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가까운 지역에 살다 보니...인연도 등산도 많다.
카프리 블로그에 지리산 입산기록을 관리하고 있다. 현재까지 천왕봉 37회, 주능선 종주 15회아디.
나의 최초 지리산 입산은 1977년도이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때, 구례에 사는 친구때문에 4명이서 1박 2일 지리산을 갔다.
그때만 해도 성삼재 도로는 없었다. 무조건 화엄사에서 올랐다.
토요일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화엄사를 가서...등산을 하다 보니 화엄사에서 코재까지 오르는 중간쯤에서 텐트를 치고 잤다.
다음날은 노고단 정상을 거쳐 피아골로 하산했다. 피아골로 내려오는데 얼마나 바위가 많던지...돌을 건너뛰며 연곡사로 하산했던 기억이 있다.
군용텐트, 담요, 코펠, 버너, 쌀을 메고서...
이번 책은 지리산과 구례연하반이다. 일주일전 읽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과 연계하여
지리산 종주에 대한 역사지리를 정리해 보고 싶다.
■ 책을 읽게 된 배경 : 지리산 종주 역사유래 탐구
■ 개 요
1. 읽은날짜 : 2018. 4.. 29(일) - 5. 1(화)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수 : 문동규, 박찬모 편저/ 태학사 / 544
3. 제목 : 지리산과 구례연하반
4. 목차
서문, 연하반의 발자취
Ⅰ. 지라산의 문화와 자연, 국립공원
Ⅱ. 자료편 : 구례연하반과 지리산국립공원, 지산 우종수
1장 구례연하반과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운동
2장 구례연하반(지리산악회)의 회지 및 월보
3장 사향노루 및 섬진강 보호.보전 관련 활동 자료
4장 지라산의 설화
Ⅲ. 자료 원문편
■ 편저자 문동규
-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편저자 박찬모
-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인문한국 교수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책을 읽은 소감
- 지리산 주종주로 개척사를 알게 되었다.
- 도벌에 막기 위해 지리산국립공원화를 추진한 선조의 노력을 알게 되었고,
연하반이 지은 연하천, 연하선경, 음양수, 총각샘, 삼도봉 유래를 알게 되었다.
- 톱과 낫으로 등산로를 개척한 선배의 덕분에 지리산을 편안히 등산하고 있다.
5.6(일) 지리산 화대종주를 하며 선조의 자취를 생각하며 걷고 싶다.
■ 책의 주요 줄거리
- 연하(煙霞 연기연,놀하)는 원래 산수 즉 자연을 뜻하는 청아한 말이고 보니 자고로 세속적 부귀와 공명을 부운처럼 여기고 속진을 떠나서 한운야학을 벗삼아 요산요수 아유양기하는 현인달사를 연하인이라 부른다.
- 구례연하반(지리산악회)의 족적 3가시
1) 산악단체로서 지리산 종주 등반로 개척
2) 산림 도벌을 막기 위해 지리산 국립공원화 추진
3) 지리산 자연보호활동
- 연하반이 지은 대표적인 이름 : 연하천, 연하봉, 덕평봉, 음양수, 총각샘
지리 10경 정리
- 우종수 약력 : 구례중학교 교사,
- 연하반 연혁 및 중요실적
1955년 5월 5일 구례연하반 발족
1955년 6월 지리산 노고단(1,506m) 등반
1956년 8월 지리산 반야봉 등반
1957년 8월 지리산 천왕봉 종주등반코스 개척
1958년 7월 지리산 천왕봉 종주등반코스 재답사
1963년 7월 지리산 천왕봉 종주등반 코스 확정
1967년 12월 지리산이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됨
■ 반야봉 등반기(구례연하반)
1955년 노고단을 초등한 연하반은 1956년 여름 반야봉을 올랐다. 당시에는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정순덕 씨 1963년에 체포됨) 구례경찰서에서는 반야봉에 오르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다. 연하반은 개개인 인적사항과 동행일정을 상세히 적은 '지리산 입산허가서'를 구례경찰서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았다. 산행 인원은 8명이었다. 군용A텐트 4개, 반합, 남비, 군용수통, M1소총 장착용 대검, 낫, 톱, 군용 야전용 삽 등 야영에 필요한 등산장비를 구입하였다.
