일한 날처럼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 나를 부르는 숲에 필적할 만한 종주산행기를 아직도 우리가 생산해내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가슴을 쓰리게 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종주했건만 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보고서들뿐인가?

 

- 1950년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 등정 이후 1964년 최후의 8000미터인 사샤팡마가 등정될 때까지를 '히말라야 등반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