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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후기에 사용할 자료(신문, 책, 잡지 등)

카프리2 2015. 5. 16. 23:40

 

 

매일경제신문

[기자 24시] 국회의원 나리들 잠도 없나요?

기사입력 2015.12.03 17:23:32 | 최종수정 2015.12.03 17: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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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사 기자들은 힘들다. 잠 없는 국회의원 나리들 때문이다.

여야 원내지도부는 12월 첫날 밤을 넘겨 2일 새벽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관광진흥법 등 5개 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2일에도 자정을 넘긴 3일 0시 48분 법정 처리시한을 넘기며 내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기자들은 국가 미래가 걸린 중대사를 한 줄이라도 기사에 반영하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뛰었다. 이들 법안 통과에 목 매는 일반 국민도 여야 협상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

의원들은 정신이 맑은 대낮에 왜 국정을 논의하지 않나? 늦은 밤, 그것도 자정을 훨씬 넘긴 새벽까지 왜 온 국민을 잠 못들게 하는가? 숙면을 취해야 할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국회의원 일상은 올빼미와 다를 바 없다. 낮에는 지역구 행사 챙기느라 국정 현안을 논의할 시간이 주로 밤밖에 없다는 거 알고 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보면 밤늦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하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전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부분은 절대로 건강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의원 배지도, 명예도, 건강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려면 일반적으로 잠을 7~8시간 자야 한다. 세로토닌이 활발히 분비되는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멜라토닌 분비가 왕성한 밤에는 잠을 푹 자야 한다.

멜라토닌은 수면 효과가 있는 호르몬으로 아침 햇살을 쬐고 14~16시간이 지나면 왕성하게 분비되기 시작한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하루를 생활하는 건강한 사람은 오후 7~11시쯤 멜라토닌이 분비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온다. 양질의 잠은 뇌 건강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불안감, 우울감 및 치매를 예방하고 당뇨, 골다공증 등을 예방하는 효과까지 있다. 수면 중에는 매일 5000억~1조개 세포가 재생된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세포 재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병에 걸리기 쉽다.

우리는 예부터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문안 인사를 드릴 정도로 잠을 소중히 생각했다.
잠을 잘 자야 낮에 기분도 좋고 생산성도 올라간다. 국회의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병문 의료전문기자 leemoon@mk.co.kr]

 

 

[산악인 오은선]

 

[요약] 오은선은 세계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고자 1991년부터 맹훈련에 돌입했으며 당시 공무원으로서 안정된 직장생활까지 포기했다. 첫 원정에서는 정상 도달에 실패했지만, 1997년 세계 제 11봉인 가셔브룸2봉에 올랐다. 1999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를 등반한 뒤 2001년 박영석이 이끄는 히말라야 14좌 원정에 홍일점으로 동행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와 7대륙 최고봉 도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결국 2004년 에베레스트 등반까지 성공하며 목표를 달성했다. 2005년 스키 타던 중 입은 부상으로 휴식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등반 계획을 세웠다. 결국 2010년 4월 27일 마지막 정상인 안나푸르나에 오름으로써, 세계 여성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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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수만과 어머니 최순내 사이에서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강원도에서 살다가 이후 서울로 이사를 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암벽에 관심이 많아서 수원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가입했고, 첫 암벽인 인수봉 A코스를 등반한 이후 산을 오르는 데 청년기의 대부분을 바쳤다.

 

25세 때인 1991년 가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에 선발돼 1년여 맹훈련을 했다.

당시 그녀는 수원대학교 전산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과학교육원에 전산직 공무원으로 취직해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1993년 에베레스트 원정 직전엔 7급 승진 케이스였다. 그러나 미련 없이 직장을 버리고 에베레스트를 선택하여, 1년 동안 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을 잇는 종주 산행과 겨울 설악산과 한라산에서 장기 훈련을 했다. 첫 원정이었던 에베레스트에서 비록 등정은 하지 못했으나 3캠프(7,300m)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때만 해도 체력이 뒤처져 정상 공격조에서는 제외됐고, 선배 3명(지현옥, 김순주, 최오순)이 등정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8,000m 거봉 정상에 오른 건 1997년 박영석이 이끄는 대학산악연맹 원정대를 따라 나섰던 가셔브룸2봉(8,035m)이었다.

이후 그녀는 히말라야를 등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학습지 교사와 스파게티 가게를 운영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1999년 다시 원정을 가게 되어 휴가를 내려 했으나 회사에서 장기간의 휴가를 허락해주지 않자 결국 학습지 교사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브로드피크(8,047m)와 마칼루(8,463m)를 등반했다.

2001년에는 박영석이 이끄는 14좌 원정에 홍일점으로 동행했으나, 이 세 등반에서 한 사람씩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녀는 결국 등정하지 못했다. 이후 그녀는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서 7대륙 최고봉 도전이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2002년 유럽 엘브루스(5,642m), 2003년 남미 아콩카구아(6,959m)와 북미 매킨리(6,194m), 2004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963m), 호주 코지오스코(2,228m), 남극 빈슨매시프(4,897m), 아시아 에베레스트(8,848m)를 차례로 등정하며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7대륙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를 제외하면 혼자서도 등정할 수 있는 5,000~6,000m급 봉우리들이다. 이 중에서도 에베레스트 등정은 14좌를 성공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2005년 초 그녀는 스키를 타다 오른쪽 다리가 복합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1년간 쉬면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첫 단계로 2006년 8월 말 시샤팡마(8,046m)와 초오유(8,201m) 원정을 추진했는데, 혼자서 셰르파 2명과 나선 이 원정에서 시샤팡마만 오르고 초오유는 실패했다.