등산코스는 구례읍 출발 화엄사-노고단-대판이봉-임걸령-반야봉(되돌아 옴), 첫날 점심은 노고단에서 밥을 해 먹기로 했으며, 야영은 샘이 있는 임걸령에서 하기로 했다.
구례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도보로 봉북리 숯거리를 지나 서시천 징검다리를 건넌 후 마산면 장동을 거쳐 화엄사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화엄사에서 악명 높은 코재(코가 땅에 닿을 만큼 경사가 심한 구간을 일컫어 코재라고 함)을 지나 무넹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 날씨가 좋아서 멀리까지 잘 보였다. 현재 노고단 대피소가 있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였다. 샘 주위에는 봐주는 사람도 없이 원추리, 둥근 이질풀, 동자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선도샘(노고단 대피소 부근에 있었던 샘 이름)은 정비가 안되어 있었다. 야전삽으로 물이 충분히 고일만큼 파서 샘을 정비하였다. 밥을 지을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된장국에 넣어 끓이기 위해 지보(비비추) 잎을 뜯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샘 주위에는 곰취가 지천이었다. 질기지 않은 속잎만 골라서 뜯었다. 반합 네 개를 큰실하고 곧은 나무가지에 끼우고 양쪽에 받침목을 세워 고정시켰다. 쉬지 않도록 삶아서 된장에 버무려 놓은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삶아 칼로 잘게 두드려 고추장에 볶은 반찬이 훌룡했다. 당시에는 순수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제사 때나 명절 때 뿐으로 반합에 나무를 때어 해놓은 쌀밥은 그 맛이 기막혔다.
식사를 마치고 선도샘을 잘 정비해 놓은 후 길상봉을 향했다. 길상봉으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원추리 등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피어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길상봉에 오르니 반야봉과 천왕봉이 잘 보였다. 일행은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천왕봉을 향하여 큰절을 하고 길상봉에서 능선을 타고 대판이봉을 향했다. 능선에는 군인들이 군데군데 땅을 파고 통나무를 잘라서 덮개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부어서 은폐한 전투용 참호가 있었다. 아직 지리산에 빨치산이 남아 있다고 하던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길은 풀이나 조릿대, 키 작은 나무들로 덮혀 있었다.
앞에서 낫으로 치거나 톱으로 썰어가면서 길을 텄다. 대판이봉 부근에 도착하니 원추리 군락지가 나오고 시야가 터졌다. 오른쪽으로 피아골 계곡이 잘 보였고, 반야봉이 가깝게 잘 보였다. 오후 3시 임걸령에 도착하였다. 임걸령 샘도 물은 졸졸 나왔지만, 샘은 메워져 물이 많이 고여 있지 않았다. 샘을 정비하고 텐트를 쳤다. 텐트 겉면에는 양초를 여러 번 꼼꼼히 칠해 비나 안개로 인한 습기를 차단토록 했다. 일행은 밤새 모닥불을 피우기로 하였다. 등행 계획을 세울때 이에 대한 토론을 나눴는데, 호랑이나 표범, 늑대, 곰 등이 무섭고, 여름이지만 고지대이니 새벽엔 추울 것 같으니 밤새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는 사람과 빨치산이 두려우니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결론은 맹수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지만 빨치산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나 무기도 없는 등산객을 해치진 않을 것이므로 불을 피우기로 결정하엿던 것이다.
