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자료/등산자료

반야봉 등반기(1956년 구례연하반) 1편

카프리2 2018. 5. 4. 14:27

나사모산우회에 연하인님이 있었다. 몇년전 백두대간을 함께 했다. 그 분한테 연하반 애기를 듣기는 했지만,

최근 지리산과 구례연하반이라는 책을 읽고 그 궁금증이 풀렸다 (최초 지리산 종주가 언제였을까 궁금했다).


구례중학교 교사로 구성된 구례연하반이 1957년 첫 지리산 종주 길을 개척하였다. 또 60년대 벌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리산을 보호하고자

관계당국에 건의하여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를 탄생시켰다. 그 중심에는 1958년 구례중학교를 퇴직하고 지리산 보호에 뛰어 든 우종수님이 있다.


우리는 선조 덕분에 지금 지리산을 편하게 다니고 있다. 구례연하반은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된 후, 구례산악회로 개명되었다.  


- 구례 연하반이란?구례 지역민들이 주축이 돼 195555일 창립한 지리산권역 최초의 산악단체이다.
  연하는 안개와 노을 즉 산수를 반()은 짝을 이르는 말로, 산수지기(山水知己)혹은 자연의 벗을 뜻한다.


- 연하반이 지은 대표적인 이름 : 연하천, 연하봉, 덕평봉, 음양수, 총각샘, 지리 10경 정리

 

- 연하반 연혁 및 중요실적

 1955년 5월 5일 구례연하반 발족

 1955년 6월 지리산 노고단(1,506m) 등반

 1956년 8월 지리산 반야봉 등반

 1957년 8월 지리산 천왕봉 종주등반코스 개척

 1958년 7월 지리산 천왕봉 종주등반코스 재답사

 1963년 7월 지리산 천왕봉 종주등반 코스 확정

 1967년 12월 지리산이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됨


* 약 4편에 걸쳐 연하반에 관한 지리산 이야기를 올릴려고 한다.

 1편 : 반야봉등반기, 2-3편 : 지리산 최초 종주 등반기, 4편 : 지리산 개척 약사




■ 반야봉 등반기(구례연하반)


 1955년 노고단을 초등한 연하반은 1956년 여름 반야봉을 올랐다. 당시에는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정순덕 씨 1963년에 체포됨) 구례경찰서에서는 반야봉에 오르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다. 연하반은 개개인 인적사항과 동행일정을 상세히 적은 '지리산 입산허가서'를 구례경찰서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았다. 산행 인원은 8명이었다. 군용A텐트 4개, 반합, 남비, 군용수통, M1소총 장착용 대검, 낫, 톱, 군용 야전용 삽 등 야영에 필요한 등산장비를 구입하였다.


등산코스는 구례읍 출발 화엄사-노고단-대판이봉-임걸령-반야봉(되돌아 옴), 첫날 점심은 노고단에서 밥을 해 먹기로 했으며, 야영은 샘이 있는 임걸령에서 하기로 했다.

구례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도보로 봉북리 숯거리를 지나 서시천 징검다리를 건넌 후 마산면 장동을 거쳐 화엄사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화엄사에서 악명 높은 코재(코가 땅에 닿을 만큼 경사가 심한 구간을 일컫어 코재라고 함)을 지나 무넹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 날씨가 좋아서 멀리까지 잘 보였다. 현재 노고단 대피소가 있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였다. 샘 주위에는 봐주는 사람도 없이 원추리, 둥근 이질풀, 동자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선도샘(노고단 대피소 부근에 있었던 샘 이름)은 정비가 안되어 있었다. 야전삽으로 물이 충분히 고일만큼 파서 샘을 정비하였다. 밥을 지을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된장국에 넣어 끓이기 위해 지보(비비추) 잎을 뜯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샘 주위에는 곰취가 지천이었다. 질기지 않은 속잎만 골라서 뜯었다. 반합 네 개를 큰실하고 곧은 나무가지에 끼우고 양쪽에 받침목을 세워 고정시켰다. 쉬지 않도록 삶아서 된장에 버무려 놓은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삶아 칼로 잘게 두드려 고추장에 볶은 반찬이 훌룡했다. 당시에는 순수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제사 때나 명절 때 뿐으로 반합에 나무를 때어 해놓은 쌀밥은 그 맛이 기막혔다.