그 해 겨울 대학산악연맹 후배들과 아마다블람(6,856m) 등정을 마친 그녀는 셰르파도 없이 후배인 김선애와 단둘이 초오유를 올랐다. 이후 2007년 7월 K2(8,611m) 등정길에 올라 등반 개시 18일 만에 정상을 밟았다. 2008년에는 마칼루(8,463m), 로체(8,516m), 브로드피크(8,047m), 마나슬루까(8,163m)지 무려 4개의 거봉에 올랐다. 그리고 2009년에는 칸첸중가(8,586m), 다울라기리(8,167m), 낭가파르밧(8,126m), 가셔브룸1봉(8,080m)을 오른 데 이어 2010년 4월 27일 안나푸르나(8,091m) 정상에 오름으로써, 그녀는 1997년 가셔브룸2봉에 오른 이후 13년 만에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기록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이며, 남녀를 통틀어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 이후 세계 20번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7월 엄홍길이 처음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뒤 2001년 박영석, 2003년 한왕용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4번째로 14좌 완등의 기록을 세웠다. 1993년 체육포장, 2004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올해의 산악인상, 2005년 대한산악연맹 산악상 고산 등반부문상, 미래의 여성지도자상, 2007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올해의 여성1호상, 2009년 서울특별시산악연맹 2008 우수 산악인상을 수상했다.

2010년 현재 블랙야크 이사로 재직 중이다.

 

 

 

[오은선 라이프 스토리] 월간산 [488호] 2010.06
 
        "무서울 땐 무서움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남을지 생각했다"
어릴적부터 산을 좋아했던 타고난 산악인… 냉철함과 동시에 눈물 많아
오은선(吳銀善·44)은 1966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1남2녀 중 맏딸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강원도에서 살았으며 이후 서울 면목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자란 고향은 서울이다.

유년기의 교육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 그녀는 어릴 적부터 산과 인연이 있었다. 강원도 산자락의 관사에 살았는데 온 산과 계곡이 그녀의 놀이터였다. 지금도 그녀는 “눈 쌓인 구불구불한 임도를 걸으며 무척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며 “산은 내 동심의 고향”이라고 얘기한다.


그녀의 아버지 오수만(69)씨는 가정의 단란함을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고 어머니 최순내(64) 여사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고 한다. 늘 휴가 때마다 산으로 바다로 들로 온 가족이 여행을 갔으며 그 중에서 산에 놀러갈 때가 제일 좋았고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어릴 때는 아이에게 자연을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줘야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정신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 비록 제가 가정을 꾸려보진 않았지만 부모는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고 봐요. 요즘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많은데 한정된 모니터 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릴 적 생활기록부에는 ‘명랑하고 사교성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디에 있든 즐거우려고 노력한다”는 게 그 비결이다. 오은선은 유년 시절에 대해 “즐거웠다”고 얘기한다. 특히 휘경여중에 다니던 때의 추억이 많다고 회상한다. 교정이 아름다워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다는 것이다.

중학생 때 휘경여고 축제에서 등산반 장비전시회를 보고 그녀는 ‘고등학교만 가면 등산반에 들 테다’ 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학한 송곡여고에는 등산반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그녀는 참 산을 좋아했다. 아버지와 갔던 도봉산도 좋았고 바위에서 암벽등반하는 사람들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 것도 그랬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산에 끌리고 있었다. 마치 14좌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 같은 것이었을까.

154cm, 47kg의 작은 몸집이지만 오은선은 어릴적부터 체력과 순발력이 남달랐다. 오은선의 어머니는 “은선이는 시골 담벼락을 넘어 다닐 정도로 활달했고, 예방접종 빼고는 병원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고기보다 나물을 좋아하는 딸이 산을 타다 힘이 떨어질까봐 지난 1년 내내 홍삼과 곰국을 달였다.

수원대 전산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1학년 2학기에 대학산악부에 들어간다. 산악부에 가입하는 건 중학교 때부터 늘 생각해오던 것이었기에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암벽등반은 무서웠다. 그녀가 “암벽은 무서워서 못한다”고 하자 선배들은 걷는 산행만 해도 된다고 하여 산악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산악부에서 자주 간 곳은 인수봉이었고 가면 오은선은 늘 밑에서 혼자 남아 짐을 지켜야 했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지겨웠고 “대체 뭔데 저리 미쳐 있나” 싶어 도전하게 되었다.

오씨는 지금도 인수봉에 처음 올라갔을 때를, 소위 바위꾼들이 상투 틀었다고 말하는 그때를 아직 기억한다. 날아갈 듯 기뻐 팔짝팔짝 뛰었다. 그러자 선배가 “첫 바위에서 너처럼 기뻐하는 애는 처음 본다”고 하며 놀랐다. 이때부터 ‘날다람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보통 인수봉에 처음 올라서면 진이 빠져서 지쳐 있기 마련이다. 이후 그녀의 대학생활은 산악부와 암벽등반에 푹 빠져 있었다.