밤새 모닥불을 피우려면 마른 나무가 필요했다. 일행은 흩어져 많은 땔감을 구했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큰 돌을 주어 둥글게 놓고 그 안에다 모닥불을 피웠다. 밥을 지어먹고 나니 어두어지기 시작하였다. 텐드 바닥에는 풀을 베어 푹신하게 깔고 그 위에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군용 판초우위를 깔았다. 판초우위 위에 군용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누워 군용 담요를덥고 자야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니 여름이지만 쌀쌀했다.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산불로 번질 우려는 없었다. 다들 피곤해서 잠을 자야하는 데 땔감나무를 자주 넣지 않으면 곧 꺼질 것이었다. 오래타도록 땔감나무 중 가장 굵은 나무를 집어넣었다. 밤은 깊어가고 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깊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미세하게 흐르는 안개였다. 10m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닥불은 여태껏 꺼지지 않고 실연기를 뿜고 있었다. 서둘러 밥을 해먹고 반야봉을 향하여 출발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고 길은 종잡을 수 없었다. 낫이나 톱으로 길을 만들어 가면서 오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오르다 보니 절벽 앞에 도착하였다. 반야봉을 올랐던 사람에게 설명을 충분히 들었던 터라 위험하게 절벽을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잡고 기다시피 올랐다. 절벽을 오르니 위에는 안개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산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그 끝에 천왕봉이 우뚝 떠 있었다. 뒤돌아보니 노고단도 섬이 되었다. 반야봉은 세상 밖의 세상이었다. 일행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리산은 참으로 장엄하였다.
반야봉에서 미숫가루를 타먹고 쉬고 있으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구름이 남쪽 골짜기에서 산들성이를 넘어 서서히 북쪽 골짜기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능선의 낮은 골짜기글 넘는 구름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쏟아진 구름은 멀리 가지 못하고 햇볕을 받아 소멸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구름이 걷히니 천왕봉을 향하여 꿈틀거리며 뻗어간 산등성이가 잘 보였다. 저 능선을 따라 천왕봉에 가야 했다. 지리산을 많이 올랐던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노고단에서 능선을 타고 천왕봉에 갔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갔다 온 사람은 많았고, 남원 쪽에서 화개재로 오르거나 화개에서 토끼봉을 올라 반야봉까지 다닌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천왕봉을 꼭 오르리라 마음을 다짐하며 하산 길을 서둘렀다.
■ 천왕봉 최초 종주 등반기(화엄사에서 연하천까지)
1957년 여름방학을 맞아 천왕봉을 오르기로 하였다. 1955년 노고단 등반을 했었던 강기중 선생(구례산동 출신), 이규종 선생(구례읍 출신), 윤승호 선생 등이 참여하기로 하였다. 며칠이 걸릴 것이니 짐이 무거운 수밖에 없어 포터를 두 명 쓰기로 하였다. 빨치산에게 붙들려 짐꾼으로 산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분을 찾아 허락을 받았다. 교감 선생님도 합류하기로 했다. 최종 참가 인원은 구례중학교 교사 7명, 포터 2명, 총 9명이었다. 1956년 반야봉을 다녀온 후 천왕봉 종주등반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장비를 꼼꼼히 챙기고 운동화도 한 벌씩 더 챙겼다. 출발하기 하루 전에는 강기중 선생 자택 마당에 산행에 필요한 물품을 늘어놓고 점검을 하였다. 포터 두 분은 지게를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나머지 물품은 적정히 배분하였다.
1957년 8월 10일 오전 8시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짐이 무거우니 화엄사 계곡을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소 5박을 할 예정이니 6일 동안 먹을 식량과 국거리 등 짐이 만만치 않아, 코재를 오를 때는 몇 걸음 걷다 쉬다를 반복하였다. 눈썹바위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노고단 선도샘이 있는 곳에 오르니 12시가 넘었다. 노고단에 도착하니 꽃 천지였다. 노란 원추리 군락지에서 약초를 뜯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마산면 황전리에서 왔다고 하였다. 한약방에서 이질풀을 뜯어 달라고 부탁해서 띁으러 왔다고 하였다. 이질풀은 배가 아플 때 먹는 환약을 만드는 재료라고 하였다.
