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과 전라도 사람들 독후감)
나의 땅통종주(땅끝에서 통일전망대)가 땅끝기맥과 호남정맥을 마치고, 대간에 접어들었다. 지리산을 넘어 임진왜란 때 격전지 남원을 지나고 있다. 마침 집에 <권율과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어 읽었는데, 흥미로워 독후감을 쓰기 위해 두 번 읽는다.
임진왜란 개전 20여일만에 서울(한양)을 내준 조선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신하고, 명나라가 참전한다. 왜군은 임진강을 넘으면서 이순신에 의해 차단된 서해 보급로 대신에 육로 확보를 위해 호남을 침입한다. 웅치, 금산성, 이치 전투가 벌어지고, 권율과 전라도 사람은 호남을 사수한다. 권율은 서울 수복을 위해서 수원 독성산성과 행주산성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義)로 뭉친 3인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인물은 권율이다. 권율은 46살 늦깍이로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한 권율은임진왜란 때 육상 전투에서 3전 전승을 거뒀고, 행주산성전투에서는 2,300명의 병력으로 13배인, 3만명의 왜적을 물리친 장수다. 권율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고, 사위는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이다.
두번째 인물은 광주의 의병장 고경명이다. 고경명과 두 아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60세의 고경명은 둘째 아들과 금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순절했고, 큰 아들은 2차 진주성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순절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은 과거시험 문과에도 합격한 엘리트였다.
세번째는 남원 출신 황진이다. 과거시험 무과에 합격한 황진은 이치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왜군을 물리쳤고, 충청병사로 재직시 10만명이 넘은 왜군에 1만명으로 외롭게 싸운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다 순절하였다. 곽재우 의병장이 자기 관할도 아니면서 왜 불나방처럼 뛰어드냐고 말했지만, 김천일 의병장을 도우며 꿋꿋이 싸우며 목숨을 바친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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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과 전라도 사람들은 광주광역시 북구청 문화진흥과장이 쓴 책인데,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권율과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의 이야기를 쓴 책이다)
(몰랐던 사실이 많아, 책을 두번 읽고 독후감을 쓴다)
■ 책을 읽은 배경
- 권율의 행주대첩, 의병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
■ 개 요
1. 읽은 날짜 : 2019. 11. 14(목)-19(화)
2. 글쓴이/출판사/페이지 : 김영헌 /ㅣ심미안 / 374
3. 제목 : 권율과 전라도 사람들
4. 목차
프롤로그 전라도는 국가를 보위하는 근본이다
제1부 권율, 광주사람과의 인연
제2부 전주성 수성, 전라도 보전
제3부 전라도군, 북으로 북으로 진군
제4부 전라도 정예병력, 행주산성 승전
에필로그 과거는 현재와 미래 보는 지혜의 창
■ 지은이 : 김영헌
- 광주광역시 북구청 문화진흥과장를 거쳐 현재는 북구의회 사무국장(4급 지방서기관)으로 재직 중
- 주요저서 : 김덕령 평전(2006), 광주의 산(2017) 등
■ 프롤로그(책을 읽은 배경, 권율 소개)
1. 책을 읽은 배경
- 나는 한반도 종주를 하고 있다. 일명 땅통종주인데, 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한반도 최장 거리(1,350km) 산길을 한 달에 네번 홀로 걷고 있다. 그 여정이 남원을 지나고 있다. 남원은 유서 깊은 도시이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 1만여명이 일본인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된 도시여서 그 자료를 찾다, 아내가 사 놓은 권율과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책이 보여 읽게 되었는데, 이제 까지 몰랐던 권율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독후감을 쓰다 보니, 두 번 책을 읽게 되었다.
2. 권율 소개
- 권율은 1537년 강화부 연촌 향제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자랐다. 호는 만취당. 모악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고, 권율의 사위인 이항복도 영의정을 지냈다. 과거는 46세인 1582년 문과에 급제했고 6년만인 1588년 호조정랑(5품)이 되었다.
