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안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의 유명한 법어다.
성철 스님(속명 이영주)은 1912년에 태어나 1993년 열반에 들었다. 생가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이다.
웅석봉 아래 단성에서 태어난 성철 스님이 어떻게 대원사에서 불교에 입문하였는지를 지금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7월달 나사모산우회 대간에서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 구간을 지난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현대 한국불교의 기틀을 마련한 봉암사 결사를 성철스님이 주도하였다.
-참고자료 : 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조계종출판사)-
산청에서 태어난 성철 스님의 어린 시절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대원사(大源寺)는 성철 스님이 출가하기 전 수행한 절이다.
성철 스님이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세 이후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성철 스님은 불교사상에 심취하던 그 무렵 결혼했다. 대원사에 자주 왕래하는 것을 보고 집안에서 결혼을 종용한 것이다. 1931년 11월 성철스님은 묵곡에서 가까운 덕산의 전주 이씨 이덕명과 혼인신고를 했는데, 아마도 성철 스님의 부모는 장남이 안온한 가정을 꾸리고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송곳은 주머니에 감출 수 없듯, 타고난 선기는 때가 되면 저절로 그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20대 이전의 스님은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한 서적들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웬일인지 좀처럼 스님의 마음을 씻어줄 가르침을 얻지는 못했다. 성철스님은 1932년 20세 때 간례휘찬(簡禮彙纂 모을찬) 사이에 메모 형태로 이영주 서적기를 남겼는데,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약 70여 권의 동서양 철학서적들이 적혀 있다.
당시 성철 스님이 얼마나 방대한 독서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이한 것은 이영주 서적기에는 불교서적이 한 권도 포함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철 스님이 불교계에 관심을 가진 게 20대 이후임을 알게 하는 방증이다.
성철 스님이 불법에 귀의하게 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이다. 증도가를 읽고서 스님은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것처럼 홀연히 심안이 밝아지는 것을 느겼다고 한다. 이후 성철 스님은 불교라는 잡지를 읽으며 화두를 잡고 공부하는 법에 눈을 뜨게 된다. 성철 스님의 대원사 출입이 부쩍 잦아진 무렵이기도 하다.
대원사에서 수행하게 된 경위
대원사에서 수행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 성철 스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메다가 불경을 보니까 아주 마음에 들더라 이거야. 그래서 참선하려고 대원사를 찾아갔지. 그때 대원사 탑전이 참 좋았어. 그래 거기 들어가 좀 있었지. 그런데 주지가 그걸 보고 펄쩍 뛰어. 본시 탑전이란 데가 스님들만 있는 곳이지 속인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한판 했지. 너거들은 절에서 처자식 거느리고 살림 다 살고 떡 장사도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중이냐. 내가 참선공부 한다는데 웬 말이 많노. 절이 불교공부 하는 곳이지 살림 사는 곳이가. 그런데 얼마 안 가 주지가 바뀌었지 젊은 중이 주지대리인가 뭐를 맡았는데 그 사람하고는 그래도 말이 통했거든 그래서 그 탑전에서 겨울을 보냈지.
성철 스님은 그해 겨울 탑전에서 용맹전진 했다. 선지식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체득한 참선수행이었다. 직접 찾아보니 대원사는 경내가 눈에 띄게 청결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리산 대원사는 언양 석남사, 수덕사 경성맘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첨선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자연 경관은 눈이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관이다. 대원사에서 청년의 성철 스님이 요양하면서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떴다고 생각하니 천혜의 자연경관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지리산 대원사에서 동정일여의 경지에 들다
성철 스님은 대원사에서 중국 대혜 스님의 서장(書狀 문서장)을 탐독하면서 무(無)자 화두를 들기 시작했다. 무자 공안은 조주 선사가 "개에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있다"고 답했고, 다음에는 "없다"고 답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자 공안을 들고 성철 스님은 불철주야로 정진한 끝에 40여 일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 고요할정)'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동정일여란, 일념으로 화두를 잡고 정진한 끝에 앉으나 서나 말할 때나 묵언할 때나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상관이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후 스님은 수행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헤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성철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스님도 호랑이밥이 될까 봐 겁이 나서 밤에는 문을 꼮꼭 걸어 잠그고 정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무엇 땜에 이러 겁을 먹는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던 것이다.
성철 스님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라고 했던가. 호랑이를 겁내지 않는 성철 스님이었기에 호랑이가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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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다.
대원사에서 한 젊은이가 정진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른 광경을 목격한 대원사 주지 스님이 해인사 주지 스님에게 '참선 정진하는 청년이 남달라 보이니 해인사로 데려가 큰 도인으로 지도해 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띄웠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환경스님의 제자 최범술 스님이 대원사를 방문해 성철 스님에게 해인사로 가기를 권유했다.
"해인사가 절도 크고 좋은 곳이니 같이 갑시다. 해인사에는 훌룡한 선지식이 계시는데, 가서 훌룡한 지도를 받읍시다."
성철 스님은 효당 스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원사도 참선하기 좋은 곳이어서 굳이 해인사에 갈 이유를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마음을 바꿨다. 여법한 사격을 갖춘 절에서 수행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성철 스님의 나이 24세의 일이다(이하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