이분들은 곰취 여린 잎과 원추리 어린 순 등을 뜽어서 먹어보라고 주었다. 답례로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주었더니 거기에 도시락으로 싸온 꽁보리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1956년 반야봉을 오를 때는 길상봉에서 능선을 타고 대판봉으로 향해 갔다. 포터로 가신 분이 길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노고단에서 점심을 해먹고 첫 야영지인 임걸영으로 향했다. 포터로 나선 분은 피아골과 반야봉 일대는 몇 번 가 보았고, 뱀실령(벽소령), 세석평전에도 한번 가본 경력이 있다고 하였다. 대판봉에서 쉬면서 피아골 동쪽 능선이 불무장등 능선인데 농평으로 황장산으로 뻗은 능선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고 하였다. 주민들도 그 곳에 가려면 무서워서 여러 명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 간다고 하였다. 지리산에서 호랑이 목격담이 흔한 시절이었다. 임걸령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두 사람이 준비하고 모두 땔감을 준비하였다. 제법 마른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고 나뭇가지를 주웠다. 밤에 호랑이 등 맹수의 습격이 무서워 모닥불을 피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반야봉을 올랐다. 다행히 날씨는 쾌청하여 멀리 천왕봉이 보였다. 다시 내려와서 동쪽으로 능선을 타고 걷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부터는 한 번도 가본 사람이 없어 어디에 야영을 해야할지 아무도 몰랐다.
임걸령에서 점심밥을 지어 가지고 갔지만, 저녁은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해야 밥을 해 먹을 수 있는데, 샘이 있다는 벱실령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으니 걱정이었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웠지만 여름이라 땀이 비 오듯 하였고 쉴 때마다 물을 많이 먹기 일쑤였다. 조금 가니 전망이 좋은 봉우리가 있었다. 오른쪽 계곡은 칠불사, 화개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이 계곡에서 올라오는 고개가 화개재인데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올라온 배에 싣고 온 소금을 화개 사람들이 남원사람들에게 팔기 위해 지게에 지고 오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6.25전에 연동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연동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경사가 심한 길을 내려가니 편편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화개재였다. 남쪽은 연동골, 북쪽은 뱀사골이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길이라고는 없었다. 나무가 우거져 길을 만들어 나가야 했다. 선두에서 이규종 선생이 길잡이를 하였다. 우거진 나뭇가지를 톱으로 베고 잔가지는 낫으로 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였다. 이규종 선생은 학생 때 축구선수를 한 분으로 신체가 건장하였다.
토끼봉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지쳐 있었다. 토끼봉에서 점심을 먹고, 참외 하나와 사탕과 셈베 과자를 배분하였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간식거리였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높은 곳에 오르면 앞이 보이니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토끼봉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였다. 해가 오후 8시 무렵에 지기 때문에 6시 30분 경에는 야양준비를 해야 했다. 군용 ㄱ자 플래시 3개와 양초가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는 초지여서 시야가 트여 가기가 쉬웠으나, 봉우리에서 내려서거나 봉우리로 올라갈 수 없어 돌아가야 할 경우에는 한 사람이 짐을 벗어놓고 앞을 정찰한 후 다시 전진하였다. 나뭇가지에 풀들이 얽혀 있어 길을 트고 가기가 너무 힘들고 또한 많은 시간이 걸렸다.
토끼봉에서 춟발해서는 자주 쉬지도 못하고 주변 구경 또한 못했다. 모두들 샘이 있는 벱실령(벽소령)까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어 얼마나 가야할지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행은 더위와 길을 가로막는 가지와의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쳤다. 터널 같은 나무숲을 헤치고 가다가 시야가 트인 봉우리나 바위지대가 나타나면 살 것 같았다. 해가 반야봉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를 때마다 뒤돌아보는 반야봉은 웅장하고 멋진 봉우리였다. 얼마나 갔을까 급경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내려가는 길이라 숲은 더 우거져 있었고 길을 만들기가 더 어려웠다. 이제 숲속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야 , 물이 있다. 물'
선두에 선 사람이 물을 발견하였다.