“인수봉 산천지길 크럭스 구간을 선등했던 게 지금도 자랑스러워요. 그때가 아마 대학교 3~4학년쯤이었을 거예요.”

▲ (좌)대학 2학년 때 인수봉 귀바위 밑에서 후등자를 확보 중인 오은선. (우)수원대산악부원 시절, 빙벽등반을 위해 아이젠을 들고 선 앳된 모습의 오은선.

첫사랑이었던 ROTC 선배

뭔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선 푹 빠져야 한다고, 거기에 미쳐야 한다고 흔히 얘기한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따낸 그녀 역시 산 밖의 것들은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20대면 이성에 가장 관심을 가질 나이였지만 그 흔한 연애 한 번 해보질 못했다.

“이성에 관심은 있었죠. 근데 산악부 남자들한테는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에 짝사랑 하던 ROTC 선배가 있었는데, 그렇게 끝났죠. 그게 첫사랑이었어요.”

졸업 후 오은선은 서울과학교육원 전산직(8급) 공무원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안정된 삶을 버리게 만든 건 에베레스트 원정이었다. 1993년 에베레스트여성원정대 모집공고를 보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이에 대해 그녀는 “물론 당시에는 14좌는 꿈도 못 꿨다”며 “히말라야 자체가 꿈이었다”고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했다. 대원 선발에 발탁된 오은선은 1년 동안 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 4개 산을 잇는 종주산행과 겨울 설악산과 한라산에서 장기훈련을 했다.

“그때는 젊었기에 공무원 그만두고 나서도 뭘 하더라도 먹고살 자신이 있었어요. 엄마한테는 그만뒀다는 얘기 안 하고 갔어요. 물론 다녀오고 나서 엄마가 알게 되셨고 장비 다 버리고 한바탕 떠들썩했죠.”

첫 원정이었던 에베레스트에서 비록 등정은 하지 못했으나 3캠프(7,300m)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때만 해도 체력이 뒤처져 정상공격조에서는 제외됐고 선배 3명(지현옥, 김순주, 최오순)이 등정의 영광을 안았다. “힐러리 스텝까지 갈 체력이 있었지만 대장이 내려오라고 명령해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고 한다.

“당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애초에 정상은 꿈도 꾸지 않았고 만년설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또 이번에 못 가면 내 생에 다시는 에베레스트에 갈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장기휴가를 내고 가려 했는데 그만두기 전에는 안 된다고 해서 그만두고 갔어요.”

처음으로 8,000m 거봉 정상에 오른 건 박영석의 원정대를 따라 나섰던 가셔브룸2봉이었다.

“등반 도중에 영석이 형이 힘든 사람 있냐고 묻길래 그만 내려가라 할 줄 알고 번쩍 손을 들었더니 웬걸, 너 맨 앞으로 나와 하는 거예요.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가셔브룸 등정을 통해 고산등반을 배운 그녀는 한동안 박영석 대장과 함께 등반을 한다. 1999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2001년 K2로 이어지는 박 대장의 14좌 원정에 홍일점으로 동행했다. 그러나 이 세 등반에서 한 사람씩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고 오은선은 등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목격한 최초의 죽음은 1999년 파키스탄 브로드피크(8,047m) 등반 때였다. 연세대 재학생이었던 허승관 대원이 밤사이 실종됐는데 결국 그가 입었던 빨간 재킷만 발견됐다. 오은선은 “참으로 천사 같은 성품의 후배였는데 주인 없는 재킷을 보면서 너무 슬펐다”고 말했다. 그 해의 마칼루 등반에선 셰르파가 죽는 사고를 목격하며 고산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된다.
▲ (좌)시샤팡마를 함께 오른 두 셰르파와. (우)인터뷰를 위해 본사를 방문했던 오은선과 고미영. <사진 허재성 기자>
 
징크스는 방을 어질러 놓는 것

▲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오은선(가운데).
원정등반과 관련한 징크스는 방을 정돈하지 않고 어질러 놓는 것이다. 등정계획이 세워지면 산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섭렵하는데 집을 나서면서 방 가득히 어질러 놓은 상태에서 현지로 떠난다고 한다. 오은선은 “깨끗하게 정돈하면 마치 세상과 하직하는 느낌이 들고, 어질러 놓아야 무사히 돌아와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0년대 후반, 히말라야에 대한 꿈만 가진 그에게 후원사는 없었다. 산악부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다른 원정대의 대원으로 쫓아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오은선은 원정등반을 경험할수록 내 힘으로 혼자 가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다른 원정대의 일원으로 가는 건 남한테 의지해서 가는 등반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 의해 등반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내 힘으로 내 돈 벌어서 혼자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원정비용을 벌기 위해 학습지 교사를 4년간 했고 스파게티가게를 1년간 운영했다. 수학과 영어를 주로 가르쳤는데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에 학부모들로부터 인기가 많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1999년 다시 원정을 가게 되었고 회사에서 장기간의 휴가를 허락해주지 않아 결국 학습지 교사 일도 그만두었다.

