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백두대간3차(북진.노량)

산경표 이야기

카프리2 2017. 2. 16. 15:34

우리가 기대어 사는 땅은 산줄기와 물줄기로 구성돼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그 산줄기와 물줄기의 갈래를 보다 알기 쉽게 정리해 놓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산줄기의 갈래를 알기 쉽게 만든 것이 <산경(山經)>이다. 반면 물줄기를 정리한 지리서는 <수경(水經)>이다. 나라 땅의 <산경>은 조선 영조 때 실학파의 지리학자인 신경준(旅庵 申景濬·1712∼1781)이 영조 45년(1769)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경표>다. <수경>은 조선 말기의 유명한 실학파 학자인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1814년 강진에 유배돼 있을 당시에 쓴 <대동수경(大東水經)>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들 <산경>과 <수경>을 합치면 나라 땅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일목요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산경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큰 줄기(백두대간)를 중심으로 많은 가지(정맥)들이 뻗어 있는 나무모양과 같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살펴보면 서로 얽히고설켜 있으나 결코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지 않으며 산줄기도 물줄기를 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땅끝과 다대포 몰운대까지 이어져 있으며 이 산줄기가 여러 하천의 분수령(유역)임을 알 수 있다.



신경준의 산경표

신경준은 43살 때인 영조 30년(1754)에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일하다 서산군수 장연현감을 지내고 58살 때 정 3품 당하관인 종부시정(宗簿侍正)을 끝으로 고향인 전라도 순창으로 낙향한다. 이 무렵 영의정이던 홍봉한은 신경준의 사람됨을 듣고 영조에게 천거해서 비국랑(備局郞) 직책으로 다시 관직에 오른다. 영조는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여지편람(與地便覽)>의 감수를 맡겨 편찬하도록 한다. <여지편람>은 말 그대로 땅 모습을 보기 쉽도록 만든 책인데 바로 <여지편람>의 일부가 <산경표>이다.

<여지편람>은 모두 2권 2책(乾冊과 坤冊)으로 구성돼 있는데, 건책이 바로 <산경표>이며,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서울과 각 지역간의 거리표)>다.



정약용의 대동수경

정약용은 우리 나라 역사와 지리의 관건이 되는 문제들을 논술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저술하고 3년 뒤에 <대동수경>을 집필했는데, 여기에는 강의 발원지로부터 입해처(入海處;하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강의 원류와 지류 및 그에 합류되는 다른 강들에 대하여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의 명칭과 강이 경유해 가는 지역의 연혁, 역사적 사건, 고적, 전설 등과 관련된 일체의 모든 것들을 서술하고 동시에 역사와 지리적 고증을 한 것이 특징이다. 다시말해 <대동수경>은 역사, 지리를 동시에 설명하는 일종의 지리지(地理誌)다. <대동수경>은 다산이 실제 집필에 착수하기 수십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계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28살 때 정조의 물음에 대답해 올린 <지리책(地理策)>을 통해 지리학이 나라와 사회, 경제생활에서 차지하는 불가결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우리 나라 지리서들이 가지는 결함과 이의 극복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다산은 이 <지리책>을 통해 <대동수경>의 내용이나 편찬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전대미문의 원대한 역작을 구상했던 다산은 그후 25년이 지나고 나서야 몸소 실천에 옮겨 <대동수경>을 집필하게 된 것이다.

다산은 이 <대동수경>을 집필하면서 우리 나라와 중국의 사서, 지리서, 기타 저작물 100여 종류를 참고해 인용했다. 인용한 서적을 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략, 고려사, 동국통감, 여지승람, 국조보감, 동사강목, 동국지지, 징비록, 성호사설, 택리지 등이며, 정항령의 지도와 윤두수의 지도를 비롯한 일련의 지도들이 이용됐다.