샘이 아니라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평평한 분지 같은 지형에 한아름이나 되는 구상나무와 전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그 숲 사이로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일행은 분주히 나무를 하고 텐트를 치며 야영 준비를 하였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된장에 버무려 가지고 온 삶은 돼지고기를 물에 씻어 마늘을 넣고 냄비에 볶았다. 소주를 한잔씩 돌린 일행들은 모두들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키 큰 나무 숲속을 흐르는 실개천 옆에서 멋진 야경이었다. 영하반은 이곳을 1962년에 연하천이라 명명하였다.
■ 천왕봉 최초 종주 등반기(연하천에서 천왕봉까지)
아침에 일어나니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8시에 배낭을 꾸리고 출발하였는데 100m도 못가서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평지에 가까워 길의 흔적도 없었고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포터로 나선 김씨도 이곳은 잘 알지 못했다. 일행은 그 자리에 머물고 포터 김씨와 이규종 선생이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참 후에 돌아왔다. 100m를 가니 능선길이 나타났다. 키 큰 조릿대와 나뭇가지들로 얽혀 있어 저진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교대로 두 명씩 선두에서 톱과 낫으로 길을 만들면서 전진하였다. 한 시간을 걸어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벱실령(벽소령)까지만 가면 잔돌평전(세석평전)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벱실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먹고, 다시 한 시간을 더 전진하였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길을 만들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거리로는 그렇게 많이 이동하지 못하였다. 가다보니 길이 자꾸 내려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잘못든 느낌이 들었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전진하는 오른쪽 멀리 큰 산줄기가 희미하게 보이더니 곧 뚜렸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주능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북쪽으로 뻗은 능선으로 접어들며 길을 잃은 것이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자는 의견과 밥을 해먹어야 되니 물이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 밥을 해 먹은 후 진로를 결정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됟돌아서면 샘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계곡으로 내려가서 밥을 해 먹기로 하였다. 30분을 내려가서야 물을 찾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오후 1시가 되었다.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더라도 저녁밥을 지을 수 있는 샘을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행은 일단 계곡을 따라 하산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을로 내려간 후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서 다시 주능으로 올라서기로 했다. 길도 없는 계곡 물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한 시간쯤 내려가서야 마을에 도착하였다. 함양군 마천면 음정이라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내려왔던 능선은 영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이었으며, 밥을 해 먹고 내려왔던 계곡은 광대골이었다.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마을 옆 공터에 텐트를 쳤다. 주민에게 물으니 백무동으로 가서 세석평전으로 오르거나 장터목으로 올라 천왕봉을 갈 수 있고, 천왕봉을 곧 바로 오를 수도 있다고 하였다. 마을에서 닭을 두 마리 구입하고, 솥을 빌려 닭백숙을 끓였다. 주민 몇 명을 초대하여 함께 닭백숙과 막걸리를 먹으며 애기를 들으니 오늘 우리가 길을 잘못 든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약 한 시간 30분 거리에 벱실령(벽소령)이 나온다고 하였다. 벱실령 가까운 남사면에 샘이 있고, 세석평전으로 가다보면 얼마 안가서 선비샘이라는 샘이 있다고 하였다.
선비샘은 샘 위에 무덤이 있는데, 옛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평마을(여순 사건 이후 마을이 없어짐)에 화전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았던 이씨 노인이 있었는데,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 천대받는 자신의 처지를 늘 한탄하였다. 아래 의신마을에 사는 김 선비가 평생 글만 읽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사는 모습을 봐왔던 이 노인은 두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능선에 있는 상덕평 심 위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샘 위에 무덤을 만들면 물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니 사후에라도 사람들에게 절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 노인의 무덤이 샘 위에 들어서 사람들이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그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그 샘을 선비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973년 山 誌 44호에 선비샘의 전설 발표 우종수).