1997년 가셔브룸2봉 이후 2001년까지 계속 등정하지 못하자 히말라야 고산등반에서 7대륙 최고봉 도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7대륙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를 제외하면 혼자서도 등정할 수 있는 5,000~6,000m급 봉우리들이다. 2002년 유럽 엘브루즈, 2003년 남미 아콩가구아와 북미 매킨리, 2004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호주 코지오스코, 남극 빈슨매시프, 아시아 에베레스트를 차례로 등정하며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이 중에서도 에베레스트 등정은 14좌를 성공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 사실상 대구 계명대 팀과의 합동등반이나 다름없었던 이 등반에서 계명대 팀 박무택 대원이 하산 중 실종되는 사고가 났고, 등반 도중 오은선은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본다. 거기에서 겪었던 극심한 슬픔과 공포, 그리고 등정 후 하산길에 산소가 떨어져 최종 캠프에 다다르기 직전 온몸의 기운이 쇠진해 쓰러졌던 극한 체험은 이후 등반에서 큰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7대륙 최고봉 등정은 14좌를 할 수 있었던 훈련과정이 되었고 이를 통해 오은선은 ‘날다람쥐’에서 지금의 ‘철녀(鐵女)’로 다시 태어났다.

7대륙 최고봉을 할 때에도 그녀는 일을 하고 있었다. 2002년 등산장비업체인 포리스트시스템에 입사했으며 다시 영원무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에는 일하다가 원하는 원정을 나갈 경우 시간과 장비 지원을 해준다는 괜찮은 조건이었기에 ‘세븐 서밋’을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14좌의 가장 큰 장애물 K2를 넘기 위한 노력

▲ 후원사인 블랙야크 옷을 입고 선 오은선.
오은선의 유일한 취미는 스키다. 7대륙 최고봉을 끝내고 후련한 맘으로 스키를 즐기던 그녀는 2005년 2월 오른쪽 다리 정강이가 복합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1년여 산을 쉰다. 그동안 8,000m 14좌 등반계획을 세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등반이 힘들어 ‘죽음의 산’이라고도 불리는 K2 등정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2001년 K2 원정을 경험했고 동료의 죽음을 보았기에 얼마나 등반이 어려운 봉우리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첫 단계로 2006년 8월 말 시샤팡마·초오유 원정을 추진했다. “나 혼자서 등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해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 스스로 체크해본다는 의미를 둔 그런 원정이었다”고 한다.

“원정 비용을 마련하느라 준비하는데 굿모닝신한증권에서 3000만 원에 TV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왔어요. 무조건 오케이했는데, 당시 다니던 회사(영원무역)에서 등반경비로 3000만 원을 지원해줬어요. 그래서 처음엔 시샤팡마만 계획했다가 바로 옆에 있는 초오유도 해버리자 그렇게 계획을 바꿨죠.”

오은선은 혼자 셰르파 2명만 고용해서 나선 이 원정에서 시샤팡마만 오르고 초오유는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 아닌 실패였다”고 설명한다.

“속공 체질을 키워보려고 캠프 수를 줄였죠. 먼저 시샤팡마부터 캠프를 2개만 설치하고 등정했어요. 힘들었지만 할 만했어요. 그래서 초오유도 3캠프는 생략해버리고 2캠프에서 곧바로 등정 시도를 해봤어요. 2캠프에서 3캠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개 3~4시간이니 그만큼 빨라야겠죠. 그런데 오전 11시쯤 록밴드에 도착했을 때 체력이 떨어지면서 머리가 너무 시려워왔어요. 고산에서 뇌세포가 죽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강풍이 불고, 날씨도 너무 나빴어요. 안 되겠다 싶어 되돌아섰지요.”

그 해 겨울 대학산악연맹 후배들과 추진한 동계 아마다블람 등정은 혹한 등반능력을 키우는 훈련이었으며 K2 원정을 함께할 동료를 물색한다는 취지의 원정이었다. 아마다블람 등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오은선은 후배 김선애(33)와 단둘이 단돈 1500만 원만 쥐고 초오유 재시도에 나섰다. 셰르파도, 산소도, 쿡도 없는 베이스캠프 이후는 오로지 단 두 사람만이 움직이는 초경량 원정대였다. 코펠 한 조, 압력밥솥 작은 것 하나, 휴대용 버너 한 조, 부탄가스 20개가 베이스캠프 취사구의 모두였다. 2캠프에서 바로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계획을 바꿔 3캠프를 구축해 등정에 성공한다.

오은선은 결국 2007년 7월 K2 등정길에 올라 등반 개시 18일 만에 정상을 밟았다. 의사 한 명을 포함해 대원은 6명이었지만 오은선 자신 이외에 고소 경험자는 초오유 3캠프까지 가본 것이 고산 경험의 전부인 김선애뿐이어서 실제 등반은 셰르파 2명과 진척시켜야 했다. 1, 2캠프만 고정텐트를 설치해두고 4캠프는 3캠프에 썼던 텐트를 옮겨 설치하는, 초오유에서 유용했던 방식을 썼다. 이렇듯 오은선은 어떤 룰을 답습하고 따르기보다 몸으로 부딪혀서 자신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내고 혼자서 셰르파들을 지휘해 오르는 특유의 단독등반 방식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K2는 역시 위험한 곳이었다. 오은선은 바로 앞에서 가던 다른 팀 셰르파가 낙석을 피하려다 추락사한 것을 목도했다. “추락해서 떨어지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며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부산팀 대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겨우 용기를 내서 다시 올라갔다”고 오은선은 회상했다.