다산의 실사구시적 연구방법과 박학성, 천재성, 그리고 조국의 역사와 지리를 해명하려는 열렬한 정열과 끊임없는 노력이 바로 이 같은 성과를 달성하게 한 원동력이다. <대동수경>은 국토지리와 역사연구에 바쳐진 저작이지만 여기에는 고고학, 민속학, 서지학, 금석학, 고어, 이두, 신화, 전설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귀중한 연구성과들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대목은 우리 국토의 전체를 망라하지 못하고 록수(압록강), 만수(두만강), 살수(청천강), 패수(대동강), 저수, 대수(임진강) 등 북한지역의 6대 강과 지류들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미완의 저작인 셈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대동수경>에는 다산의 제자인 이청(李晴)의 견해가 첨부돼 있는 점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정다산이 부르는 것을 이청이 받아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이청의 견해가 첨부돼 있다.



산경표 공부

<산경표>는 조선시대 문헌으로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본은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 정신문화연구원의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 등 모두 세 가지다. 이들은 내용이 모두 같다.

<산경표>의 내용을 보면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大幹)에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다 다시 가지친 기맥(岐脈)을 기록했다. 그리고 모든 산줄기의 연결은 자연 지명인 산이름, 고개이름 등으로 하고, 기술은 족보 기술법에 따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자연지명은 총 1,650개이며, 이 가운데 산이름과 고개이름이 1,500개 정도이다.

여기에 나타난 우리 산의 산줄기 이름과 순서, 그리고 각 산줄기에 포함되는 산이름 및 고개이름은 다음과 같다.(이는 조선광문회 본의 산경표에 나타난 지명들이다. 오류나 해석상 차이는 모두 무시되고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부록에 수록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참고하면 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白頭山) 연지봉(檎脂峰) 허항령(虛項嶺) 보다회산(寶多會山) 사이봉(沙伊峰) 완항령(緩項嶺) 어은령(漁隱嶺) 원산(圓山:장백정간의 분기점) 마등령(馬騰嶺) 괘산령(掛山嶺) 황토령(黃土嶺) 천수령(天秀嶺) 조가령(趙哥嶺) 후치령(厚致嶺) 향령(香嶺) 태백산(太白山) 부전령(赴戰嶺) 대백역산(大白亦山) 황초령(黃草嶺) 사향산(麝香山) 설한령(雪寒嶺) 낭림산(浪林山:청북정맥, 청남정맥의 분기점) 상검산(上劍山) 마유산(馬踰山) 횡천령(橫天嶺) 두무산(頭蕪山) 애전산(艾田山) 철옹산(鐵瓮山) 오강산(吳江山) 운령(雲嶺) 무라발산(无羅鉢山) 거차산(巨次山) 토령(土嶺) 장좌령(莊佐嶺) 대아치(大峨峙) 죽전령(竹田嶺) 기린령(麒麟嶺) 재령산(載靈山) 화여산(花餘山) 두류산(頭流山:'무명 지맥'의 분기점. 무명지맥은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으로 연결된다.) 노동현(蘆洞峴) 반룡산(盤龍山) 마은산(馬恩山) 노인치(老人峙) 박달령(朴達嶺) 백학산(白鶴山) 설운령(洩雲嶺) 설탄령(雪呑嶺) 분수령(分水嶺:한북정맥의 분기점) 청하령(靑霞嶺) 추포령(楸浦嶺) 풍류산(風流山) 철령(鐵嶺) 판기령(板機嶺) 기죽령(騎竹嶺) 저유령(猪踰嶺) 추지령(楸池嶺) 판막령(板幕嶺) 쇄령(朝嶺) 온정령(溫井嶺) 금강산(金剛山) 회전령(檜田嶺) 진부령(珍富嶺) 마기라산(磨耆羅山) 흘리령(屹里嶺) 미시파령(彌時坡嶺) 설악(雪岳) 오색령(五色嶺) 연수령(連水嶺) 조침령(曹枕嶺) 구룡령(九龍嶺) 오대산(五臺山) 대관령(大關嶺) 삽당령(揷當嶺) 백복령(百福嶺) 두타산(頭陀山) 청옥산(靑玉山) 죽현(竹峴) 건의령(建儀嶺) 대박산(大朴山) 태백산(太白山:낙동정맥의 분기점) 수다산(水多山) 백변산(白屛山) 마아산(馬兒山) 곶적산(串赤山) 소백산(小白山) 죽령(竹嶺) 도솔산(兜率山) 작성산(鵲城山) 대미산(黛眉山) 계립산(鷄立山) 조령(鳥嶺) 이화현(伊火峴) 희양산(曦陽山) 주현(周峴) 대야산(大耶山) 불일산(佛日山) 화산(華山) 속리산(俗離山: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 구봉산(九峰山) 봉황산(鳳凰山) 웅현(熊峴) 웅이산(熊耳山) 고산(高山) 흑운산(黑雲山) 추풍령(秋風嶺) 계방산(桂榜山) 황악산(黃岳山) 삼성산(三聖山) 우두산(牛頭山) 삼도봉(三道峰) 대덕산(大德山) 덕유산(德裕山) 백암봉(白巖峰) 봉황산(鳳凰山) 육십치(六十峙) 장안치(長安峙:금남호남정맥의 분기점) 본월치(本月峙) 백운산(白雲山) 기치(箕峙) 유치(柳峙) 여원치(女院峙) 지리산(智異山: 낙남정맥의 분기점)