일행 중 몇 명이 너무 힘들어 못 가겠다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천왕봉을 지척에 두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길을 잘못 든 지점으로 다시 올라 능선을 타고 천왕봉에 오르고 싶었으나, 일행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 백무동에서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백무동으로 가서 마을주민에게 제석봉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은 험난하였다. 백무동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오후 3시경에 제석봉에 도착하였다. 짐이 무겁고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석봉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에 경사가 심한 바위굴을 통과하게 되었다. 바위굴에는 통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걸쳐 놓았다. 당시에는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통천문이었다. 마침내 천왕봉에 도착해보니 천왕봉에도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천왕봉에 있었다는 작은 집은 훼돈되어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비교적 납작한 바위에 새긴 남신상과 조각상인 선도성모상은 돌로 쌓은 담 안에 있었다. 일행은 신상에 경배하고 샘을 찾으러 갔다. 야영을 하기 위해서는 샘을 찾아야 했다. 천왕봉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가까운 곳에 천왕샘(천왕봉 동사면 약 300m 아래 해발 1850m 지점에 있는 경남 진주로 흐르는 남강의 발원지)이라는 샘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샘이 마른다고 하였다.
바위틈에서 물이 쫄쫄 나오고 있었다. 오래 받아야 반합 가득 물을 받을 수가 있었다. 텐트는 천왕봉 서쪽 신상이 있는 옆에 치기로 하고 천왕샘 가까이에서 밥을 해서 먹기로 하였다. 날씨가 좋아 멀리 보였으며 바람도 심하지 않았다.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에 오르니 제석봉-세석평전-반야봉-노고단이 한눈에 보였다.
사방에 이름 모를 산봉우리들이 천왕봉을 에워싼 듯 하였다. 지리산의 장엄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천왕봉의 첫날밤은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했다. 한기를 느껴 잠을 깨니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일행은 천왕봉의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 천왕봉 정상부에 올랐다.
마침내 붉은 해가 솟았다. 일행은 환호했다. 두 팔을 벌려 해를 맞이하였다.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맞이하게 되니 감격했다. 금강산 유정산 주지스님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지리산은 거대하고 장엄한 산이었다. 일행은 중산리로 하산을 하지 않고 뒤돌아 세석평전까지 가기로 하였다. 세석평전에서 벰실령을 거쳐 길을 잘못 들어 음정마을로 내려갔던 지점까지 가서 일박한 후 다시 음정마을로 하산하여 차를 타고 구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야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진 주 능선길을 다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왕봉에서 세석평전으로 가는 길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경사도 심하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기에 좋았다.
이곳은 매우 아름다워 신선이 놀만한 곳으로 여겨졌다. 고개를 들면 반야봉이 우뚝하여 길을 인도하는 듯하였다. 세석까지는 멀지 않으니 천천히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면서 걸었다. 연하반은 이곳에 있는 작은 바위 봉우리를 연하봉이라고 명명하고, 1972년 지리 10경을 선정할 때 이곳을 지리 10경 중 하나인 '연하선경'으로 명명하였다. 세석평전은 주능 남쪽으로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리산에서 노고단과 함께 대표적인 아고산대인 이곳은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수십 명이 이곳에 움집을 지어 감자를 재배하여 살았다고 한다. 6.25 때 모조리 파괴되었지만 곳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세석평전에 도착하여 점심을 해 먹고 벱실령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경사지를 올라 사방이 잘 보이는 이름 모를 봉우리에 도착하니 남쪽으로 멀리 섬진강이 보였다. 