식사를 마치고 선도샘을 잘 정비해 놓은 후 길상봉을 향했다. 길상봉으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원추리 등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피어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길상봉에 오르니 반야봉과 천왕봉이 잘 보였다. 일행은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천왕봉을 향하여 큰절을 하고 길상봉에서 능선을 타고 대판이봉을 향했다. 능선에는 군인들이 군데군데 땅을 파고 통나무를 잘라서 덮개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부어서 은폐한 전투용 참호가 있었다. 아직 지리산에 빨치산이 남아 있다고 하던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길은 풀이나 조릿대, 키 작은 나무들로 덮혀 있었다.


앞에서 낫으로 치거나 톱으로 썰어가면서 길을 텄다. 대판이봉 부근에 도착하니 원추리 군락지가 나오고 시야가 터졌다. 오른쪽으로 피아골 계곡이 잘 보였고, 반야봉이 가깝게 잘 보였다. 오후 3시 임걸령에 도착하였다. 임걸령 샘도 물은 졸졸 나왔지만, 샘은 메워져 물이 많이 고여 있지 않았다. 샘을 정비하고 텐트를 쳤다. 텐트 겉면에는 양초를 여러 번 꼼꼼히 칠해 비나 안개로 인한 습기를 차단토록 했다. 일행은 밤새 모닥불을 피우기로 하였다. 등행 계획을 세울때 이에 대한 토론을 나눴는데, 호랑이나 표범, 늑대, 곰 등이 무섭고, 여름이지만 고지대이니 새벽엔 추울 것 같으니 밤새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는 사람과 빨치산이 두려우니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결론은 맹수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지만 빨치산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나 무기도 없는 등산객을 해치진 않을 것이므로 불을 피우기로 결정하엿던 것이다.


밤새 모닥불을 피우려면 마른 나무가 필요했다. 일행은 흩어져 많은 땔감을 구했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큰 돌을 주어 둥글게 놓고 그 안에다 모닥불을 피웠다. 밥을 지어먹고 나니 어두어지기 시작하였다. 텐드 바닥에는 풀을 베어 푹신하게 깔고 그 위에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군용 판초우위를 깔았다. 판초우위 위에 군용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누워 군용 담요를덥고 자야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니 여름이지만 쌀쌀했다.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산불로 번질 우려는 없었다. 다들 피곤해서 잠을 자야하는 데 땔감나무를 자주 넣지 않으면 곧 꺼질 것이었다. 오래타도록 땔감나무 중 가장 굵은 나무를 집어넣었다. 밤은 깊어가고 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깊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미세하게 흐르는 안개였다. 10m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닥불은 여태껏 꺼지지 않고 실연기를 뿜고 있었다. 서둘러 밥을 해먹고 반야봉을 향하여 출발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고 길은 종잡을 수 없었다. 낫이나 톱으로 길을 만들어 가면서 오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오르다 보니 절벽 앞에 도착하였다. 반야봉을 올랐던 사람에게 설명을 충분히 들었던 터라 위험하게 절벽을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잡고 기다시피 올랐다. 절벽을 오르니 위에는 안개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산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그 끝에 천왕봉이 우뚝 떠 있었다. 뒤돌아보니 노고단도 섬이 되었다. 반야봉은 세상 밖의 세상이었다. 일행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절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리산은 참으로 장엄하였다.


반야봉에서 미숫가루를 타먹고 쉬고 있으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구름이 남쪽 골짜기에서 산들성이를 넘어 서서히 북쪽 골짜기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능선의 낮은 골짜기글 넘는 구름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쏟아진 구름은 멀리 가지 못하고 햇볕을 받아 소멸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구름이 걷히니 천왕봉을 향하여 꿈틀거리며 뻗어간 산등성이가 잘 보였다. 저 능선을 따라 천왕봉에 가야 했다. 지리산을 많이 올랐던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노고단에서 능선을 타고 천왕봉에 갔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갔다 온 사람은 많았고, 남원 쪽에서 화개재로 오르거나 화개에서 토끼봉을  올라 반야봉까지 다닌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천왕봉을 꼭 오르리라 마음을 다짐하며 하산 길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