장백정간(長白正幹)

(백두대간의 원산에서 이어짐) 장백산(長白山) 마유령(馬踰嶺) 거문령(巨門嶺) 계탕령(契湯嶺) 구탐령(俱探嶺) 차유령(車踰嶺) 이현(梨峴) 무산령(茂山嶺) 가응석령(加應石嶺) 엄명산(嚴明山) 녹야현(鹿野峴) 갈파령(葛坡嶺) 송진산(松眞山) 백악산(白岳山) 조산(造山) 서수라곶산(西水羅串山)



낙남정맥(洛南正脈)

(백두대간의 지리산에서 이어짐) 취령(鷲嶺) 황치(黃峙) 옥산(玉山) 소곡산(素谷山) 옥녀산(玉女山) 망진산(望晉山) 팔음산(八音山) 천금산(千金山) 무량산(無量山) 여항산(餘航山) 광려산(匡廬山) 두척산(斗尺山) 청룡선(靑龍山) 구룡산(九龍山) 전단산(?檀山) 불모산(佛母山) 구지산(龜旨山) 분산(盆山)



청북정맥(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이어짐) 태백산(太白山) 갑현(甲峴) 도양령(道陽嶺) 적유령(狄踰嶺) 백산(白山) 구현(狗峴) 이파령(梨坡嶺) 매화령(梅花嶺) 극성령(棘城嶺) 우현(牛峴) 차령(車嶺) 아호말령(?號末嶺) 월은령(月隱嶺) 창성사령(昌城街嶺) 남리견자령(南里見子嶺) 대소구계령(大小九階嶺) 송동령(宋洞嶺) 완항령(緩項嶺) 대동사령(大東沙嶺) 소동사령(小東沙嶺) 대방장령(大防墻嶺) 소방장령(小防墻嶺) 세반산(洗畔山) 세정령(洗井嶺) 온정령(溫井嶺) 개막산(蓋幕山) 대성령(大城嶺) 소성령(小城嶺) 천마산(天摩山) 청룡산(靑龍山) 노동현(蘆洞峴) 장현(長峴) 이현(梨峴) 애령(艾嶺) 북송산(北松山) 보광산(普光山) 화산(華山) 동고산(東顧山) 백운산(白雲山) 망일산(望日山) 장화산(長化山) 서림산(西林山) 용골산(龍骨山) 법흥산(法興山) 미라산(彌羅山) 미곶산(彌串山)



청남정맥(淸南正脈)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이어짐) 지막산(只幕山) 광성령(廣城嶺) 생천산(?川山) 동무산(同茂山) 묘향산(竗香山) 검산(檢山) 알일산(謁日山) 장안산(長安山) 묘결산(卯結山) 백운산(白雲山) 고사산(姑射山) 묵방산(墨方山) 도회치(都會峙) 서산(西山) 마두산(馬頭山) 오도산(梧道山) 함박산(含朴山) 도운산(到雲山) 황룡산(黃龍山) 자모산성(慈母山城) 법홍산(法弘山) 호전산(虎田山) 어포현(於抱峴) 도정산(都廷山) 영천산(靈川山) 미두산(米頭山) 진망산(鎭望山) 독자산(獨子山) 두등산(豆登山) 국령산(國靈山) 망해산(望海山) 검암산(儉巖山) 호두산(虎頭山) 아선산(牙善山)굴영산(窟靈山) 봉곡산(鳳哭山) 오석산(烏石山) 화정산(花精山) 석골산(石骨山) 증복산(甑覆山) 자정산(慈正山) 증악산(甑岳山) 광량진(廣梁鎭)