쉬고 나서 출발하려고 하니 교감 선생님이 '우선생, 우리 저 섬진강 쪽으로 하산하는 게 어떻겠소' 하였다. 일행 중 몇 사람은 다리를 절기도 하였으며 몹시 지쳐 있었다. 여기서 하산하고 내년 여름방학 때 다시 한 번 천왕봉까지 등반을 하자고 하였다. 아쉬웠지만 하산을 결정하였다. 구례에서 화엄사 계곡으로 노고단을 올라 산봉우리를 잇는 능선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르는 종주등반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년으로 미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봉우리 가까운 곳에 아래쪽으로 희미한 길이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 조금 내려가니 병풍처럼 암벽이 있고 암봉이 나타났다. 그 사이에 아늑한 공간이 있었는데 샘도 있으며 돌로 쌓은 제단 같은 것도 보였으며 움집이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지리산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처라고 하는 영신사 터였다. 영신사 터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서니 길도 찾을 수 없고 암벽지대라 위험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곧 폭포를 만나 돌아서 내려가야 했다. 이름 모를 지능선길을 내려오다 선두에서 인골을 발견하였다.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의 인골일 것이었다. 일행은 야전삽으로 땅을 파고 묻어 주었다. 낫을 들고 길을 선두에서 만들면서 내려가는 이규종 선생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주저앉아 발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일행은 당황하여 물어보니 뱀에 물렸다는 것이었다. 바지를 올리고 자세히 보니무엇인가에 찔려 피가 나고 있었다. 뱀에 물리 자국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뱀에 물렸다는 지점을 살펴보니 나무의 뿌리가 노천으로 나와 날카롭게 뻗어 있었는데 하산 중에 그 뿌리에 찍힌 것이었다. 일행은 응급처치를 한 후 그곳에서 미숫가루를 타 먹고 쉬었다.
내려온 후에 알았지만 그곳은 지리산 죽음의 계곡 대성계곡이었다. 1952년 1월 지리산 빨치산들을 이곳으로 몰아넣고 휘발유 수십 드럼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후 네이팜탄을 쏘아 불바다를 만들어 빨치산을 궤멸시킨 골짜기였다. 네이팜탄은 3,000도의 고열을 내며 주위 30m를 불바다로 만든다고 했다.
대성계곡을 타고 ㅎ산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천신만고 끝에 의신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 앞 계곡의 모래가 깔린 곳을 찾아 텐트를 치고 목욕을 하고 땀에 전 옷을 빨아 바위에 널었다. 의신마을에서 닭 두 마리와 부식을 샀다. 솥을 빌려와 물가에 걸고 닭을 삶고, 모닥불을 피우자 곧 어두워졌다. 다음날 화개장터까지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타고 구례에 도착하였다. 노고단에서 능선 길로 천왕봉까지 가보려 했던 시도는 중도에 안개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 도전한다면 충분히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4박 5일이면 화엄사-노고단-임걸령-반야봉-벱실령-세석평전-제석봉-천왕봉-중산리까지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당한 거리에 야영을 할 수 있는 샘이 있어 좋은 등산코스가 될 수 있었다. 적당한 거리에 야영을 할 수 있는 샘이 있어 좋은 등산코스가 될 수 있었다. 지리산 종주등반로 개척은 아쉽지만 1958년 여름 방학 때 다시 도전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지리산 종주등반에 실패한 연하반은 재도전을 위해 1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울에는 산에서 야영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기에 다음 해 여름방학을 기다려야 했다. 1958년 여름 재도전하여 4박 5일 만에 화엄사-노고단-임걸령-노루목-토끼봉-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중산리까지 지리산 종주등반을 하였다. 연하반은 처음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등반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한 것이다.
■ 지리산 개척 약사(略史)
연하반 우종수 총무는 1958년 구례중학교 교사를 퇴임하고 지리산 등반로 개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5~58년까지는 구례중학교 교사드이 주축이 되어 등반을 하였으나, 우종수 총무의 퇴임 이후에는 많은 일반인들이 연하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59년 9월에는 한라산을 등반하였으며 1960년에는 피아골과 칠불암 코스를 답사하였다.
