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은 배경 : 지리산을 둘러싼 5개시군을 더 알고 싶어서
■ 개 요
1. 읽은 날짜 : 2018.7.12(목)- 7.17(화)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수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 돌베개 / 291
3. 제목 : 지리산 자락
4. 목 차
- 1부 : 곡성.구례와 하동
- 2부 : 남원 시내와 운볼.마천
- 3부 : 함양과 산청, 진주
■ 한국문화유산답사회란?
우리 땅에 깃들어 있는 문화유산의 의미를 되세기며 오늘의 삶과 역사를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자는 뜻으로 1995년에 만든 동호회 모임이다.
- 김효형(기획.편집). 박종분(글을 씀). 김성철(사진). 유홍준(감수.해설). 정용기(여백 대표)
■ 책을 읽은 소감
- 아내랑 지리산을 둘러싼 5개 시군을 승용차로 돌아보기 위해 두번째로 읽은 책이다.
- 본 책이 22년전(1996) 출판 되었지만 도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주 유용하다.
- 아는 만큼 보인다고..이 책을 읽고가니 정자 하나도 의미 있게 보였다. 왜 경상도 함양과 산청에 이렇게 많은 인물이 나왔을까..생각해 보았다.
- 결론은 서원을 두어 제자를 길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머리야 과거를 합격한 사람이면 거의 비슷할테니까.
- 사림의 계보가 정몽주, 길재를 거쳐 길재에게 글을 배운 김종순, 김종순의 아들 김종직,
- 김종직이 함양군수를 하면서 배출한 정여창과 김굉필, 그리고 김일손..다시 김굉필은 조광조를 배출하고..
- 이후 1501년에 좌 안동에는 퇴계 이황, 우 함양에는 남명 조식이 태어나 선조때부터는 훈구세력이 완전 사라지고 동인과 서인 그리고 남인과 북인의 사색당파가 정권 경쟁을 벌인다.
- 카프리, 선조 이전까지 정권을 장악한 훈구세력을 1기라 하고, 선조부터 정조까지 사색당파를 2기로 부르고 싶다.
- 그렇다면 3기는...순종부터 고종까지 외척 세력에 의한 정치를 3기라 말하고 싶다.
- 1.2.3기를 볼 때 가장 좋은 정치는 견제와 균형에 의한 2기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의 여야정치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3기는 ..견제장치가 없어 왕이 실권이 없고..안동김씨, 대원군이 정권을 좌지우지 하는 정치였다.
- 카프리, 얼마전 당의통락이라는 당쟁에 괸한 책을 샀다. 읽고나서 다시 이 부분에 대해 재정리하고 싶다..사색당파가 지금으로 따지면 국회 역할을 일정부분 담당했다.
- 글을 읽은 배경을 스마트 폰으로 적다보니 평소 나의 생각을 가미했다.
■ 밑줄을 그은 글
1. 곡성.구례와 하동
- 구례소개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이었던 구례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져 곡성군에 속한 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남원부에, 그 후 1895년 구례군이 되었고, 1897년 전북에서 전남으로 편입되었다.
- 매천 사당
매천 황현(1855~1910)은 구한 말, 정조 있는 삶과 죽음으로 일생을 마친 우국지사이자, 투철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을 보인 역사가이다. 그를 기리는 사당인 매천사에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사당건물과 유물관 등만이 조촐하게 남아 있다.
- 19410년 8월 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 되었다는 소식을 한 달 뒤에 전해 들은 그는 절명시와 유서를 남긴 채 많은 아편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으나 대관들은 나라 운명을 걱정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데 현안이었다. 권력자도 정치인도 아닌, 그저 부패한 세상을 피해 지리산 자락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평범한 선비인 그였지만, 배운 이로서 멸망한 나라에 목숨을 대고 있음을 부끄러워한 그는 자결로써 시대와 대관들에 대한 항변을 한 것이었다.
- 노고단은 신라 때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이라 여겨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토지면의 토지(土旨 뜻지)라는 이름은 원래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뜻의 토지(吐指 토할토 손가락지)였다고 한다. 옛날에 가락지는 여니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하거나 출산할 때만 빼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락지를 빼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을 뜻한다. 그래서 운조루가 위치한 토지면 오미리 일대는 금환락지, 곧 풍요와 부귀 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이라 알려져 왔다.
2. 남원 시내와 운봉 마천
- 운봉읍, 인월면, 아영면, 산내면, 곧 운봉일대는 남원 동쪽의 경남 함양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지리산 북쪽 자락의 고원(해발 417m) 지대로 농업이 발달하여 지리산 인근지역에서는 농업샌산력이 가장 높다.
- 여원치 마래여래불
여원치는 남원과 운봉을 연결하는 고개로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여서 숱한 전쟁을 치른 곳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을 지날 때 백발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애견해주었다하여 여원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이 고개에 한 주모가 살고 있었는데, 왜구가 들어와 주모를 희롱하니 주모가 부억칼로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 자결하여 여원치라 이름했다고도 한다.
여원치 정상 동남쪽 도로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불은 이런 전설을 뒷밭침이라도 하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 고개의 8부 능선쯤에 여원정이라는 누각에서 잠시 쉬어가며 바라보는 남원시의 풍광 또한 아름답다.
- 황산대첩비
황산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도주하는 패잔병을 뒤쫒아가며 섬멸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달(月)을 당겨놓고 밤늦게 까지 왜적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웠다고 한다. 그리서 인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또한 이성계가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고 하여 인풍(引風)이라는 지명도 생겼다.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 있으며, 주변에서 화살촉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당시 군대가 주둔할 때 말을 매어두었다 하여 둔마동이라고 한다.
황산대첩비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산이 황산이며, 그 앞에는 제법 넓은 남천이 흐르고, 길목에는 노송숲이 우거져 있다.
- 동편제
흔히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인 남원, 순창, 구례에 전승된 제를 동편제, 서쪽 지역인 광주, 나주, 담양, 보성 등지에 내려온 소리를 서편제라 한다.
- 백장암
수청산(772m) 중턱에 자리잡은 백장암(百丈庵)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고요하지만, 구불구불 올라가며 바라보는 산 풍경이 다양하여 지루한 줄 모른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이 없이 그대로 3층의 탑신부와 상륜부가 올라간 톡특한 형식의 탑이다.
3. 함양과 산청, 진주
- 육십령을 넘어 함양땅으로 들어서면 화림동계곡의 여러 정자들, 정여택고택, 허삼둘가옥, 산청 남사마을 등은 산골마을 답지 않게 매우 화려하다.
- 육십령을 거느린 덕유산과 지리산 두 산줄기가 잦아드는 곳에 마련된 산간분지인 함양은 병풍처럼 둘러싼 높은 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많아 산천이 매우 아름답다. 북동부를 흐르는 푸른 남계천은 위천, 임천강 등을 합류하여 경호강이라는 큰 물줄기를 만들어 산청 쪽으로 흘러나간다.
- 신라 때 최치원이 함양의 태수였던 것을 비롯하여 김종직,정여창,박지원 등이 지방관리로서 함양을 거쳐갔는데, 상림.학사루.정여창고택,남계서원.안의초등학교 등이 그들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 흔히 뼈대있는 고장을 말할 때, '좌 안동 우 함양' 이라는 말을 쓰듯, 함양은 안동에 견줄 만큼 학문과 문벌이 번셩했던 이른바 양반의 고장이었다. 우 함양의 기틀을 잡은 이가 바로 정여창이며, 그의 고택은 조선 중기 양반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