무명지맥(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으로 이어짐)(산경표 15쪽)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이어짐) 회령(灰嶺) 가사산(袈裟山) 고달산(高達山) 개연산(開蓮山)



해서정맥(海西正脈)

(위 무명지맥의 개연산에서 이어짐) 덕업산(德業山) 대롱판(大幇板) 증격산(甑擊山) 만령(蔓嶺) 명월산(明月山) 천자산(天子山) 양파산(梁坡山) 조산(造山) 발은치(勃隱峙) 오봉산(五峰山) 갈현(葛峴) 황룡산(黃龍山) 차유령(車踰嶺) 멸악산(滅惡山) 성불산(成佛山) 취라산(吹螺山) 창금산(唱金山) 불족산(佛足山) 북숭산(北嵩山) 문산(文山) 천봉산(天奉山) 달마산(達摩山) 학산(鶴山) 원통산(圓通山) 극락산(極樂山) 불타산(佛陀山) 미라산(彌羅山) 장산곶(長山串) 해옹지험(穰甕之險)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위 무명지맥의 개연산에서 이어짐) 기달산(箕達山) 천개산(天盖山) 화개산(華盖山) 학봉산(鶴峰山) 수룡산(首龍山) 백치(白峙) 우이산(牛耳山)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摩山) 부소갑(扶蘇岬) 진봉산(進鳳山) 백룡산(白龍山) 풍덕치(豊德治)



한북정맥(漢北正脈)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이어짐) 천산(泉山) 쌍령(雙嶺) 전천산(箭川山) 수우산(水于山) 여파산(餘破山) 오갑산(五甲山) 충현산(忠峴山) 부정산(佛頂山) 대성산(大成山) 백운산(白雲山) 망국산(望國山) 운악산(雲岳山) 주엽산(注葉山) 축석현(祝石峴) 불곡산(佛谷山) 홍복산(弘福山) 도봉(道峯) 삼각산(三角山) 노고산(老枯山) 여산(礪山) 견달산(見達山) 고봉산(高峰山) 장명산(長命山)



낙동정맥(洛東正脈)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이어짐) 유치(楡峙) 마읍산(麻邑山) 말흔산(末欣山) 백병산(白屛山) 고초산(高草山) 검마산(劒磨山) 백령산(白嶺山) 덕현(德峴) 서읍령(西揖嶺) 용두산(龍頭山) 임물현(林勿峴) 죽현(竹峴) 주방산(周方山) 어화산(於火山) 보현산(普賢山) 응봉(鷹峯) <육현(六峴)> 성현(成峴) 무학산(無鶴山) 주사산(朱砂山) 사룡산(四龍山) 지화산(只火山) 단석산(斷石山) 운문산(雲門山) 가지산(迦智山) 천화현(穿火峴) 취서산(鷲栖山) 원적산(圓寂山) 금정산(金井山) 화지산(花池山) 엄광산(嚴光山) 몰운대(沒雲臺)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이어짐) 회유치(回踰峙) 구치(龜峙) 연치(燕峙) 피반령(皮盤嶺) 선도산(仙到山) 거죽령(巨竹嶺) 상령산(上嶺山) 상당산(上黨山) 분치(粉峙) 좌구산(坐龜山) 보광산(普光山) 봉학산(鳳鶴山) 증산(甑山) 마곡산(麻谷山) 보현산(普賢山) 소속리산(小俗離山) 망이산(望夷山) 주걸산(周傑山) 칠현산(七賢山)