- 임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일본과 북쪽 오랑캐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선조는 비변사에 장수를 천거토록 했다. 이때 류성룡이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하여 정규의 승급을 뛰어넘는 정5품에서 정3품으로 발탁하였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6세인 그를 광주목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나주목사, 전라감사 겸 순찰사, 도원수(1593~1598)를 역임하는 등 왜란 내내 선봉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1599년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임진왜란, 정유재란
- 임진왜란 : 1592년 4월 13일(양력 5.23) 오후 5시경 부산 앞바다에서 발발
- 정유재란 : 1597년 7월~1598년 12월
■ 줄거리
1. 호남(전주성)을 지키기 위한 위한 3대 전투 : 웅치전투, 금산성전투, 이치전투
- 조선 수도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북상하여 5월 8, 9일경 임진강에서 작전 회의를 갖고 조선 8도를 분할 통치하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는 조선 전역을 명나라 침공의 보급기지로 삼아 군량을 조달하고 부산에서 의주 간의 도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이순신에 의해 서해 뱃길이 막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라도는 제6번대 고야야카와 다카카게가 침공을 담당했다.
임진강에서 나온 병력이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로 가려면 험준한 산을 넘어야 한다. 하나는, 진안에서 웅치(곰재)를 넘어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금산-진산을 거쳐 이치(배재)를 넘는 두 길이다. 웅치와 이치는 전주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참고로 나는 호남정맥(땅통종주)를 하면서 2019년 9월 웅치(곰재)를 넘었고, 금남정맥을 하면서 3년전 턱밑 백령고개까지 갔는데, 이치(배재)는 아직 가지 못했고, 2년전 중학동창 소풍 때 이치(배재)에서 점심을 먹어서 인상에 남는다.
1) 웅치전투
1592년 7월 7일-8일 치열한 전투끝에 웅치는 뚫렸으나, 왜적의 피해도 많았다. 웅치 전투 지휘자인 김제군수 정담은 전사했다.그러나 안덕원에서 동복현감 황진의 활약)과 전주성의 이광, 이정란의 기지로 왜군은 물러났다.
웅치로 퇴각하면서,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고는 그 위에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조상한다"라는 푯말을 세웠다. 아군의 죽음을 무릅쓴 혈투에 적군도 감동한 때문일 것이다.
2-1) 1차 금산성 전투 : 고경명, 류팽로, 안영 순절
60살의 고경명과 둘째 아들 인후가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첫째 아들 고종후는 1년 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고경명과 고인후, 고종후는 과거 문과에 합격한 인재였는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바친 것이다.
2-2) 2차 금산성 전투, 조헌 등 7백 의사 순절
왜군이 퇴각 한 뒤에 문하생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이라고 표시했다.
3) 이치전투
이치는 금산(진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통로로 양 옆에는 70도에 달하는 험한 산이 있었다. 권율은 그 좁은 고갯길 양편 산 위에 진지를 구축했다.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의 활약으로 왜병를 패퇴시켰다. 왜적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전라도 관군과 의병의 혈전으로 무주.금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시가와군은 더 이상 전라도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어 결국 경상도로 철수하기에 이른다.
2. 서울 수복을 위한 수원 독성산성 전투
1) 독성산성
한양 수복을 위해 권율이 전주에서 근왕군 2만여명을 이끌고 수원 독성산성(현 오산시 지곶동)에 진을 친다. 서울로 갈수도 있었지만 권율은 용인전투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서울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수원의 독성산성(208m)에 진을 친 것이다.
2) 용장을 얻다.
권율은 무관 선거이와 조경이라는 두 용장에다 이치전투에서 맹위를 떨친 황진 등이 곁에 있었다. 진도군수 선거이를 무과출신인데 전라병사로 삼았다. 또 경기감사 심대의 천거로 수원부사인 조경을 조방장으로 임명했다.