1962년 5월에는 지리산 등반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종주등반을 하면서 코스별로 시간을 기록하고 보폭을 60cm로 정하여 걸음수를 계산하여 거리를 기록하였다. 이때 노고단 산장지기, 피아골 산장지기로 반평생을 보낸 함태식 씨가 처음으로 종주등반에 합류하였다. 1962년에 처음으로 등사기로 '지리산등산안내소'를 제작한 연하반은 찾아오는 등산인들에게 무료로 배포하였다.
963년 정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산지 개발의 일환으로 '지리산 지역종합개발조사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리산을 조사하였다. 연하반은 1963년 조사단을 안내하며 적극적으로 조사에 협조하였다. 우종수 연하반 총무는 조사단들을 안내하며 1963년 8월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지리산을 오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지리산 골짜기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을 베어 내고 있었다. 연하반은 지리산에서 수많은 나무들이 베어 팔려 나가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였으나 당시는 사회혼란기로 벌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연하반은 '지리산지역종합개발 조사연구위원회' 조사원들에게 지리산에서 수많은 나무들이 잘려나가 자연이 훼손되는 실상을 이야기하면서 나바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1962년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국립공원 회의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위원회의 부위원장인 김헌규 박사가 지리산으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으면 정부에서 관리를 하게 되니 나무를 베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개발을 하여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변해 주었다. 1962년 지리산등반지도를 만든 연하반은 1963년 이정표 60개와 안내리본 300개를 만들어 종주 등반로 곳곳에 부착하여, 지리산 종주등반 코스를 확정하였다. 연하반은 확정된 종주등반 코스 등 보완된 지리산등반지도 1,000매를 제작하여 각 산악단체에 무료로 보내주었다.
1963년 '지리산지역종합개발조사연구위원회'를 안내하였던 연하반은 1964년 정부에 자연보호를 위한 '자연국립공원' 창설을 건의하였다. 1965년 연하반 회지 '연하반'을 발행하였으며 지리산종주등반 코스에 2차로 이정표 90개를 설치하고, 등반지도 2,000매를 제작하였다. 196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연하반은 '지리산악회'로 개칭한 후 우종수 연하반 총무가 지리산악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70년 '전라남도 산악연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종주등반로에 이정표 100개를 3차로 설치하였다.
연하반은 지리산종주 등반로를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등반로를 답사하고 개척하여 이정표를 설치하였다. 1960년 피아골-노고단 코스, 1965년 왕시루봉-노고단 코스, 1966년 노고단-질매재-피아골-직전마을 코스, 1971년 칠선계곡-천왕봉 코스에 이정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1972년 월간山지에 지리산 10경을 선정하여 발표하였고, 1973-74년에는 동 월간지에 지리산 차일봉의 전설, 음양수의 전설 등 11편의 전설을 발굴하여 발표하였다. 이후 1980년에는 그동안의 활동을 기록한 회지 '지리산' 제3호를 발행하였다.
연하반(지리산악회)은 지리산의 등반로를 개척하고 무명 봉우리의 이름을 지어 등반지도에 표기하였으며, 종주 등반로에 샘 10곳을 찾아 정비하는 등 모두가 지리산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여러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였다.
■ 삼도봉 일화(구례 연하반)
1962년 종주등반 때, 지도를 만들기 위해 각 봉우리마다 봉명을 표기하여 산행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삼도봉은 그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우종수 총무가 이 봉우리를 어떻게 부르면 좋겠느냐고 회원들에게 물었다. 회원 한 명이 봉우리 앞에 바위가 '나라니'(나란히의 사투리) 서 있으니 '나라니봉'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다른 회원들에게 재차 물었으나 좋은 봉명이 없었기에 지도에 일단 그렇게 표기를 해 놓았다.
그런데 종주등반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정리를 하는데, 지도에 습기가 차고 잉크가 번져 그 글자가 '날라리'로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 봉우리를 '날나리봉'이라고 불렀는데 한국 산악사진의 대가인 김근원 선생님이 우종수 총무에게 연하반에서 지은 이름이 모두 좋은데 '날라리봉'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후에 남원산악회 이병채 씨와 상의를 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인 이 봉우리의 이름을 '삼도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