K2 등정 이후 오은선은 옆의 브로드피크로 바로 이동,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오은선은 “이 등반 이후 비로소 14좌 완등을 결심했다”면서 “10개 정도 한 다음 정식으로 밝히려 했는데, 경비문제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라고 앞당긴 이유를 밝혔다. 당시 오은선은 “지금까지는 아마추어였지만 이제는 프로라고 선언하려 한다”며 K2 등정으로 얻은 자신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무리하지는 않겠지만 서두르고는 싶다”며 40대라는 나이 때문에 힘이 떨어지기 전에 목표를 이루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K2 원정을 떠나기 직전 영원무역을 그만두었고 이후 블랙야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14좌 등정 행보에 나선다. 다음해인 2008년 한 해에 마칼루, 로체, 브로드피크, 마나슬루까지 무려 4개의 거봉에 오른다. 시행착오를 통해 익힌 자신만의 속공등반이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러나 말처럼 쉽진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 2008년 마칼루 정상에 선 오은선.
“가장 힘들었던 봉이오? 마칼루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등정하고 4캠프로 내려와 주저앉았는데, 100m도 안 되는 저만치에 있는 내 텐트까지 도저히 못 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주위에 보이는 남의 팀 셰르파한테 내 배낭 옮겨주면 100달러 준다고 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마나슬루는 너무 쉬웠어요. 새벽 1시에 2캠프를 출발해서 정오 전에 등정했는데, 너무 빠르다고 정말 올랐느냐는 의심까지 받았어요. 등정 사진 찍어왔기에 망정이지…….”

오은선은 혼자서 셰르파들만 고용해 등반해왔다. 그는 자신의 속공등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원은 나 혼자인 게 등반하기에 더 좋아요. 내가 하루 더 쉬고 싶으면 그냥 쉬면 되니까요. 셰르파들은 철저하게 고용주인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고요. 하지만 동료가 없는 만큼 끊임없이 나 자신을 내 스스로가 체크해야 해요. 내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몸 상태는 괜찮은지 끝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실수가 없어요.”

오은선은 14좌를 등반하는 동안 손가락 동상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강인한 체력과 고소체질 외에도 그만큼 자기 제어가 철저하고 판단력이 빠르며 계획이 투철했다는 걸 의미한다. 살이 찔까봐 술자리도 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산악인들을 만나면 거의 술을 마시는 자리가 되는데 안 먹고 거절하면 보는 사람도 재미없고 그렇다 보니 술자리도 점점 안 가게 됐다고 한다. 이쯤 되면 철녀라는 별명보다 ‘강철여우’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다.

2009년에도 오은선은 2008년에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속공등반으로 캉첸중가, 다울라기리, 낭가파르밧, 가셔브룸1을 등정한다. 이 과정에서 고 고미영과 등정 레이스를 펼쳤으나 안타깝게도 낭가파르밧에서 고씨가 추락사한다. 고미영은 스포츠클라이머 출신이었고 오은선은 대학산악부 출신이었기에 성장 배경이 달랐다. 오은선은 고미영의 죽음에 대해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다”며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올해 5월 14좌의 마지막 종착지인 안나푸르나에 올랐다. 2009년 연초, 고 고미영과 오은선은 안나푸르나를 함께 등반하기로 약속했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오씨는 “차마 혼자 가기 뭐해서 고미영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올랐다”고 고백했다. 귀국 후 인터뷰에서 그녀는 “원래 사진을 정상에 묻고 오려고 했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너무 추운 데에 두는 것 같아 다시 품고 내려왔다”며 고씨가 “따뜻했으면 좋겠다”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오은선은 “내 돈 벌어 내 원정 가겠다”는 식의 냉철하고 단호한 면과 사소한 일에도 눈물 흘리는 상반된 면을 다 가지고 있다. “TV를 보다가도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펑펑 운다”며 본인이 생각해도 “감정이 풍부한 것 같다”고 얘기한다. 한편에서는 “눈물로 얘기하냐”는 비아냥 섞인 비판을 듣기도 했단다. 그러나 등반할 때는 감상적인 것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1980년대 포크송 같은 서정적인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이지만 베이스캠프에서는 시간이 남아도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가 있다. 마음이 흔들릴 까봐 그렇다고 한다.

2008년 브로드피크 등반 당시는 “외국 산악인들 사이에 동양 여자 혼자 끼어 굉장히 힘들었다”며 당시에는 언덕을 넘어가 혼자 울고 노래를 부르며 힘든 맘을 달랬다고 한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주로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함께하며 얘길 나누는 게 주된 일과였단다.

 

 

“외로우면 외로운 거다”

외국 여성 산악인에 비하면 오은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14좌를 해냈다. 이에 대해 그녀는 “파사반과 칼텐브루너가 있어 가능했다”고 한다. 시작부터 등정 봉우리의 개수가 차이가 커서 줄여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가능했다고 한다. 또 “8,000m는 알 수 없다”며 “열심히 노력하면 2~3번째는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8,000m는 1분 1초를 다투는 곳이에요. 비록 몸은 천천히 움직이지만 정신은 빠르고 예민해야 해요. 저는 단독등반이라 결정 단계가 나 하나만 결정하면 되니까 빠른 등반이 가능했어요. 속공등반 스타일도 계속 등반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어 만들어진 거예요.”