한남정맥(漢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이어짐) 백운산(白雲山) 구봉산(九峯山) 대소곡돈현(大小曲頓峴) 성륜산(聖倫山) 수유산(水踰山) 부아산(負兒山) 보개산(寶盖山) 석성산(石城山) 객망현(客望峴) 광교산(光敎山) 사근현(沙斤峴) 오봉산(五峰山) 수리산(修理山) 오자산(五子山) 소래산(蘇來山) 성현(星峴) 주안산(朱安山) 원적산(元積山) 경명산(鏡明山) 북성산(北城山) 가현산(歌絃山) 약산(藥山) 문수산(文殊山)



금북정맥(錦北正脈)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이어짐) 청룡산(靑龍山) 성거산(聖居山) 망일치(望日峙) 월조산(月照山) 의랑치(義郞峙) 차령(車嶺) 쌍령(雙嶺) 광덕산(廣德山) 각흘치(角屹峙) 송악(松岳) 납운치(納雲峙) 차유령(車踰嶺) 사자산(獅子山) 우산(牛山) 구봉산(九峯山) 백월산(白月山) 성태산(星台山) 오서산(烏栖山) 보개산(寶盖山) 월산(月山) 수덕산(修德山) 가야산(伽倻山) 성국산(聖國山) 팔봉산(八峰山) 백화산(白華山) 지령산(知靈山) 안흥진(安興鎭)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의 장안치에서 이어짐) 노치(蘆峙) 수분현(水分峴) 성적산(聖跡山) 팔공산(八公山) 성수산(聖壽山) 중대산(中臺山) 마이산(馬耳山)

금남정맥(錦南正脈)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에서 이어짐) 주줄산(珠?山) 왕사봉(王師峰) 병산(屛山) 탄현(炭峴) 이치(梨峙) 대둔산(大芚山) 도솔산(兜率山) 황령(黃嶺) 개태산(開泰山) 계룡산(鷄龍山) 판치(板峙) 망월산(望月山) 부소산(扶蘇山) 조룡산(釣龍山)



호남정맥(湖南正脈)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에서 이어짐) 웅치(熊峙) 사자산(獅子山) 백운산(白雲山) 정각산(正覺山) 유치(鍮峙) 색장치(塞墻峙) 운남치(雲南峙) 묵방산(墨方山) 운주산(雲住山) 굴치(屈峙) 칠보산(七寶山) 둔월치(屯月峙) 갈치(葛峙) 내장산(內藏山) 백암산(白巖山) 곡도치(曲道峙) 멸치(滅峙) 추월치(秋月峙) 용천치(龍泉峙) 금성산성(金城山城) 과실산(果實山) 옥천산(玉泉山) 만덕산(萬德山) 무등산(無等山) 경산(景山) 구봉산(九峯山) 천운산(天雲山) 중조산(中條山) 여점산(呂岾山) 화악산(華岳山) 용두산(龍頭山) 억불산(億佛山) 사자산(獅子山) 가야산(伽倻山) 주월산(舟月山) 금화산(金華山) 노주산(路周山) 금전산(金錢山) 분계치(分界峙) 조계산(曹溪山) 동리산(洞裏山) 송현(松峴) 계족산(鷄足山) 도솔산(兜率山) 백운산(白雲山)





이와 같이 산경표 상에 나타난 산줄기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으로 된 것이 백두대간, 장백정간 두개, 해서나 호남처럼 지방이름을 딴 것이 두개, 나머지 11개는 모두 강의 이름을 따서 그 강의 남북, 또는 동쪽으로 위치를 표시했다. 산줄기 순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중심 산줄기로 하고, 여기서 가지친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우선하고, 북쪽에서부터 가지친 차례대로 순서를 매겼다.

산경표의 유리한 점은 산줄기 이름을 강에서 따와 정맥의 정의를 강유역의 경계능선, 다시말해 분수령으로 삼았기 때문에 강의 위치나 유역의 넓이, 모양새를 간단하고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지리인식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누구나 쉽게 우리 땅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산경표는 언제부터 전해져 왔는가

앞서 산경표의 편찬자를 신경준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는데, 사실 아직 누가 산경표의 체계를 정립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최남선이 발간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근거로 하면 여암 신경준이 산경표를 편찬하고 연구한 것으로 대체로 확인되고 있지만, 산경표가 신경준의 연구 업적이라는 데는 논란이 많다.

