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019-13권)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카프리2 2019. 9. 7. 23:04

(동학혁명에 관해 여러 책이나 자료를 읽었지만)

(이 책처럼 동학농민혁명사의 핵심과 의미를 모두 담으면서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처음이다...강추한다)

 

 

■ 책을 읽은 배경

- 동학혁명에 대해 체계적이고 자세히 알고 쉽어서

 

 

 

■ 개 요

 

1. 읽은 날짜 : 2019. 9. 6(금)-9.7(토)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 : 신순철.이진영/서경문화사/191

 

3. 제목 :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4. 목차

 1장 : 혁명 전사, 동학농민혁명을 위하여

 

 2장 : 3월 봉기,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3장 : 집강소, 무르익는 혁명의 희망

 

 4장 : 9월 재봉기,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

 

 5장 : 농민들이 꿈꾼 세상

 

 

 

■ 지은이

 

 - 신순철 :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 공부

                현재 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

 

 - 이진영 : 전북대학교 동학농민전쟁과 전라도 태인현의 재지사족으로 박사학위,   

                현재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 

 

 

 

■ 책을 읽은 소감

 

- 그 동안 동학에 대해 인터넷 지식백과나 조선왕조오백년, 답사여행의 길잡이 동학편들을 읽었는데

-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전체 내용이 정리되어 기쁨.

- 기회되면 동학현장을 문화해설사 소개로 답사하고 싶음. 정읍시티버스편을 알아봐야겠음. 

 

 

 

■ 밑줄을 그은 글

 

1. 3월 봉기,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대체로 4단계, 1) 고부농민봉기(1894년 1-3월), 2) 3월 봉기(3-5월), 3)집강소시기(5-9월), 4) 9월 재봉기(9-12월)로 구분된다.

 

2. 청.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는 8월 16-17일 평양에서 전개되었다. 이날 청군 2만여명과 일본군 12,000여명이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청군을 궤멸시킨데 이어 17-18일에는 대동강과 압록강 앞바다의 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청의 경우 일본과 달리 전쟁준비를 치밀하게 계획하지 못한데다 일본군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고, 위정자들간에 내부갈등까지 겹쳐 효율적인 전쟁수행이 어려웠다. 그러나 일본군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중국대륙까지 계속 진격해 갔다. 9월말 중국의 봉천성, 10월중순 여순항, 12월말 산동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이듬해 1월 22일 지무까지 장악하자 청은 백기를 들었다.

 

3. 1894년 11월 9일(음력) 날이 밝으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기록되는 이른바 공주 우금치전투가 벌어졌다. 9일의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우금치 전투의 참상은 전봉준도 "1차 접전후 1만여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 자가 3천명이었고, 그 뒤에 다시 2차 접전하고 점고하니 5백명에 불과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심했다. 전투는 이후 11일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미 전면적 전투가 아니었다.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은 일본군 200여명 관군 2,500명 등 2,700여명에 불과한 진압군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런 숫자 우세에도 참혹아게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지적이 있다.

공주전투에서 패핸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전투 수행능력과 화력의 차이였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었고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가 2,000m에 이르는 미제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다 소총 등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이었고 대부분 칼과 활, 죽창을 지녔다. 일부가 지닌 재래식 화승총은 사거리가 100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차이로 농민군은 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에 근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4. 농민군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체포.처형되었다. 김개남은 12월 초순 태인에서 잡혀 전주에서 효수되고, 전봉준은 순창에서, 손화중은 고창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은 '일본에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일본의 수차례에 걸친 유혹을 당당히 뿌리치고 이듬해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의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