철녀라 불리는 타고난 체력도 한몫한다. 체육과학연구원은 지난해 9월 오씨의 신체능력을 측정했다. 가셔브룸1봉을 등정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피로 회복이 제대로 안 된 상태였는데도, 고산등반에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연구원 측은 전했다.

오은선은 심폐 기능이 탁월하다. 최대 산소섭취량은 단위 시간 내 얼마나 많은 산소를 섭취할 수 있느냐를 나타내는 수치로, 오랜 시간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심폐지구력과 직결된다. 오 대장은 이 최대 산소섭취량에서 63.8을 기록했다. 일반적인 고산등반자의 평균치(남자 57.9, 여자 55.2)보다 크게 앞섰다. 정상급 남자 철인3종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히말라야 14좌 중 12개 봉우리를 무산소 등정으로 오른 비결도 이런 산소섭취능력에 있다는 게 체육과학연구원의 설명이다. 오 대장은 에베레스트(8,848m)와 K2(8,611m)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산소 등정으로 정상에 올랐다. “대자연 그대로를 느끼고 싶어 무산소 등정을 고집한다”는 그의 생각도 이런 신체능력이 뒷받침돼 가능했다. 오은선 스스로는 “작은 키가 장점”이라 말한다. 작은 키에 비해 허벅지가 두꺼워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게 수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부분도 14좌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요소다. 오씨는 보통 산악인들에 비해 원정에서 경제적인 부족함을 겪은 적이 별로 없다. 7대륙 할 때는 자비로 가거나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았고 이후부터는 영원이나 블랙야크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스폰서를 구하려고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없었다”며 스스로도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오은선의 나이 44세. 혼기를 지났다는 흔한 말보다 산과 결혼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은선이가 올바른 사람 만나서 가정을 일구고 사는 걸 보면 원이 없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닌데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었다”며 하지만 14좌를 끝낸 지금은 “언제든지 맞는 사람만 있다면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한다. 한편으론 “자신의 말투가 단정적이고 목소리가 커서 남자들이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분석해보기도 한다. 한때 그녀의 마음속 이상형은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였다.

“그의 환경 때문에 연민의 정이 들었어요. 사회주의 속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등반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가 자유롭게 혼자 원정등반을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그런 상황이 통하는 면이 있어서 그를 따라하고 싶은 맘이 있었어요. 쿠쿠츠카는 산에서 너무 추우면 옷을 다 벗었다가 다시 하나씩 입으면 따뜻하댔는데 전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어릴 적부터 장녀로서의 책임감이 많았고 연애 한 번 하지 못한 솔로였기에 외로우면 벗어나려 발버둥치기보다 “외로우면 외로운 거다”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단다. 단독등반에 익숙해진 그녀였기에 KBS를 통해 등정 생방송을 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고 회고한다. “회사에는 미안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대규모 인원과 장비가 몰려와 등반을 함께하는 게 부담이었다고 한다.

오은선은 8,000m 신들의 봉우리라 할 수 있는 죽음의 지대를 오르며 처절한 고통과 공포를 맞닥뜨려야 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공포를 받아들입니다.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요.”

두려움을 이기려 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숱한 거봉들을 넘어 왔다는 오은선. 히말라야에서 채득한 그녀만의 삶의 방식이다.


[ 산악계 축하 ]

“대단하고 장하다는 것 말고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은선 14개 거봉 등정에 산악계 원로·인사들 격려


오은선의 8,000m 14개 거봉 완등은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산악계의 경사다. 국내 산악계의 원로인 김영도 선생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악단체인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한국산악회 전병구 회장, 이명규 대학산악연맹 회장의 축하 인사를 지상으로 전한다.


김영도 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

독일 슈피겔지에 최근에 발표된 오은선에 대한 문제와 자신들의 평가를 자세히 읽어봤습니다. 본래 큰일을 할 때는 옆에서 말이 많은 법입니다. 더군다나 경쟁자들이 등산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인들이고 동양권에서는 오은선 혼자였습니다. 그러니 유럽에서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오은선의 등반 태도나 인성으로 볼 때 분명 14개 봉을 제대로 올랐을 것으로 믿습니다.

유럽과 우리나라는 알피니즘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과 입지조건이 매우 다릅니다. 그곳은 등산의 발상지이고 우리나라는 2,000m도 안 되는 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의 여성이 8,000m 14개 봉을 등정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특히 여성으로 최초의 14개 봉 완등 기록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등산이 심한 경쟁으로 비춰진 것은 아쉽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오은선의 14개 봉 완등을 축하합니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

오은선 대장이 대학교 입학할 때부터 봐왔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자그마한 몸집에 강단이 대단했던 후배였는데, 여성 최초의 14개 봉 완등자가 된 것을 보니 참으로 기쁘고 대견합니다. 오 대장이 첫 번째 8,000m 봉우리인 가셔브룸1봉을 등정했을 때 본인도 한국대학산악연맹 단장 자격으로 현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박영석 대장도 같이 갔던 기억이 납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보니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서 오은선 대장은 정말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전병구 한국산악회 회장

정말 대단합니다. 본인도 1976년도에 정찰을 위해 안나푸르나1봉 북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름 정도 머물면서 매일 산을 바라봤는데, 그때 상황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자신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나푸르나4봉으로 대상지를 바꿔 성공했습니다. 이번에 오은선 대장의 안나푸르나1봉 등정을 생중계로 보면서 정말 가슴이 벅찼습니다. 여성으로서 그런 성과를 이룬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사람은 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진정 박수 받을 만한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대단한 일을 한 오은선 대장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이명규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

여성 최초로 8,000m 14개 거봉을 완등한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원 오은선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번 오 대장의 쾌거는 한국 여성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세계 곳곳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 특히 한국의 여성 차별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작고 가냘파 보이는 오은선이 해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여성들의 우월성이 빛을 발해 각 분야에서 창조적 역할을 해낸다면 한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오은선이 한국 여성의 리더로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산악인, 특히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원 모두가 성원할 것입니다. 장하다, 오은선.
 