3) 독성산성 전투
1592년 12월에 5일 동안 벌어졌는데, 권율의 철저한 수성전으로 왜군은 큰 타격을 입어 퇴각했다.
3. 행주산성 전투
1) 정예병력 2,300명이 행주산성으로 이동
권율은 휘하 장병 4천 명 중 의승장 처영이 이끄는 의숭군 등 정예병력 2천 300명을 별로로 뽑아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웅치와 이치, 독성산성 전투경험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맹장과 정병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주어 금천의 금주산에 주둔체 해 서울의 왜군을 견제하면서 행주산성을 성원토록 했다.
2) 행주산성은 지형이 취약
행주산성은 고려조부터 임란 당시까지 약 700여 년간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설불비로 산성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에 조경은 목책성을 설치하여 토성을 보완하였고 지형에 따라 석성이나 참호를 구축하기도 했다. 특히 외성에서 방어에 가장 취약한 서.북면에 정예 병력인 승군을 배치하여 내성의 지원을 받으면서 방어토록 했다.
3) 왜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짐
보병은 조총수와 궁수, 창수 등 세 부대로 무장되었다. 전체 전투원 중 조총 병사는 부대마다 약 10~3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전투는 조총수가 사격을 하고 2선으로 물러나 재장정하면 궁수가 활을 쏜다. 그 후 조총수가 계속해서 사격하여 상대 전열을 흐트러지면, 창수가 뒤를 따라 보병 뒤에 위치하고 있던 기병과 함께 진격하여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4) 소모사 변이중, 권율 진중에 화차 40대를 보내다.
2월초, 권율은 행주산성으로 군진을 이동하면서 변이중에게 급히 '화차'를 보내 달라고 한다. 화차는 수레 위에 40개의 승자총으로 총통기를 설치하고 총의 심지를 이어서 차례로 쏘게 한 병기이다. 변이중은 화차 300대 중 40대를 보낸다. 행주산성 싸움은 권율의 2,300명대 일본군 3만명의 싸움으로서 조선군의 13배가 넘었다. 권율은 행주대첩이 끝난 뒤, 행주의 싸움에서 "나는 실로 화차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5) 수만 개의 화살 지원
아침부터 오후 3~4시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졌을 때 충청수사 정걸과 경기수사 이빈이 배 2척을 몰고 와서 수만 개의 화살을 운반해 주었으며, 또한 전라도(식량 수송선) 40여 척이 들어와서 양천 포구를 뒤덮게 되니 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적군을 완전히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6) 행주대첩은 육전 3대첩
임진년 9월 이정암의 연안대첩(개성인근), 10월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란 중 조선군이 승리한 육전 3대첩이다.
행주 승첩의 요인
1592년 2월 12-15일까지 행주산성전투에서 13분의 1도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지휘체계의 확립과 용병술의 승리였다.
2) 전라도 맹장과 정병을 가진 정예 병력을 들 수 있다. 2만명 중 2천 3백명을 엄선했다.
3) 지리적으로 유리한 산성을 선택했다.
4) 편전, 총통, 화차 등 병기의 우수성을 들 수 있다.
5) 행주산성을 거점으로 한 조선군의 기각지세 포진을 들 수 있다.
6)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군에 대한 왜군들의 경시와 교만한 임전 자세를 들 수 있다.
4. 일본군의 서울 철수
결국, 왜군의 평양패전 이후 복수전이라고 할 수 있는 행주산성 전투서 대패했다. 화의 진행은 3월 초 일본 측이 한강을 순시하던 우리 수군을 통하여 제안하였고 명나라 측이 호응하여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은 명나라와 교섭 상황을 일본에 머물고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자 진퇴양난에 빠졌던 일본은 명나라와 화의하여 4월 18.19일에 아무런 충돌 없이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리하여 4.20일 조선군과 명나라 군은 서울 도성으로 들어왔다. 조선 수도 서울을 빼앗긴 지 1년 만이었다.