논란의 여지는 여암이 산경표를 편찬한 시기 이전에 제작된 우리 나라 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의 우리나라 부분, 그리고 우리 나라 전도 중 가장 오래된 1557년경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 284호)를 보면 산경표의 대간과 정간, 정맥, 그리고 그로부터 가지친 기맥까지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김정호의 <동여도(東輿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지도제작에도 산경표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 고지도에서 보이는 이같은 산경 표현은 나라 땅의 모두가 산으로 이루어져 이곳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상식을 그대로 지도상에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는 이미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남긴 <옥룡기(玉龍記)>를 보면 "우리 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해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이라는 대목이 이미 등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여암이 산경표를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1769년 이전에 성호 이익(1681∼1763)이 편찬 집필한 <성호사설>에도 백두정간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에 기록된 백두정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두정간 ; 백두산은 우리 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철령부터 서남쪽으로 뻗은 여러 산맥이 모두 서남쪽으로 줄달음쳤다. 철령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서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본줄기이고 그 중간에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 갔으니 이것이 풍수에서 말하는 버들가지(楊柳枝)라는 것이다.(중략) 태백산 소백산 이상의 산세가 이러하므로 물이 모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영남지방만은 동래와 김해를 좌우로 싸고 돌아서 문막이가 되었다. 이것은 곧 산이 끝난 곳에 물이 합류된 형국으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흔적없이 제거된 것이다. 왼쪽으로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산의 큰 산맥과 더불어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같이했다. 거북과 자라, 물고기가 생산되며 모든 물자가 풍부하다. 오른쪽 산맥은 지리에 이르러 끝났는데 그 상태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온 듯 웅장하고 기운차서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글로써 산경표가 정리되기 이전에 이미 산경표의 개념이 지도제작 과정에 도입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산경표가 편찬된 1769년경 보다 300∼400년 전인 1500년대 이전에 이미 산경표 이론은 정립돼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으로 누적된 이론을 여암 신경준이 족보 기술식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산경표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산경표는 우리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지리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집대성한 고유의 지리서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산경표와 교과서에서 배운 산맥

가장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고유의 지리서인 <산경표>는 그러나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곁은 한동안 떠나 있다가 근년들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광복 이후 아직도 우리 나라 사회과 부도나 각종 교과서에는 <산경표> 대신 산맥 개념이 안방처럼 들어앉아 있다.

우리가 배워온, 그리고 지금도 교육현장에서 교육되고 있는 산맥은 장백산맥을 비롯해서 마천령,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언진, 멸악, 마식령, 태백, 추가령(구조곡), 광주, 차령, 소백, 노령 산맥 등이다. 이들 '산맥'은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여러 산들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배운 산맥은 산들이 길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산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에는 계곡을 건너 다시 산을 따라가다 강도 건너면서 거의 일직선상으로 이어지는 인위적인 선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 나라의 저명한 지리학자들조차도 소백산맥이, 또는 태백산맥이 정확하게 어디서 어디까지인지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산맥 개념은 일본의 지질학자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朗)의 우리나라 지질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그는 1900년과 1902년 두차례 14개월 동안 우리 나라 지질을 연구해 그 결과는 1903년 동경대학에 '조선산악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당시 우리 나라를 노리던 일본인들의 수탈기초 조사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의 지질구조선, 즉 지하자원의 실태를 파악함으로써 일본의 수탈자료로 활용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일본의 지리학자인 야쓰 쇼에이(矢津昌永)라는 사람은 1904년에 '한국지리'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고토의 논문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우리 나라 고유의 산경 개념이 설 땅을 잃고 만 것이다. 당시 최남선 같은 이는 이를 경계해서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를 발간하는 등 무진 애를 썼으나 끝내는 조국 광복후 우리의 지리학자들이 분별없이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산맥개념을 아무런 검증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바람에 국적 불명의 산맥개념이 학교에서 아직도 교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