[비운의 스타 고미영] 월간산[510호] 2012.04


비운의 스타 특집 ② 만년설에 사그라진 불꽃, 고미영 그외 종목 / 스포츠 종목별 소식

2012.04.25. 20:31

복사 http://blog.naver.com/rapmote/1563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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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산악인 고미영(42·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씨가 그의 열한 번째 8000m급 고봉인 낭가 파르바트(8125m)를 등정하고 내려오던 중 지난 12일 1500여m를 추락해 사망했다. 늘 쾌활한 웃음으로 당당하게 자신감을 내비치던 그였고, 추락 지점도 안전한 고소캠프(6100m 2캠프)를 불과 100여m 앞둔 지점이어서 사고를 접한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현장에 있던 고씨의 일행과 각국 산악인들, 파키스탄 당국은 헬기를 동원해 그를 구조하기 위해 나섰지만 악천후와 눈사태에 의한 2차 사고 위험으로 난항을 겪다 추락 나흘째인 16일 오전 11시경(현지시간)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참혹하게 추락한 고미영씨의 모습이 헬기 수색 중 발견되고, 현장에 있던 방송 카메라에 잡혀 국내 매스컴을 통해 연일 알려지자 산악계는 더욱 비통해 하면서도 평소 고씨를 알고 지냈던 산악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날 그의 행보를 두고 대부분 미디어에서는 '세계 최초' '여성' '철녀'라는 찬사와 각광으로 포장해 왔었는데, 이제 한 개인의 명예와 인간적 존엄을 위해서 그의 일기장을 들추는 것과 같은 원색적 보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42년 고미영이 걸어왔던 길도 다른 누구에게처럼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산에서 살아왔던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그건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도전과 응전'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된다. 불꽃은 그의 반생에 걸쳐 활활 타올랐으며, '죽음의 지대'의 절벽에서 만년설과 함께 사그라졌다.

불꽃과도 같았던 20년 외길

1989년 6월 25일, 혼자 구파발에서 시작해 북한산 산행에 나섰던 스물두 살 고미영은 깔딱고개를 올라 위문에 이르자 두 갈래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왼쪽은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철주 난간을 붙잡고 오르는 백운대행 일반 등산로였고, 오른쪽은 오르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가파르고 위험한 만경대 능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고미영은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지금 낭가 파르바트 위에서 멈춘 그의 첫 걸음이었다.

 

 

일전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미영의 궤적을 보며 '코드'라고 표현했었다. 실제로 90년대 '고미영'이라는 세 글자는 우리 스포츠 클라이밍계의 코드였다. 그 단어 안에는 '등반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 말고도 '목표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 '정직한 땀을 흘릴 줄 아는 사람' '당당하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모든 뜻이 담겨있다. 바위 아래서 만났던 고미영에겐 늘 누구에게서나 쉽게 찾기 힘든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으며, 그게 허세와는 거리가 먼, 정직으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이라는 건 주변의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북 부안 태생, 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전학을 와 졸업 후 농수산부 교육원 공무원으로 취직하며 서울 생활 시작. 그날 스스로 선택한 가파른 길을 향한 우회전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길은 여느 도시민이 매일 걷는 길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북한산 산행 이후 무언가 심장을 울리는 음성을 들었던지, 그의 삶은 이후 비탈로 나있는 한 갈래로 줄곧 뻗어나가게 됐다. 평소 입버릇처럼 "갈림길에 섰을 때 주저하는 데는 수천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던 그였다.

수직의 바위에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고미영의 길은 그 시절 자신의 노트에 적어두고 늘 보았다는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자'는 주문과도 같았다. 첫 산행을 했을 때 그의 몸무게는 72kg이었다. 160cm의 작달막한 키에 대어보면 암벽에 매달리는 것은 언뜻 상상하기 힘든 몸매였다. 단지 암벽등반을 더 잘하고 싶어 당시 노량진에 문을 연 실내암장을 찾아갔던 고미영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뚱뚱한 아가씨가 왔으니 대부분 남자들이었던 그곳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사람들이 '며칠이나 나오고 말까?'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벽에 매달려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땐 스포츠클라이밍이 아직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초창기라 혼자서 책을 보며 배우는 것들도 많았어요."

 

 

 

 

운동을 시작한 그는 한번 직벽에 매달리면 40분은 땅을 밟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점심시간을 비우고 구내 헬스클럽에서 벤치프레스를 들었다. 처음엔 20kg짜리를 들다 도저히 기운이 빠져 더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면 40kg의 무게를 얹고 악을 썼다. 그렇게 1년 만에 그는 20kg 넘는 몸무게를 감량하고 날렵해진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당시 그와 함께 인공암벽에 매달렸던 고 차선영씨(92년 사망)를 고미영은 늘 떠올렸다. 운동이 끝나고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고미영에겐 가슴이 벅찼다는 차선영씨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국내를 주름잡던 여성 클라이머였다. 그가 인수봉 등반 중 낙석사고로 사망하자 주변에서는 "10년 안에 그런 여성 클라이머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영웅의 죽음은 고미영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뚜렷한, 그러나 여전히 척박한 황무지에 있을 그의 길에 대해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한번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죠. 차선영씨의 꿈은 세계 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이었는데, 저도 같은 꿈을 갖게 되었어요."

93년 암벽등반대회에 처음 출전해 6위를 기록했던 고미영은 2년 만에 국내 1위, 그리고 고산등반으로 접어든 2005년 이전까지 아시아 최고, 세계 무대에서도 늘 상위권을 기록하며 명실공히 국내 여성 스포츠클라이밍 분야의 히어로로 자리 잡게 됐다.

홀드 밖으로 행군했던 지난 4년 여

2005년 고미영이 첫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을 때 주변에선 격려와 기대만큼 우려 섞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가 속했던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들과 함께 나섰던 파키스탄 드리피카(6447m) 등반 때만 해도 그는 고산등반에 있어서는 분명 '왕초보'였기 때문이다. 15m의 인공암벽을 6분 안에 올라야 하는 스포츠클라이밍 경기와 달리 고산등반은 지루한 기다림과의 싸움이며 희박한 공기 속에서 추위와 고독을 견뎌내야 하는 또 다른 벽이 있었다. 고미영은 정상을 15m 가량 앞두고 60여m나 추락하지만 아픈 몸을 추스르고 기어이 정상에 서고 만다. 클라이머로서 정점에 섰던 그는 홀드(암벽의 손잡이) 밖의 세계를 찾아 스스로 더 척박하고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고미영은 당시 "이제 알피니스트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서구의 산악 개념으로 250여년 전 알프스에서 출발한 알피니즘(alpinism)은 모든 산악인의 지향이며 고고한 이상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등산은 스포츠가 아닌 삶의 방법'이라거나 '무상의 행위'요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찾는 존재론적 자기인식'이라고 표현했다.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알피니스트의 길은 단지 기록을 좇는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 결과와 보여지는 수치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첫 고산등반에서 자신감을 얻은 고미영은 이듬해 에베레스트(8850m)에 도전했다. 세계 최고봉으로 나서며 그는 "누구나 가보고 싶은 곳 아닌가요? 고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함께 가는 대원들과 어울리며 많이 배우는 계기로 만들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허나 결과는 혹독했다. 변변한 등반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발가락 동상에 걸린 그는 다른 대원들보다 먼저 하산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훗날 그때의 실패는 경험부족에서 온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모든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싶었던 그는 10년 후배라도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해 마음을 낮춰 조언을 구할 줄 알았으며,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벽 4시 기상.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인공암벽 훈련, 외국어 공부, 독서, 일기, 11시 취침으로 일관했던 것이 산을 향해 '올인'하고 난 뒤 고미영의 일상이었다. 97년 고미영은 12년간 다니던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강하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참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던 그에겐 모든 것을 행복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었다.

 

 

 

 

첫 8000m급 고봉 등정이었던 2006년 가을의 초오유(8201m)와 이듬해 재도전 끝에 성공한 에베레스트 이후 세 번째 브로드 피크(8047m)를 준비하던 2007년 여름, 나는 달리기를 막 끝내고 땀에 절어있던 그를 만났다. 당시 조심스레 그에게 8000m급 14좌에 대해 물었지만 "주위에서 14좌 말을 많이 하지만 성급한 얘기이고, 고산을 목표로 새롭게 시작했으니까 이제 여기에 집중하고 싶다"고 겸손을 잃지 않았다. "뭐든지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죠. 한발 한발 걷다 보면 정상에 도착해 있지 않겠어요?"라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던 고미영이었다.

 

 

 

 

우리는 고미영에게서 무얼 찾고 있었나

2007년 에베레스트, 브로드피크, 시샤팡마(8027m), 2008년 로체(8516m), K2(8611m), 마나슬루(8163m), 올해 마칼루(8463m) 캉첸중가(8586m) 다울라기리(8167m) 낭가 파르바트로 숨 가쁘게 달려가는 고미영을 보며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전에 없던 '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약에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 그 '죽음의 지대'를 겪어보지 못한 평범한 우리들로서 이 영웅을 닮아가는 추체험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는 세계 처음으로 8000m급 14좌를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엄홍길을 필두로 박영석, 한왕용이 그 대기록을 달성했다. 허나 진정 우리가 그들의 산행에서 찾고 싶었던 건 '정복'이 아닌 '존재'로서 거기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아니었을까.

등산 말고 잘하는 게 없냐고 물었을 때 고미영은 "노래 잘하고 춤 잘추고 아! 기타 연주도 조금"이라고 답했었다. 아직 그의 연주를 듣지 못했고, 앞으로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고미영’이라는 이 세상에서의 작고 작은 이름 하나가 단지 기록과 경쟁에 묻혀 세상에 울려 퍼지지 못한 기타 연주가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